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여가활동이다. 많은 이들이 스포츠를 보거나 직접 즐긴다. 인기 스포츠인 축구가 유럽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축구는 19세기 마지막 25년 간 잉글랜드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인기있는 여가활동이었다. 잉글랜드에 일어난 축구 '붐'은 어마어마했다. 1871년 당시 FA 소속 클럽은 50개였지만 17년 뒤 1000개, 그리고 1905년에는 1만 개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리그 시스템의 정비와 더불어 관중 수도 급증했다. 1872년 FA컵 첫 결승의 관중은 2천 명이었는데, 1897년에는 6만 6천 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1901년 토트넘 훗스퍼와 셰필드 유나이티드 간의 결승전에는 최초로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찾아왔다. 
 
 1871-72 시즌 시작된 FA컵. 지금은 플라이에미레이츠 컵으로 불린다.

1871-72 시즌 시작된 FA컵. 지금은 플라이에미레이츠 컵으로 불린다. ⓒ 잉글랜드 FA 공식 홈페이지

 
이러한 관중몰이의 배경에는 엄청난 인구 증가가 있었다. 1800년 무렵 인구 10만이 넘는 도시는 런던뿐이었지만, 1851년에는 10개를 넘어섰고 1911년에는 36개가 되었다. 1830년에 마을이 형성된 미들스브로의 경우 1851년 인구는 7천 명이었다. 그러나 석탄과 철강 사업의 엄청난 성장으로 1900년에는 인구 10만을 넘었다. 불과 70년 만에 대도시가 된 것이다.
 
 미들즈브로의 팬들. 70년만에 대도시로 폭발적 성장을 한 미들즈브로는 축구 열기 또한 열광적이다.

미들즈브로의 팬들. 70년만에 대도시로 폭발적 성장을 한 미들즈브로는 축구 열기 또한 열광적이다. ⓒ 미들즈브로FC 공식 홈페이지

 
이와 맞물려 '여가'를 누리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산업혁명 초기 매우 힘들었던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여러 측면에서 나아진 것이다. 노동자들은 다수 산업 분야에서 토요일 오후 휴무를 쟁취해냈고, 1860년대부터 노조는 임금 인상을 얻어냈다. 이는 생계비의 하락과 어울려 노동자들에게 여가를 보낼 시간과 돈의 여유를 주었다. 노동자들이 축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축구는 비용도 거의 들지 않았고 단조로운 공장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재미를 주는 스포츠였다. 노동자들은 차차 축구를 관전하는 데 돈을 지불할 용의까지 가지게 되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철도망 또한 잘 구축되었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원정경기도 보러 갈 수 있었다. 자신의 동네에만 머물러 있던 팬들이 원정 경기에 따라갈 수 있게 되면서 팬 문화가 더욱 활성화되었고, 축구 시장은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처럼 축구의 폭발적인 성장은 잉글랜드에서 산업혁명과 맞물려 이루어졌다. 축구가 유럽에서 지금과 같은 인기와 규모를 가지게 된 것은 시기적절한 사회의 변화가 있었던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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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청춘스포츠 서서빈
해외축구 FA컵 잉글랜드 미들즈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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