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라는 말에 맞춰 얼굴 옆에서 손가락을 접었다 피는 로봇 스톤. 손가락을 접을 때 같이 감았다 뜨는 눈이 참 귀엽다. 뮤지컬 <땡큐베리스트로베리> 속 가정 도우미 로봇 스톤은 엠마에게 "땡큐" 동작을 알려준다. 고마울 때는 "고맙다"는 말 대신 "땡큐"를 하면 되고 미안할 때도 "미안해"라는 말 대신 "땡큐" 한 마디면 된다. 정말 정말 고맙거나 미안할 때는 "땡큐베리스트로베리"라고 하면 된다.
 
혼자 사는 할머니 엠마를 찾아온 로봇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한 장면. 엠마(정연)와 스톤(이율)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한 장면. 엠마(정연)와 스톤(이율)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채효원

  
주인공 엠마는 싱글 마을에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인생의 남은 날을 홀로 보내게 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런데 엠마는 유독 혼자 생활했다. 사람들과 마주칠까봐 외출을 절대 하지 않았고 매일 커튼을 꼭꼭 닫은 채 살았다. 그렇게 먼지와 쓰레기가 가득한 집에서 하루 종일 TV만 봤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의 집에 로봇이 배달됐다. 물론 로봇이 엠마의 집에 들어가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기척도 안 하는 엠마 때문에 로봇은 "택배 왔습니다"를 수십 번이나 외쳤다. 다행히 로봇은 겨우 엠마를 만났다. 물론 틱틱거리는 엠마 때문에 애를 먹기는 했지만 귀엽게 그녀를 쫓아다닌 끝에 함께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엠마는 로봇 스톤에게 "저리가"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내심 말동무가 생겨서 좋았던지 스톤이 챙겨주는 식사도 친절도 참견도 반가워했다.
 
귀여운 스톤
 
표현에 서툰 엠마는 밀쳐내도 "땡큐"라는 말을 가르쳐주는 스톤을 보면서 그의 마음에 빠져들었다. 손을 접었다 피는 동작이나 눈을 감았다 뜨는 표정이 귀여운 건 당연했고 툴툴거리는 자신에게 다시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엠마의 건강을 위해 먼지 투성이인 집안을 여기 저기 휘젓고 다니다 잔소리를 듣는 것도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새벽에 밖으로 엠마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까지도 스톤은 따뜻함 그 자체였다. "진짜 사람 같네"라고 말하던 엠마의 말처럼 스톤은 아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엠마의 친구가 됐다.
 
스톤이 꺼내준 엠마의 기억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한 장면. 스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은 엠마가 신나하고 있다.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한 장면. 스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은 엠마가 신나하고 있다. ⓒ 채효원

  
매일 TV만 보던 엠마의 일상이 에너지 넘치는 스톤이 찾아온 뒤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여전히 커튼이 닫혀있기는 했지만 스톤과 서로 커튼을 열었다 닫았다 다투며 잠시나마 햇빛을 봤고, 청소를 한다는 스톤을 따라 오랜만에 올라간 다락방에서는 잊고 지냈던 기억을 마주했다.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기억하는 게 있는 거야."
 
모든 걸 데이터로 기억하는 스톤에게 엠마가 들려준 말이다. 엠마는 스톤처럼 모든 일들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숨은 기억을 찾은 순간 그 때의 감정을 느꼈다. 다락방 계단에는 딸 아이의 키를 기록했던 눈금들이 남아있었다. 젊은 날 신고 다녔던 빨간 구두는 할머니가 된 지금도 신자마자 춤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엠마는 옷장 구석에 있던 구두와 옷처럼 딸과 남편에 대한 기억도 함께 묻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차례로 떠나간 뒤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버리고 감정도 잊고 살았다. 그러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스톤 덕분에 소중한 기억을 다시 마주했다.
 
회색빛 빛나는 무대
 

<땡큐베리스트로베리>의 무대는 온통 회색빛이다. 먼지가 내려앉은 엠마의 방을 표현한 걸까. 집안의 모든 벽과 물건들은 회색이다. 딸이 타던 작은 자전거도 회색, 남편이 치던 피아노도 회색. 스톤이 다시 꺼내준 빨간 구두와 하얀색 숄 말고는 다 어두침침했다. 그런데 이런 무대가 전혀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닫힌 엠마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했고 극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색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나오면 그녀의 감정이 더 잘 와 닿았다.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한 장면. 스톤이 엠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한 장면. 스톤이 엠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 채효원

 
또한 무대는 영상을 자주 사용한다. 로봇인 스톤의 몸 상태는 무대 위에 있는 스크린들로 나타냈다. 충전 상태나 스톤의 데이터를 보여주면서 로봇이라는 설정을 부각시켰다. 스크린 말고도 무대 전체에 영상을 쏘아 표현한 부분도 많았는데 회색빛 무대 위를 빛이 가득 채울 때면 정말 멋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언제 밖을 나가 본 지 기억도 안 나는 엠마가 스톤의 손을 잡고 공원에 도착했을 때 나뭇잎들을 영상으로 보여준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외에도 엠마와 스톤이 함께 춤출 때 반딧불이처럼 무대를 꽉 채우던 불빛들, 엠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톤의 말에 따라 채워지던 그림들도 아름다웠다.
 
따뜻한 극의 분위기에 맞는 넘버들, 그러나
 
극 중에서 스톤은 피아노를 자주 연주한다. 피아노 뚜껑을 열지 말라는 엠마의 불호령에도 꿋꿋하게 친다. 넘버에도 곳곳에 피아노 선율이 함께 나온다. '영화 이야기' '밖으로' '가짜 같은 세상에 진짜' 등 엠마와 스톤이 가까워지는 노래들이 따뜻한 가사와 멜로디로 표현됐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땡큐베리스트로베리>를 보면서 감동을 받고 따뜻함을 느낀 건 여기까지였다. 공연의 절반은 참 따뜻하고 예뻤지만 나머지 반은 혼란이었다. 스톤이 갑자기 정신을 잃은 뒤 그 동안 엠마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실들이 밝혀진다. 아니 사실이라기보다 또 다른 환상일지도. 중반부까지 마냥 귀엽고 명확했던 이야기가 순식간에 모호한 갈래로 나타난다.
 
알고 보니 스톤은 엠마의 죽은 남편의 기억이 심어져 있는 로봇이었다. 생전에 실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남편이 남긴 것이었다. 그래서 엠마의 기억을 쉽게 꺼내고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갑자기 남편의 죽음, 로봇의 정체, 엠마의 과거가 휘몰아치자 혼란스러웠다. 로봇 스톤이 실제 있기는 할까? 로봇은 엠마의 상상인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게 다 환상인가? 엠마는 지금 살아 있는 게 맞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초반에 느꼈던 감동보다는 극을 이해하는 데 온통 신경을 빼앗겼다.
 
귀여운 스톤에게 빠져 엠마의 기억을 찾아가는 데 푹 빠져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스톤을 남편이 보냈다는 말에 이유 모를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엠마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스톤이 사라지는 듯해서 슬펐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감동의 눈물이 나려던 찰나에 눈물은 쏙 들어갔다.
 
작품을 보기 전 이리저리 찾아봤던 후기와 시놉시스에는 '따뜻한 이야기'라는 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놀랐다. 그런데 관람을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 차근차근 정리를 하고 생각을 해보니 좋은 점도 아쉬운 점도 많았던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따뜻함'은 초반부에 아주 가득하다. 세상이 싫어진 외로운 할머니 엠마와 지치지 않고 그녀를 도와주는 스톤은 아직도 생각난다.
 
아쉬운 점은 반전 자체보다는 그 반전을 풀어내는 방식이었다. 딸과 남편의 죽음, 변화는 무서운 거라며 마을을 살피는 '버나드', 스톤의 정체 등 어느 하나 명확한 것 없었다. 이 점은 그날마다 배우들의 연기, 분위기에 따라 이야기 방향이 달라질 수 있어서 매력 포인트가 될 수도 있지만 보는 내내 당혹스러움이 컸던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극 내내 잘 이어가던 따뜻함을 반전이 있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잘 끌고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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