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배우 조우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배우 조우진이 20일 오후 서울 퐐판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배우 조우진은 경제위기 상황을 외면하는 재정국 차관 역을 맡았다. ⓒ 이정민

  
배우 조우진의 연기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단순히 다양한 역할을 맡아서가 아니다. 영화 <내부자들>, 최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대중에게 각인돼 있지만 그는 선과 악의 이분법 사이사이에 온도 차를 달리하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그런 점에서 곧 개봉할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그의 안타고니스트(악역) 이력에 또다른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그린 해당 작품에서 그는 시종일관 위기설을 부인하는 재정국 차관 역을 맡았다. 단순히 주인공을 방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새 판을 구상하면서 상당히 세련되게 상대를 좌절시키는 인물. 

악역의 구축 

밉고 또 밉다. 그의 모습을 영화에서 보게 된다면 십중팔구 우리 사회 지도자 층의 단면을 발견할 것이다. 국민들에겐 허리띠를 졸라매고 금을 모아오라며 감동으로 포장한 희생을 강요하면서 은연중에 기득권층을 위한 새판을 짜는 캐릭터다. 영화에선 미국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엘리트로 소개되는 인물을 조우진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차관을 분노유발자로 봐주시면 제 입장에선 연기를 못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그간 검사, 공무원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캐릭터를 제 경력에 비해 꽤 했었다. 그때 취재하면서 모아놓은 자료가 있었는데 당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이번 캐릭터에 불어넣고자 했다. (<내부자들>에선 무슨 명령이든 회사원의 마음으로 수행해버리는 캐릭터였다면) 차관은 판을 정확히 알고 있는 권력자라고 생각했다. 말투는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검사님 말투를 따왔다. 자연스럽게 들려야 하니 제 입에 맞게 연습했다. 

경제 공부를 많이 한 엘리트였는데 본인 능력이 어찌 발휘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외국 생활을 하며 외로운 학창 시절을 겪었고, 보상심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엘리트라는 우월감을 가진 학생이었기에 욕망을 크게 가졌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그런 코스를 밟는 사람은 소수였을 테니까. 본인 이익을 위해 정부 일을 시작했고, 나아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가에 이바지한다는 핑계로 상류층에 편승하려 했겠지."

 

'국가부도의 날' 배우 조우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배우 조우진이 20일 오후 서울 퐐판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차관은 판을 정확히 알고 있는 권력자라고 생각했다. 말투는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검사님 말투를 따왔다. 자연스럽게 드려야 하니 제 입에 맞게 연습했다." ⓒ 이정민

 
권력욕의 정점에 서 있는 캐릭터. 조우진은 "대부분 그런 욕망이 있을 것"이라며 "때론 그걸 못 가지면 권력을 가진 사람을 욕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권력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름의 통찰을 전했다. 

이런 캐릭터 해석력과 더불어 조우진은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애드리브 또한 적절하게 넣으려 했다. "최국희 감독님 역시 대본은 일종의 가이드라고 하셨다"며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얘기하라고 하셔서 마치 선물을 준비하듯 현장에서 한번 보시겠어요? 제안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시대를 관통하다

극 중 악역이지만 조우진 역시 <국가부도의 날>의 존재 이유와 그 의의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직접 겪었던 시대였기에 감정이입이 됐던 게 사실"이라며 그는 "영화 속에서 그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이 보였다. 배우들의 호흡과 행동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1997년 당시 조우진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직후였다.

"그땐 너와 나만 힘든 게 아닌 모든 사람이 힘든 시기였잖나. 결국 우린 돈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걸 절감했던 것 같다. 대체 돈이 뭐기에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 힘든 것인가. 아버지의 고개가 더 자주 숙여지는 모습을 봤고, 엄마의 한숨 소리가 늘어났으며 친구들이 더욱 술을 자주 마셨다. 시내로 나가면 거리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길거리엔 벼룩시장이나 교차로에 구인 광고가 넘쳐났다. 

또 인연이 끊어지는 사람들도 많았고, 뉴스에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이야기로 넘쳤다. 어두운 시대였던 것 같다. 그때 전 감성이 가장 예민했던 시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앞으로 돈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니 먼저 경험해보자는 생각으로 여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제 삶의 꿈과 목표를 심각하게 점검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체감했다. 

단 한 번 사는 삶인데 무엇을 쫓으며 살 것인가 생각했다. 취직하기 직전 단계였는데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연기자의 삶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연기를 전공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IMF 사태 자체가 연기를 하게 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꿈을 실천에 옮기게 하는 여러 계기 중 하나였다."

 

'국가부도의 날' 배우 조우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배우 조우진이 20일 오후 서울 퐐판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IMF 당시 인연이 끊어지는 사람들도 많았고, 뉴스에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이야기로 넘쳤다. 어두운 시대였던 것 같다." ⓒ 이정민

 
20여 년 전 이야기에 그 역시 상념이 깊어지는 듯 보였다. 경제 위기 때 남들은 더욱 돈을 쫒기도 했고, 또 다른 길을 택하곤 했지만 조우진은 꿈을 좇기로 했다. 그렇게 한걸음씩 걸어 지금에 이르렀다. 조우진은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좋다고 고백했다. 

"세트장에 들어갈 때 드는 어떤 느낌이 있는데 <국가부도의 날> 현장은 정말 잘 짜인 무대에 선 느낌이었다. 스태프들도 딱 준비된 느낌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연기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데 정말 허투루 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껴졌다. 김혜수 선배, 뱅상 카셀 등 여러 훌륭한 배우들 속에 제가 있다는 게 영광이었다. 어쨌든 제 사명은 차관 역할이니 권력의 그릇된 선택을 보여줘야 했고, 김혜수 선배를 들끓게 만들어야 했다. 사족이 없는 연기와 대사를 던지려 노력했던 것 같다."

시대극의 묘미

<창궐> < 1987 > 등 사극과 시대극을 경험한 조우진에게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진짜 권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검사, 청와대 관료 등을 두루 거친 그였기에 반 농담으로 던진 물음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그는 "최근 입증되지 않았나. 국민이라고 생각한다"는 현답을 내놓았다. 

"영화의 여러 미덕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시대를 간접 경험하게 하는 게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아팠던 역사든 흥했던 역사든 그걸 다루면서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자체가 미덕이지 않을까. 이런 영화에 참여하면서 제 커리어나 인생도 좋은 의미로 채워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작품에 연기자로 참여하는 건 분량에 상관없이 제 삶을 통틀어 의미 있는 작업이다.

<국가부도의 날>을 보시는 분들은 아마도 서민 캐릭터인 갑수(허준호)에 공감하실 것이다. 개인적으론 한시현(김혜수), 갑수, 차관까지도 모두 영화 안에서 나름 변화를 겪는다. 영화를 보시고 다양한 사람들과 얘기해보시길 권한다. 얘깃거리가 많아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가족끼리 모였을 때도 IMF 때 부모님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뭘 했는지 서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근현대사를 두고 구성원들 사이에 끈끈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가부도의 날' 배우 조우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배우 조우진이 20일 오후 서울 퐐판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영화에 참여하면서 제 커리어나 인생도 좋은 의미로 채워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작품에 연기자로 참여하는 건 분량에 상관없이 제 삶을 통틀어 의미 있는 작업이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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