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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인사이드'는 청와대·통일부·외교부·국방부·총리실 등을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이 쓰는 '정보'가 있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고, 평양선언은 대통령 비준 절차를 거쳤다. 이렇게 남북 합의서를 비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남북합의서를 정권의 입맛대로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북한과 합의한 6.15공동선언, 10.4선언은 국회 비준동의를 받지 않았다. 결국 두 역사적 선언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현재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판문점선언의 비준동의를 두고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9월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먼저 비준했다. 이를 두고 자유한국당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그렇다면 27년 전, 남북기본합의서는 어떻게 처리됐을까?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민주자유당)이 당시 여당이던 시절의 일이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 분단 이후 처음으로 공식 국가명칭 표기
 
<동아일보>의 1991년 12월 13일 1면
▲ 동아일보  <동아일보>의 1991년 12월 13일 1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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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의 어느 가을날, 서울에서 시작된 만남이 10월 평양으로 이어졌다. 그해 겨울, 다시 서울에서 남북이 마주했다. 이듬해 10월 평양을 거쳐 12월 다시 서울. 

1991년 12월 13일 오전 10시 20분. 남북은 서울 성동구 워커힐 컨벤션센터에서 본문 25조로 된 남북기본합의서(남북관계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서명자는 남측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측 연형묵 정무원 총리였다.

남북은 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시작된 지 15개월 만에 남북관계를 처음으로 정상화하는 공식문건에 서명한 것이다.  

이날 남북은 다음해 2월 18일부터 21일까지 평양에서 제6차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이때 남북이 서명한 합의서를 정식교환하면, 교환된 날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절차 형식의 문제였을 뿐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과 북이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국가명칭을 합의문서에 표기한 합의서다. 당시 언론은 '남북이 화해하고 교류협력의 새 시대로 진입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민자당이 국회 비준동의 아닌 지지결의안으로 처리하려 한 이유
 
<한겨레>의 1991년 12월 17일 보도
▲ 한겨레 <한겨레>의 1991년 12월 17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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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국회에 지지결의를 요청했다. 1991년 12월 17일 치 <동아일보>에 따르면, 여당인 민자당(민주자유당)은 정기국회 회기 내에 본회의에서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지지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은 왜 남북기본합의서를 '국회 비준'이 아닌 '지지 결의안'으로 처리하려고 했을까? 민자당이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민자당은 합의서 전문에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라고 명기된 대목을 들어 남북은 특수관계를 규정하는 잠정협정의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1991년 12월 13일, <동아일보>

정부의 설명도 민자당과 비슷했다. 당시 <한겨레>는 "정부는 합의서가 비준동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로 합의서를 채택한 남북한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야당인 민주당은 생각이 달랐다. 민주당은 1월에 임시국회를 소집해 정식으로 비준동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맞섰다. 

남북합의서가 ▲국민의 생명 재산뿐 아니라 국가 안위에 관한 문제를 규율하게 되고 ▲합의서 서명자가 양쪽 총리라는 점에서 '사실상의 국가 승인'을 의미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헌법 제60조에 따른 국회의 비준동의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설명한 이는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여야는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대립했다. 국회는 개원하지 못했고, 남북기본합의서도 국회 비준동의를 받지 못했다. 지지결의안조차 처리되지 못했다.  

발표된 남북합의서 161건 가운데 13건만 국회 비준동의  
 
남북합의서 국회 비준 현황
▲ 남북합의서 국회 비준 현황 남북합의서 국회 비준 현황
ⓒ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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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합의서가 국회의 문턱을 넘은 건 2003년이 처음이다. 당시 국회는 2000년에 합의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6·15공동선언의 발전적 계승을 위한 결의안'을 여야 합의로 채택했다. 이후 2006년에 남북관계법이 제정됐다. 

4월 통일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최근까지 남북이 체결한 합의서(평양선언·남북군사합의서 제외)는 정치 69건, 군사 12건, 경제 109건, 인도적 지원 33건, 사회문화 22건 등 총 245건에 이른다. 이는 발효가 필요없는 공동보도문과, 남북관계발전법에 따라 서명만으로 발효되는 합의서를 모두 포함한 수치다.

이중 절반을 훌쩍 넘은 161건의 합의서가 발효됐다. 하지만 국회 비준동의까지 거쳐 발효된 경우는 13건으로 전체의 5%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이는 모두 노무현 정부 때 이뤄진 일이다.

남북관계의 경우, 헌법에 명시돼 있는 것과 남북기본합의서·남북관계발전법에 명시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헌법은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지만,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관계발전법은 남북을 특수관계로 인정한다. 이렇게 차이가 날 만큼 남북관계는 '특수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마지막날이었던 9월 20일 백두산 부근 삼지연초대소에서 산책하며 대화하고 있다.
▲ 삼지연 산책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마지막날이었던 9월 20일 백두산 부근 삼지연초대소에서 산책하며 대화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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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국회 비준동의 안되고, 지금은 국회 비준동의 필요하다?

남북이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이후로 27년이 흘렀다. 여당과 야당도 뒤바뀌었다. 하지만 판문점선언와 평양선언의 비준(국회 비준동의든 대통령 비준이든)을 두고 여야가 맞서는 상황은 여전하다. 

27년 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은 북측이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남북기본합의서를 비준동의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후신인 자유한국당은 지금 평양선언의 국회 비준동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에는 반대하고, 문 대통령이 평양선언을 비준하자 독단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뒤죽박죽이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있자면 '자유한국당은 지금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저절로 떠오른다.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를 반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반면 평양선언의 국회 비준동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헤아리면 이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처럼 비친다.

이러한 뒤죽박죽 속에서 남은 것은 정략과 정쟁뿐이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그렇게 정략과 정쟁으로 다뤄야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태그:#남북기본합의서, #자유한국당, #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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