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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 하나. 명색이 여기저기 우리 현대사를 강의하러 다닌다는 역사 교사인데도, 여태껏 이곳 광주에 백범 김구를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망명 후 생애 대부분을 중국에서 살아온 그가 대체 광주와 무슨 인연이 있어서일까.
 
찾아온 이들에게 악수를 권하는 모습으로, 실제 체격과 동일하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 광주 백범기념관 입구 김구 동상 찾아온 이들에게 악수를 권하는 모습으로, 실제 체격과 동일하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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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김구는 '치하포 사건'으로 체포된 후 탈옥해 수년간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참고로, '치하포 사건'이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한 그가 대동강변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土田)를 척살한 일을 말한다. 일설에 쓰치다는 황후를 시해하고 도망중인 자객이 아니라 일개 상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일로 인해 체포된 뒤 인천감옥소에 수감되고 사형 선고까지 받지만, 김구는 가까스로 탈옥에 성공한다. 기약 없는 도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몸을 숨기기 위해 동학농민운동 시절 옛 동지를 찾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종친의 집에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충청도 공주 마곡사에서 1년 동안 머리를 깎고 승려 생활도 했다.

당시 갓 스물 남짓이었던 그를 아껴 기꺼이 숨겨준 곳은 삼남지방, 특히 전라도 땅이다. 몇 해 전 그가 '아기 접주'로 활약했던 동학농민운동의 태 자리인 탓일 테지만, 지역민들이 그의 품성과 자질을 애초 높이 평가했다는 뜻이다. 도피 생활 속에서 청년 김구는 저물어가는 나라와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보았고, 이후 불굴의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자양분으로 삼았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그 시절 자신을 숨겨준 은혜를 잊지 않고 은거했던 곳을 찾아 삼남지방을 순행하였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뒤라 20대 초반이었던 청년 김구는 일흔을 넘긴 노인이 돼 있었다. 그 '보은'은 순행 길에 잠시 광주에 들렀고, 기념관이 자리한 '백화(百和) 마을'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백범과 백화 마을의 인연

당시 광주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김구 선생 환영대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해방 직후 귀향한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듣게 된다. 김구는 자신이 그동안 성금으로 받은 재산을 모두 그들을 위해 써달라며 기증하였고, 그것을 종잣돈 삼아 조성한 거주지가 '백화 마을'이다.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라'는 뜻으로, 광주 지역의 가장 오래된 '해방촌'인 셈이다.
 
김구의 전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책장을 넘겨가며 백범 일지(영인본)를 직접 읽어볼 수도 있다.
▲ 백범 기념관 내부 김구의 전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책장을 넘겨가며 백범 일지(영인본)를 직접 읽어볼 수도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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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민족 지도자 김구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으로, 기념관을 지어 기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등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광주천변에 기념관이 세워진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15년의 일이다. 2011년 광주천변 환경 정비 사업을 벌이면서 김구와의 인연이 묻힐 것을 우려해 '현충 시설'을 남긴 것이다.

본디 이곳은 '학동 8거리'라고 불리던 일제강점기의 갱생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1930년대 광주천변에 움막을 짓고 모여 살던 빈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집단 거주지였다. 그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가운데 감시 초소를 두고 방사상으로 길을 낸 '파놉티콘' 구조여서 8거리로 불렸다. 정사각형으로 된 8거리 마을은 당시 전국에서 유일했다고 전한다.

현재 '학동 8거리'는 사진을 통해서만 과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여러 차례 도시 정비 사업을 하면서 형태가 시나브로 바뀌었고, 근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다. 웬만한 주민자치센터보다 작은 규모일지언정 이 기념관마저 없었다면, 이곳에서 8거리와 김구를 떠올리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모두 화목하게 지내라는 김구의 바람은 아파트 단지 이름으로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이다. 기념관 입구에서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고 서 있는 김구의 동상이 외갓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하면서도 외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미세먼지 없는 화창한 주말 낮인데도, 기념관을 찾는 이가 아무도 없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백범 기념관 내부의 벽면에 새겨진 이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 명단. 이들 중 익숙한 이름들이 거의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 광주전남 출신 독립운동가들 백범 기념관 내부의 벽면에 새겨진 이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 명단. 이들 중 익숙한 이름들이 거의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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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전시실은 김구의 가계로부터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시대 순으로 노트 정리하듯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인본일지언정 백범일지와 그의 행적을 담은 희귀한 사진들이 앨범처럼 구성돼 있어서, 백범 김구를 공부하는 데에 이곳 하나면 충분할 성싶다. 전시실 맨 마지막에는 광주전남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을 일일이 새겨놓고 기억할 수 있도록 동선을 꾸몄다.

사실 이곳을 찾은 건 우연한 계기였다. 도피 생활 당시 김구가 달포 남짓 머물렀던 쇠실 마을의 은거지 가는 길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에 '연관 검색어'로 눈에 띄었다. 집에서 가자면 같은 방향이라 별 기대 없이 휴게소 삼아 잠깐 들러볼 요량이었다. 김구가 숨어들었던 쇠실(金谷)은 야트막한 산에 에워싸인 전남 보성의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탈옥 후 도피생활 당시 달포 간 머물렀던 쇠실 마을의 은거지다. 사진 속 당시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쇠실 마을 은거지 탈옥 후 도피생활 당시 달포 간 머물렀던 쇠실 마을의 은거지다. 사진 속 당시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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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실 마을에는 지금까지 그가 신세를 졌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전시된 사진을 보면 지붕만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을 뿐 가옥 구조와 마당, 주변 풍경이 거의 그대로다. 여전히 주민이 살고 있어서 집 안을 들여다볼 순 없지만, 두루마기 차림으로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김구의 사진과 대문 옆에 김구가 은거한 곳이라는 표지석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안동 김씨 종친의 집으로, 이곳에서 숨어 지내면서 친인척 등 주위 사람들과 시국을 논했다고 전한다. 대문이 마주 보이는 터에 은거 기념비와 한옥의 작은 기념관을 지어놓았는데, 그 뒤편엔 그가 즐겨 찾았다는 우물터도 남아있다. 마을 입구에 비교적 너른 주차장도 갖춰놓았지만, 방명록의 필기자국이 누렇게 바래있을 만큼 찾는 발길이 뜸하다.

2019년은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은거지와 마주보고 있는 터에 기념비와 기념관을 조성해놓았는데, 찾는 이가 거의 없어 주변의 풍경조차 을씨년스럽다.
▲ 쇠실 마을 은거 기념비와 기념관 은거지와 마주보고 있는 터에 기념비와 기념관을 조성해놓았는데, 찾는 이가 거의 없어 주변의 풍경조차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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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김구와 광주의 인연은 이곳 쇠실 마을 덕일 성싶다. 스무 살 남짓의 생면부지 청년이었던 자신을 환대해준 은혜를 정작 쇠실 마을에 갚지 않고 '엉뚱한' 광주 사람들에게 베푼 셈이 된다. 그가 지었다는 '백화'라는 이름도, 어쩌면 광주와 보성 사람 따지지 않듯 남과 북을 가르지 말고 두루 화목하게 살아야한다는 다짐은 아니었을까.

여태껏 백범 김구의 멸사봉공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을 숱하게 쏘다녔다. 그의 묘소와 기념관이 자리한 효창공원은 열 번도 더 다녀왔고, 그가 서북청년회 안두희가 쏜 흉탄에 쓰러진 경교장과 잠시 승려 생활을 했던 충남 공주 마곡사까지도 즐겨 찾았다. 그런가 하면, 오로지 그가 이끈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할 목적으로 중국 여행을 계획한 적도 있다.

그런데, 정작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다. 대학 졸업 후 내려와 20년 동안 살아온 이곳 광주에서 김구의 삶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또 하나의 '웃픈' 고백이지만, 통일이 되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는 한 설문조사에서 생뚱맞게 황해도 해주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유를 적는 곳에 김구와 안중근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내년이면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역사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계기교육과 유적 답사를 계획하고 있다. 다양한 수업자료를 그러모으는 한편, 답사 지역으로 서울과 천안, 예산과 밀양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유관순과 윤봉길, 김원봉 등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장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중에도 김구는 단연 중심일 수밖에 없다. 워낙 먼 거리라 쉽진 않겠지만, 서울과 함께,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을 함께 들르는 동선까지 구상중이다. 그런데, 김구와 광주의 인연을 알게 됐으니 자연스럽게 '차선책'이 마련된 셈이다. 광주와 보성을 찾는 것만으로도 백범 김구의 위대함을 깨닫는 데 그다지 부족하지 않을 듯하다.

태그:#백범 김구, #백화 마을, #쇠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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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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