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끔 그런 표현을 쓰곤 한다. 영화와 같은 삶. 평범한 사람들이 살지 않을 만큼 기구하거나 혹은 화려한 인생을 두고 그런 표현을 쓴다. 이런 삶은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생애를 발단과 전개, 갈등과 결말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말을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 곳이 극장이든 혹은 TV가 있는 거실이든 영화는 늘 보는 사람과 함께 한다. 세상에 관객이 단 한 명도 없는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소소하든 특별하든 영화 속 캐릭터들에겐 늘 그들의 삶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못 만들지라도 서사가 없는 영화는 없다. 말하자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과 이야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즉 내게 영화와 같은 삶이란 타인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삶을 삶으로서 사연을 사연으로서.
 
 영화 <어떤 여자들>

영화 <어떤 여자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그런 의미에서 영화 <어떤 여자들>(2016)을 보고 난 이후 나는 그런 메모를 했다. 영화가 되려다 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작품은 변호사인 로라(로라 던 분), 새로운 집을 지으려는 지나(미셸 윌리엄스 분), 낮에는 말을 돌보다 밤에는 대학교 야간 강의를 청강하는 여인(후술하겠지만 엔딩 크레디트에도 그녀의 캐릭터명은 목장 인부(The Rancher)라고 되어있고 특별한 이름은 없다, 릴리 글래드스톤 분), 이 세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먼저 로라는 산업재해로 건강과 직장을 잃었지만 법적인 문제로 더 이상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의뢰인 윌리어 때문에 골치를 겪는다. 윌리어는 더 이상 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란 로라의 말에도 계속 사무실을 찾아 그녀를 귀찮게 한다. 거기에 로라의 차에 불쑥 합승해 태워달라고 요구하거나 '이제는 사람들을 모두 총으로 쏴 버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을 해서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 남자는 변호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돌봄노동자? 테라피스트?  
 
 영화 <어떤 여자들>

영화 <어떤 여자들> 속 로라 던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가 되려다 만 인생
 
영화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나는 한 때는 학교 건물의 벽이었지만 이제는 무너져 돌덩이로 남은 사암으로 집을 짓고자 한다. 그녀는 이웃 노인인 알버트를 찾아 그 사암을 자신에게 팔지 않겠냐고 권유한다. 하지만 지나가 우려한 것처럼 이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알버트는 계속해서 대화의 맥락에서 어긋난 딴소리를 반복한다. 겨우겨우 거래가 성사가 되는가 싶다가도 그는 사암으로 학교를 짓게 된 사연이나 자신이 그 땅에 정착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돌을 줄 것인지, 그렇다면 얼마를 지불하면 되는지 그것만 이야기하면 끝날 대화가 끝도 없이 길어진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서 지나 역을 맡은 미셸 윌리엄스가 대단히 훌륭한 배우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최소한의 제스처만으로 이렇게 짜증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영화 <어떤 여자들>

영화 <어떤 여자들> 속 미셸 윌리엄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마 여기까지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사람도 세상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결국 소통에 실패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작품의 내용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에피소드를 감상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이야기에는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겨울을 맞아 목장에 기거하며 일을 하고 낮에는 말을 가꾼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야간 대학을 찾아 등록도 하지 않은 심지어 강좌명도 모르는 수업을 듣는다. 오직 자신과 말들뿐인 목장 생활이 외로워서였을까? 아무튼 이 강의에서 그녀는 강사인 엘리자베스(크리스틴 슈트어트 분)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에게 관심인지 호감인지 모를 감정을 보이기 시작한다.
 
수업이 끝나고 식당을 찾는 엘리자베스를 안내하며 여자(이 영화의 제목이 <어떤 여자들>이며 캐릭터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부득이하게 '여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양해를 구하고 싶다)는 그녀와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돈이 급했던 나머지 엘리자베스가 4시간 거리인지도 모른 채 덥석 강사직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불안한 미래 때문에 초조해 하고 있다는 사연도 알게 된다.

그런 엘리자베스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자는 어느 날 강의에 목장에서 자신이 돌보는 말을 타고 간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그 말에 태워서 식당에 데려다준다. 오랜만에 말을 타고 들뜬 감정을 보이는 엘리자베스. 보통의 영화라면 이후에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발전하는 장면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수업을 찾은 여자는 알게 된다. 결국 엘리자베스가 강사직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영화 <어떤 여자들>

영화 <어떤 여자들> 속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릴리 글래드스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의 실패와 좌절
 
실망감에 수업을 듣지도 않고 강의실을 나온 여자는 다소 황당한 선택을 한다. 4시간에 걸쳐 엘리자베스가 사는 도시로 운전해 가는 것. 엘리자베스가 강의를 위해 오고 간 그 길을 달려가는 것. 그리고 겨우겨우 여자는 엘리자베스의 직장을 수소문해 찾아가고 결국 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여자를 발견한 엘리자베스는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와 대화가 흘러간다. 그리고 대화의 끝 무렵 '도대체 왜 그 먼 거리를 달려 여기까지 왔느냐'는 표정의 엘리자베스에게 여자는 말한다.
 
"운전하지 않는다면 다시 못 만날 걸 알았거든요."
 
그리고 여자는 딱 그만큼만 성취한다. 엘리자베스는 건물 안에서 차를 타고 돌아가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흔히 말하는 '영화와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첫 에피소드에 등장한 윌리어에게도 마찬가지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그는 한 밤 중에 총을 들고 인질극을 벌인다. 윌리어를 진정시키기 위해 경찰의 권유로 투입된 로라는 그에게 가장 현실적인 조언, 정신질환을 이유로 최대한 유리한 판결을 받아줄 테니 자수를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윌리어는 로라에게 정문으로 나가 등 뒤에 총이 겨눠줘 있는 척 연기를 하라고 자신은 그 동안 뒷문으로 도망을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말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윌리어는 도주에 성공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지 못한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는다. 내가 영화에서 본 가장 초라하고 하찮은 인질극이었다.
 
이 인물들이 영화가 되려다 만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윌리어에게도 목장의 여자에게도 확실히 사연과 동기는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일탈을 감행한다. 인질극을 저지르고 가본적도 없는 도시를 향해 차를 타고 달린다. 하지만 그 끝은 당연할 정도로 초라하다. 작은 도시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던 나이든 남자가 탈출에 성공해 새로운 인생을 살 리도 엘리자베스가 겨우 대화 몇 번 나누어본 여자가 자신을 찾아온다고 반가워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지는 좌절된다. 보상은 없다. 인정도 없다. 윌리어는 그저 인질극을 벌인 괴상한 남자로 회자되다 소리 소문 없이 묻힐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불쑥 찾아온 여자를 이상하게 여기다가 결국 잊을 것이다.
 
 영화 <어떤 여자들>

영화 <어떤 여자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던 영화, <어떤 여자들>
 
영화 <어떤 여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때로는 너무 냉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줄곧 전경으로 비치는 황량하고 넓은 배경 속에서 이들은 그저 존재하고 방황하듯 움직인다. 사실 윌리어는 정말 호감이라곤 조금도 생기지 않는 캐릭터였다.(어쩌면 이 영화가 그런 캐릭터를 전면에 배치한 것도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이 대사에 만큼은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후반부 자신의 편지에 왜 답장을 하지 않았냐는 윌리어의 말에 로라는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몰랐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이야기한다.
 
"아무 얘기나 해도 돼요, 날씨 얘기 그날 있었던 일, 그리고 봉투에 넣어서 우편으로 보내면 되죠, 진지한 두꺼운 편지일 필요 없어요."
 
그저 아무 말이든 응답을 받고 싶은 인생, 내 삶을 바라보는 반대편의 누군가를 갈망하는 인생, 설령 사소한 아무 말이 돌아온다 해도 여기에 삶이 존재함을 인정받는 싶은 인생.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안 될 거 같으니까 고독한 인생, 정처 없이 점처럼 떠도는 인생. 정말이지 공감을 하나도 나누고 싶지 않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런 삶이 특별히 비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인생은 평범하다. 홀로 살든 함께 살든 정도만 다를 뿐 우리는 그런 고독을 느낄 때가 있지 않는가. 나의 곁에 누구도 나를 바라보는 이 없는 순간, 사람들 속에서도 철저히 내가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시간,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돌려보다 아무 이유 없이 편히 전화를 걸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되는 때.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나는 철저히 혼자라는 걸 절감하는 그런 시간.
 
<어떤 여자들>에서 윌리어는 결국 감옥에 가며 알버트의 마당에 있는 사암들은 벽돌이 된다. 평범한 삶은 그렇게 흐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목장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특별히 그 누구도 아닌 여자는 축사를 정리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흔들림 없이 오래 비춘다. 카메라와 일을 하는 여자의 사이에 오직 시간만이 흐르는 때, 관객이 없는 삶에 우리는 관객으로 초대받는다.

나는 생각했다. 이 영화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 인생도 계속해서 흘러가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인물들의 사연을 영화에 걸맞게 볼만한 것으로 만들지 않음으로서 <어떤 여인들>은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면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등장인물들에게 이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외롭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삶을 바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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