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울증을 세게 앓았다는 지인이 있다. 많이 아팠으나 이제는 그래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그녀. 그녀가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왔음에 감사하다. 그녀와 마주 앉아 웃고 울 수 있음에 감사하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픔을 겪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공감의 폭은 넓고 또 깊다. 우리 관계가 돈독해 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녀의 인간됨 덕분이다. 그런 그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비관적 선택만큼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어떤 고통도 언젠간 지나간다는 것만 알면 버틸 수 있을 텐데'라고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는 결코 남이 되어볼 수 없다는 것. 그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같은 아픔을 겪었다고 해도.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조(호아킨 피닉스)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폭력과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자살 충동은 마치 피와 살처럼, 늘 그와 함께 한다. 폭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조. 거물들이 요청하는 위험하고 은밀한 일들을 해결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매춘 조직에 끌려간 상원의원의 어린 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찾는 임무를 맡는다.

조와 니나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가히 지옥이다. 영화 초반, 택시 기사가 찬송가를 부르고 있을 때 영화 제목이 화면에 등장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You Were Never Really Here)." '너(you)'가 '신'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니나를 찾는데 성공하지만 일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일을 맡겼던 그녀의 아버지는 자살하고, 괴한들이 조를 습격해 다시 니나를 데려간다. 심지어 조의 어머니마저 이들에 의해 살해 당한다. 조에게 어머니는 폭력에 함께 쓰러져야 했던, 서로를 구하고 싶었으나 구할 수 없던 동지이자, 그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다. 그런 존재가 없어진 것이다.

조는 어머니의 시신을 수장하며 자살을 시도한다. 늘 자살충동에 시달려온 그에게, 어쩌면 이 순간은 드디어 맞이한 평화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순간, 조의 머릿속에 니나가 떠오른다. 조에게 니나는 곧 어머니로 치환됐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로부터 구해줄 수 없었던, 그리고 끝내는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어머니. 그는 살기로 마음 먹는다, 일단은. 

영화를 보다 떠오른, 30년 전 어머니의 화난 얼굴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조연도 없고, 조의 과거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단 몇 줄로 끝날 간단한 요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다. 영화가 조의 내면으로 침잠했듯, 나는 내 안으로 침잠해야 했다. 

30여 년 전, 나의 유년 시절엔 '사랑의 매'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곤 했다. 그때도 체벌하지 않는 가정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도 흔했다. 내 또래 지인들의 다수가 체벌의 기억을 갖고 있다. 나 역시 흔한 정도의 체벌을 받았고, 아주 가끔, 어머니는 선을 넘었다. 

화가 난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드문 일이었으나,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체벌이 있었다. 어떤 날은 마당에서 혼쭐이 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했기 때문에 당시 내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일곱 살이었다. 최근, 딱 그 나이인 친구의 아이를 보고는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때리기에 적당한 나이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작아서. 너무 어려서. 

몇 번쯤 이 기억을 내 입으로 말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예전에는 다 그렇게 살았다고, 다들 잊고 사는 유년기의 일을 상처라고 말하는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어른에게도 하지 못할 일을 어떻게 일곱살짜리 아이에게 할 수 있냐고, 내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내 이야기 같지 않았다. 상처 받았다는 이유로 잘못됐다는 말을 듣는 것은 부당했고, 어머니가 한 순간에 이해 못할 사람으로 몰리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엔 잔인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받지 못한 내 이야기는 갈 곳을 잃었다. 
 
각자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만든 <너는 여기에 없었다>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조가 겪어야 했던 유년기의 폭력은 체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흉터로 가득한 그의 몸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에도 이 영화의 미덕이 있다. 끔찍한 폭력을 그려내는 영화지만 폭력을 단순한 볼거리로 가볍게 소비하지는 않는다. 최대한 절제된 영상은 반가웠다. 폭력을 고발하는 폭력적 영화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말하는 영화이므로, 이 영화를 통해 내 유년기를 떠올리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일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으므로, 행복했던 유년 시절 전체를 어두운 색깔로 물들일 생각은 없다. 다만, 조의 아픔이 침묵하고 있던 나의 아픔을 가만히 깨웠다.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결국 조는 니나를 구한다. 그녀를 구했으니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는 않다. 늘 그래왔듯 조는 자살을 꿈꾼다. 그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Wake up, Joe."

니나가 그를 깨우고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이들에게 구원이 있을까. 조는 어머니에게 그랬듯, 최선을 다해 니나를 보살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시시각각 괴롭히는 트라우마와 자살충동이 사라질까. 끔찍한 지옥에서 건져 올려진 니나가 과연 모든 것을 잊고 살 수 있을까. 슬프지만, 좀처럼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매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각자의 고통은 자신의 몫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경험을 할 수 없고, 설령 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도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고통을 겪어낸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볼 수는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세상엔 빛이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고통으로 인해 한층 더 깊어진 이들이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세상을, 나는 꿈꾼다. 그러니까 구원은 있다. 스스로를 끌어올리기만 한다면. 

칸국제영화제가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배제한 영화는 세련되었고,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두말할 나위 없는 압권이었다. 나를 보듬고, 나아가 상처 받은 모든 이들을 보듬고 싶어지는 영화다. 상영관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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