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치슈(笠 智衆)는 일본의 영화배우다. 1904년에 태어난 그는 1993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에 앞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그가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였다는 점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다수에 출연한 그이기에 오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얼굴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오즈를 사랑해 여러 조사를 하다 보면 류 치슈와 오즈 야스지로의 얼굴이 닮았음에 한 번 놀라게 되고, 두 사람의 체격과 성격이 유사함에 두 번 놀라게 된다. 그야말로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던 셈이다. 

프랑스와 트뢰포의 페르소나인 장 피에르 레오도 그와는 단 네 번밖에 작업하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페르소나인 미후네 토시로도 그와는 열여섯 번 정도를 작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류 치슈는 오즈의 영화 대부분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삶과 영화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오즈와 함께 늙어가던 류 치슈가 오즈를 잃고 홀로 남았을 때 받았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테다. 감독의 데뷔작이 시네아스트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라면, 감독의 유고작까지를 함께한 류 치슈는 오즈라는 시네아스트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세세히 들여다본 셈이니 말이다. 

류 치슈는 오즈의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오즈의 세계에 동화되었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오즈의 세계에는 류 치슈가 필요했기에 그가 없었다면 오즈 세계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체재가 아니라 상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즈를 논할 때 류 치슈를 빼놓을 수 없고, 류 치슈를 논할 때 오즈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맥락으로 오즈의 영화를 보면 영화의 내부와 외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선이 생겨난다. 영화 속의 류 치슈는 오즈의 대변인이고, 영화 밖의 오즈는 류 치슈의 대변인이므로, 영화의 안팎 둘 중 어디를 보아도 사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영화 <동경 이야기>의 한 장면

영화 <동경 이야기>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오즈 영화에서 계절은 흐르지 않는다

오즈의 필모그래피는 불완전한 보존판을 포함해서 현재까지 37편이 알려져 있다. 즉 오즈가 작업한 55편의 작업물 중 일부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오즈 류 치슈 가족의 탄생과 해체를 목격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1927년부터 1962년의 전체 필모그래피 중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첫 번째 류 치슈는 1929년 <학생 로망스 젊은 날>의 25세 사내이다. 또한 우리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류 치슈는 1962년 <꽁치의 맛>의 58세 사내이다. 이 33년의 세월 동안 벌어지는 37편의 일대기를 우리는 감상할 수 있다. 

33년의 세월 동안 33번의 사계절이 흘러갔지만 오즈 영화에서 계절은 흐르지 않는다. 계절 이름이 붙은 오즈의 후기 영화에서 겨울은 등장하지 않기에 그곳은 사계절이 흐르지 않는다. 봄여름가을만이 있을 뿐 겨울이 없기에 우리는 그곳이 어째서 봄이 올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오즈의 영화에서는 가을 다음에 곧바로 봄이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지가 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해동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 우리에게 남는다. 봄이 온다는 건 차가움에서 깨어나 만물이 소생한다는 것일 텐데, 가을의 풍요로움이 곧바로 봄의 따스함으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우리는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때 오즈 세계의 류 치슈가 등장한다. 우리는 오즈의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류 치슈의 얼굴을 본다. 그는 마치 잠자리에 들기 전 떠오르는 여러 상념처럼 불현듯 우리를 찾아온다. 어느 영화에선 파칭코(일본식 구슬치기 도박) 가게 주인으로 나오고, 어느 영화에선 낚시하는 어부로 나오며, 어느 영화에선 인자한 아버지로 등장하고, 어느 영화에선 철없는 남학생으로 등장한다. 딱히 그가 주연이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는 어떠한 형태로든 오즈의 영화에서 반드시 등장하게 되어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시간이나 계절이 갖는 필연성과 결합하기도 한다. 즉 그가 조연으로 등장할지언정 속에 품은 함의는 영화 속 전반에 퍼져 있는 셈이다. 
 
 영화 <꽁치의 맛>의 한 장면

영화 <꽁치의 맛>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오즈의 세계가 전면에 드러나다 

류 치슈는 오즈 영화에서 끝없이 등장해야 하고 그러나 뒤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이 선형적인 흐름은 차가운 겨울, 차가운 표정만을 건너뛴다. 그렇게 오즈 영화에서 류 치슈는 가을의 풍요와 봄의 따스함을 가진 채 줄곧 이어진다. 그래서 오즈 영화의 류 치슈는 항상 인자한 표정만을 짓거나 혹은 화를 내더라도 진심은 아니다. 류 치슈가 화를 낼 때는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들 듯, 마지못해 매를 들어야 하는 부모의 슬픔이 이면에 감춰져 있다. 말하자면 오즈 영화에서 흐르지 않는 시간을 오즈만의 방식으로 재구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류 치슈 덕분이다. 오즈 영화의 거의 전부에 출연한 류 치슈는 오즈의 세계에서 줄곧 이어지는 하나의 테마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평온한 표정은 오즈 세계가 외부 세계의 드센 풍파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며, 이따금 그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는 그럼에도 외부 세계의 법칙이 영화 안으로 개입해 온다는 불온함을 우리는 깨닫는다. 

요컨대 우리가 오즈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여러 의문은 그런 맥락으로도 생겨난다. 바깥세상은 전후를 맞이해 그리 혼란스러운데도 오즈 영화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오히려 그곳은 일본이라는 세계를 바탕으로 한 평행 세계처럼 보일 지경이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마 볼 수가 없던 것인지, 혹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인지, 우리는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평온한 류 치슈의 얼굴에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과연 어떻게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서 현실의 문제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오즈의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의 해체 양상은 현실의 그것이 아니라 오즈의 창작품에 불과했단 말인가. 우리의 생각은 그런 식으로 끝없이 복잡해져만 간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쉽게 해소될 수 있다. 류 치슈는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단지 류 치슈뿐만 아니라 오즈 영화의 인물 모두가 연기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즈는 배우에게 연기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사실 말만 조언이었지 감독인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히치콕처럼 배우를 극의 도구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오즈 영화의 세계는 '살아간다'라는 것이 주가 된다는 점에서 히치콕과는 다르다. 혹자는 연기하지 말라는 것이 어째서 살아간다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즈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인물이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려고, 다시 말해 인물들 모두가 그 세계에 '일제히' 동화되는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배우 개인의 개성은 감추어지고 대신 영화의 세계가 그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즉 오즈 영화의 인물들이 세계 속에 잠식된 것은, 오즈가 바라는 이상향이 영화 속의 세계에 내재하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오즈의 겸손함일까. 아니면 오즈의 회의감일까.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이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축이지만, 그들 모두가 오즈를 대변하는 '일제히' 동기화된 인물이라면, 오즈의 영화에서 흐르지 않는 건 세계가 아니라 인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오즈의 영화에서 겨울이 없다는 건 외부 세계의 차가움을 영화 속에 들여놓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 차가움은 오히려 인물들이 품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러니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따스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만큼 차가움을 따스하게 만들려는 동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고, 반대로는 그 차가움을 애써 따스하게 만들어보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영화 오즈 야스지로 류 치슈 동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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