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베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베놈>의 한 장면

영화 <베놈>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코리아


'직필'(直筆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음)은 늘 위태롭다. '동호직필(董狐直筆, 권력 앞에 아부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원칙에 따라 소신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수행한다)'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려 보자. 과거 조선의 역사에서 직필로 간언했던 선비들은 붓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직필의 역사는 오늘날 기자 정신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언론 역사는 곧 정의로운 직필로 인해 거리로 내몰려야 했던 고달픈 저항의 역사였으며, 이는 다른 국가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사우디 정책과 왕실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의 날을 세웠던 언론인 자말 카슈크지는 '아랍 세계에 필요한 건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호소를 담은 칼럼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뉴욕타임스> 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사우디 왕실이 보낸 암살조에 의해 고문 후 살해당하며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지난 9월경 불가리아에서 부패 사건을 보도한 언론인이 살해된 채 발견됐다는 기사가 최근 나왔으며, 슬로바키아 기자 살해사건 등 올해 발생한 유사한 사례는 더 있다. 2018년에도 직필을 향한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펜으로 만들어낸 힘은 강고하지만, 그 펜을 쥔 인간은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이 마블의 상상력을 통해 히어로 이야기로 승화된다. 

<베놈> 속 '정의로운 기자' 에디 브룩
 
 영화 <베놈> 스틸컷

영화 <베놈>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코리아


영화 <베놈>은 인간을 거침 없이 먹어치우며 지구를 넘보던 외계 생명체가 빌런 히어로로 거듭나는 걸 홍보의 초점으로 삼는다. 극 중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 중 하나인 베놈이 인간 숙주 에디 브룩(톰 하디 분)과 결합하여 활약하는데, 선한 인간의 정체성과 결합하며 선과 악의 경계선이 흐릿해진다. 영화는 여기서 선의 주체로 프리랜서 기자인 에디 브룩을 내세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사실 에디 브룩에게는 '전과(?)'가 있다. 1986년, 1988년 <베놈> 원작 코믹스에 등장한 에디 브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열혈 기자였다. 다만 문제가 좀 있다. 영화 <베놈> 속 에디 브룩의 문제는 보도해야 할 기사라고 여겨지는 사건을 두고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코믹스 시절 에디 브룩도 마찬가지다. 에디 브룩이 잠시 일했던 <데일리 글로브>는 바로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주인공 피터 파커가 일하던 그 언론사다. 에디 브룩은 <데일리 글로브>지에서 범죄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썼는데, 그만 그 과정에서 취재 대상으로 잘못된 인물을 선정하여 퇴사하게 된다. 

지난 2007년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3>에서 언론사로부터 퇴사한 에디 브룩은 자신이 실패가 피터 파커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에게 앙심을 품는다. 그리고 피터 파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심비오트를 받아들여 '베놈'이 되고, 이후 에디 브룩은 빌런의 캐릭터에 충실한다. 
  
 영화 <베놈>의 한 장면.

영화 <베놈>의 한 장면. ⓒ 소니픽쳐스코리아


하지만, <베놈>은 <스파이더 맨>에서 지질하게 나온 기자 에디 브룩을 정의의 사도로 리뉴얼한다. <베놈>에서도 역시나 에디 브룩은 <데일리 글로브>에서 쫓겨난 걸로 설정되지만, <스파이더 맨>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베놈>에서 에디 브룩은 부패를 폭로하려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보도 태도로 인해 퇴사하게 된다.

에디 브룩은 '정의로운 성향' 때문에, 그의 기사를 다뤄주는 언론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법 생체 실험 혐의가 있는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에 대한 의문을 쉬이 접지 못한다. 그러다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변호사로 고용된 연인 앤 웨잉(미쉘 윌리암스 분)의 노트북에서 석연치 않은 자료를 발견한다. 기자 정신에 입각하여 보도하지만 그와 연인의 실직, 그리고 둘의 이별로 에디 브룩의 보도 시도는 마감된다.

<스파이더 맨3>에서 취재 대상을 잘못 선정한 것에 이어, <베놈>의 에디 브룩은 연인의 노트북 속 자료를 이용해 취재하다가 보도에 실패하고 직업을 잃는다. 에디 브룩의 취재 방식에 관해서는 도덕적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스파이더 맨3>에 비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도의 캐릭터적 설정 완화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 무얼 하나, 바위에 부딪친 달걀처럼 에디는 무참히 깨진다.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압박으로 직업을 잃은 에디 브룩은 이후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기사를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여전히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 그러던 차, 라이프 파운데이션이 노숙자들을 상대로 마구잡이 생체 실험을 해 생명을 앗아가는 걸 목격하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도라 스커스(제니 슬레이트 분) 박사가 에디를 찾아온다. 이젠 더 이상 정의를 좇아 보도하려 들지 않겠다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에디는 스커스 박사와 함께 라이프 파운데이션 실험실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디 브룩은 외계에서 온 심비오트의 숙주가 되고 만다. 

기자의 정의가 실현되는 길은 '강력한 외계 생명체'의 숙주?

대부분의 숙주가 심비오트에게 장기를 먹히고 버려지는 것과 달리, 에디의 몸에 기생한 심비오트 '베놈'은 숙주가 된 에디에 매우 만족한다. 살아있는 것들을 마구 먹어치우려고 하는 외계 생명체 베놈은 에디와 합체하며 변화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다. 무난한 재미의 히어로물로 찾아온 <베놈>에 안타까운 지점이 있다면, 바로 심비오트 베놈이 에디를 숙주로 삼아 선과 악의 경계에 서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영화 <베놈> 장면

영화 <베놈>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코리아


물론 영화는 전반부에 정의로운 기자 에디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거기에 더해 '버디 무비'처럼 정의로운 에디와 막강 빌런 외계 심비오트의 결합을 티격태격 액션신으로 표현해 냈다. 하지만 에디의 몸을 숙주로 삼은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가 자신의 동료인 다른 심비오트들을 배신하고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로 변심하기까지의 세계관의 변화가 다소 극적이고 어쩐지 행간이 넓다. 그저 베놈이 초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바라본 지구 별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장면으로 퉁치기엔 말이다. 

물론 심비오트가 숙주로부터 영향을 받는 생명체이고, 에디 브룩의 거침없는 정의감이 외계 생명체인 심비오트마저 변화시킨 동력이 될 것이라는 설명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펜으로 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에디가 좌절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에디의 기자 정신은 부적절한 입수 경로가 들통나면 이별하게 될지도 모르는 데도 연인의 노트북 속 자료를 포기하지 못하고, 직업을 잃고도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다시 라이프 파운데이션 실험실에 잠입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영화 <베놈> 스틸컷

영화 <베놈>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코리아


그러나 <베놈>에서 에디 브룩이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문제를 밝혀내고 악에 맞서는 건, 강력한 힘을 가진 심비오트와 결합한 이후에야 가능했다. 이와 같은 영화의 줄거리는 결국 '히어로적' 방식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아이러니함을 담은 셈이다. 어쩌면 거대한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악행을 파헤치는 일은 에디 브룩이라는 기자 한 명의 펜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지구촌 어딘가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쓴 기자가 살해당하고 있는 현실처럼. 그래서 빌런이자 히어로인 베놈의 활약은 통쾌했지만, 대리만족 이후의 뒷맛은 어쩐지 씁쓸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베놈 언론인살해 기자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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