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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4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은 주홍글씨가 있다. 그 주홍글씨의 이름은 다름 아닌 '종북'과 '내란'이었다. 권력과 언론이 붙인 그 주홍글씨는 곧장 괴물로 둔갑해 원내 의석을 보유한 진보정당을 집어삼키기에 이르렀다. 바로 지난 2014년 12월 19일의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사건 말이다.

세계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상 초유의 사태였고 그 법률적 정당성 역시 수많은 하자를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인사들은 드물었다.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칼럼이나 기명 기사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나는 통합진보당의 노선에 동의하지는 않지만"이라는 토를 단 뒤에야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하곤 했다. 공포에 질린 비겁한 모습이었다.

이처럼 박근혜 정권 2년 차였던 2014년은 그해 봄 세월호 참사에서 시작해 연말의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으로 끝났고, 남은 것은 두려움을 조장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 질식한 민주주의와 깊은 암흑이었다.

이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이른바 '김영한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판결과 관련해 청와대가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박근혜 청와대와 기무사에서 획책한 '진짜 내란음모'인 '계엄령 음모'가 탄로 나고,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가 자행한 '사법농단'의 과정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지위 확인 소송 재판에 개입한 정황 역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2014년의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사건이 당시 권력층의 일방적 정치탄압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잇달아 드러나고 있지만, 유독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침묵이 지속되고 있다.

지금도 이석기 전 의원은 한국 현대사 속 내란사건 혐의자 중 최장기수로 복역 중이다. 당시 이 사건을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이 짜놓은 프레임대로 보도했던 주류 언론 매체의 반성 역시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진정 이것이 '촛불혁명'을 거친 우리 시대의 정치적·사상적·문화적 민주주의의 수준이라면, 너무도 서글프지 않은가?

공포와 침묵을 깨는 용기의 부재, 과거의 오보에 대한 반성과 책임의 부재, 여전히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자기검열 기재들은 우리 안에 잠재된 '민주주의의 리스크'라 할 만하다. 한국 현대사가 수차례 민중혁명을 거쳤지만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반동이 되풀이된 것도, 이처럼 우리 자신이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거나 체화하지 못한 점에서 기인한 바 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카로스의 감옥 :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진실>(문영심, 2016)은 무척 소중한 책이다. 공교롭게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2016년 10월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는 통합진보당이 덮어쓴 주홍글씨와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방관과 묵인, 공격성을 정면으로 대면케 한다.

특히 저자는 책 안에서 가급적 1차 자료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 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서술 기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도록 배려하는 장치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이 책과 관련해 중시해야 할 점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 왜냐면 원고를 완성한 뒤에도 1년 가까이 출판사를 구하지 못했다는 저자의 고백(13쪽)은 이 책의 완성과 출간 자체가 매우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용기 있는 행동이었음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석기 전 의원과 이 사건의 피고인들은 법정에 서기도 전에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으로 짓밟혔다. 온 세상이 다 덤벼들어 그들을 때리고 물어뜯었다. 그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차고 넘친다. 객관적인 거리 두기를 하거나 형평성을 살리라는 충고를 따르기에는 그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과 매도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을 토대로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대한민국 언론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국정원과 공안검찰, 그리고 사법부가 굉장히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의 기본권이 잘 지켜지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쭉 그렇게 믿고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나라가 분명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12쪽). 

저자의 말처럼, '기계적인 균형' 혹은 '중립적 태도'만으로는 이 사건의 진실에 결코 다가갈 수 없다. 최근 사법농단 사태를 대하는 사법부의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우리 사회의 '비정상성'은 여전할뿐더러 특히 그러한 비정상성이 고도로 응축, 발현된 시기가 이명박-박근혜 적폐정권 10년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민주 개혁적 인사들조차 이 사건에 대해 당시부터 기계적 균형 또는 중립을 유지하려는 태도만을 견지함으로써 사안의 진실과 본질을 포착하고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사태를 막아내는 데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실을 토대로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라는 저자의 고백은, 이 사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부터 달려져야 한다는 촉구로 읽힌다. '침묵'과 '기계적 균형'만으로 억울한 주홍글씨를 지워낼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일뿐더러, '대화'와 '다양한 편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활기와 지속성을 담보하는 첩경일 것이기에 말이다.

저자는 각종 자료와 사실에 근거해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이 박근혜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밝혀나가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이 사건 조작의 직접적 주체였지만, 이러한 조작이 가능했던 공간은 주류 언론의 "취재하지 않고, 검증하지 않는"(165쪽) 태도에 의해 조성되고 있었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국정원은 국회에 제출한 체포동의요구서에 이석기와 RO가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내용을 넣었고,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신문과 방송은 국정원이 넘겨주는 정보를 충실하게 받아썼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행여 국회의원들이 동료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거나 국민들이 '내란음모'라는 혐의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까봐 한국사회의 아킬레스건인 '레드 콤플렉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국정원의 노림수는 제대로 먹혔다. … 그러나 위의 (언론) 기사에 나온 사실들은 재판과정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검찰의 공소장에도 위의 기사 내용에서 '사실'이라고 주장한 사실들은 찾아볼 수 없다. 국정원과 검찰은 그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지도 못했고 주장하지도 않았다(164쪽).

한편, 저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 관련 구속자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 별도의 장(章)을 두어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사례담에 따르면, 최초 압수수색 당시 국정원 수사관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심지어 문을 때려 부수며 집안에 들이닥쳤다고 한다.

이후 국정원 수사관들은 안방에서 잠자고 있던 팬티 바람의 남편을 거실로 끌고 나와 강제로 꿇어앉히고 온 집안을 뒤지며 압수수색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자녀들의 컴퓨터까지 훑어갔다고 한다. 이런 짓은 모두 불법이었지만, 며칠 뒤 집안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던 심근경색 응급약 관련 건강정보는 <동아일보>에 '사제폭탄 매뉴얼'로 둔갑해 보도되고 있었다(334∼337쪽).

그리고 또 다른 구속자 가족의 경우 누군가 차량에 유성페인트로 "간첩 차"라는 낙서를 한 뒤 달아난 일을 겪었다고 한다(340∼342쪽). 구속자 가족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낯선 사람의 그림자만 보고도 깜짝깜짝 놀라고,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구속자 가족의 경우 정보과 형사가 직장으로 자꾸만 전화해 아직도 출근하느냐고 물어보는 바람에 사장이 겁을 내 스스로 직장을 그만둔 사례도(338쪽) 있었다.

이처럼 박근혜 정권 시기 국가기관들은 감시, 미행, 사찰, 불법 압수수색과 같은 수단을 통해 구속자 가족들의 생계까지 위협했던 것이다. 실상 연좌제와 다를 바 없는 셈이었다. 이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상당수 구속자 가족들이 증언을 거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은 왜 이토록 진보진영, 그중에서도 특히 통합진보당을 박멸하려 들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향후 우리 사회가 그 진상을 규명해야할 중요한 과제일 것이고, 이 책에서도 이에 대한 명시적인 서술은 없다.

다만 저자는 2012년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심하게 몰아붙인 일에 대해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고(132쪽) 쓰고 있다. 실제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일이 정확히 박근혜 당선 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는 점도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과 함께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석기 전 의원의 정치적 노선 역시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1~3장에 따르면, 당시 진보진영 내에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전 의원 계열은 이른바 '야권연대'에 가장 적극적인 세력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 점 역시 진보세력 가운데 유독 이들을 겨냥한 탄압이 집중된 요인이 아니었을까?

만일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사건은 단순히 '박근혜 개인의 분풀이' 차원을 넘어서는, 보수 세력의 '정치 공작'으로 볼 소지도 생겨난다. 여하간 이 같은 의혹은 향후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핵심적 과제로서 활발한 조사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덮으며 함세웅 신부님의 추천사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무겁게 와 닿는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오늘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들에게 돌을 던진 가해자라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쳐야 하는 사건입니다(15쪽).

민주주의로 가는 우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카로스의 감옥 -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진실

문영심 지음, 도서출판 말(2016)


태그:#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이석기, #민주주의, #박근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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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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