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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신입사원 공채 영상을 제작하던 KBS 편집실에서는 특이한 변화가 관찰되었다.

"(영상속에) 여자 친구는 자신의 한계를 의심하고 반면에 남자 친구는 의지가 있고..
이거 너무 뻔하지 않나요? 여성들이 왜 맨날 이런 캐릭터죠?"


PD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남녀를 바꿔보자."

처음 기자가 입수한 최초의 대본은 아래와 같았다.
PD는 왜 이 지점이 어색하게 들렸을까?
 
남녀 차별이 엿보이는 최초의 대본
 남녀 차별이 엿보이는 최초의 대본
ⓒ 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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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쏘아 올린 변화

8월 26일에 부여 성흥산성 사랑나무에 KBS 취재 차량이 도착했다. 연인 사이로 설정된 배우가 산 위로 올라가서 취업을 앞둔 취준생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배경이었다. 여성은 취업 앞둔 남성에게 의지하는 느낌이고, 한편으로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대사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촬영이 진행되던 현장에서 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것은 해당 대본을 작성한 방송작가였다. 정소진 방송작가는 "이 장면에서 기존의 남성과 여성의 정해진 역할이 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남녀 역할을 바꿔보자고 첫 제안을 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반영되지 못했다.

그녀의 성 역할에 대한 지적은 편집실에서 다시 한 번 메아리처럼 퍼졌다. 신입공채 영상을 전체 지휘했던 이송은 PD는 8월 29일에 최종 편집을 하면서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한 시각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였을까? PD에게서 최초에 계획되었던 오디오 버전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 의식을 느낀 이 PD는 당일 같은 대사에 남성 파트와 여성 파트를 뒤집어서 모두 새로 녹음했다. 그러자 영상속에 의심 많던 여성의 모습은 사라지고 "용감한 거야"라며 여성 인재가 당차게 대답하는 새로운 포맷의 광고가 만들어졌다.
 

PD가 성역할을 새롭게 바꾼 영상은 팀장과 부장선에서도 검토가 함께 이루어졌다.

"이슈가 되고 있는 새로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지점으로 바꿔봐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은주 부장은 이번에 자신이 내린 결정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신입사원 스팟은 KBS에 중요한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젊은 인재들을 모으는 거라서 특히 신경을 많이 썼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바뀐 공채 광고는 예상 밖의 호응을 얻었다. KBS 내부에서도 성별 역할이 기존과는 다른 이번 공채 영상이 자주 거론된다고 했다. 

그러나 온라인상에서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TV에서 나올 때마다 못 봐줄 지경"이라며 "너무 무리해서 여성에게 맞춰서 포인트를 준 것이 아니냐"는 반대 의견과, "오히려 여성이 읊는 대사라 신선했다" "대사들이 굉장히 와닿았어요, 용기를 얻었다"는 반응들로 엇갈렸다.

페미니스트 문제로 논란되었던 KBS "제작진도 문제 의식하고 있어"

여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면서 방송 제작 단계에서도 사회적 인식들이 반영되고 있다.

이번에 성 역할이 바뀐 신입 채용 광고를 제작했던 이송은 PD는 "지난달에 일어난 골든벨에 출연했던 여학생의 페미니스트 발언 모자이크 사건 논란들이 이번 제작에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양성 평등은 KBS가 공영 방송이기도 하고 매스미디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가져가야 될 화두인 것 같다"며 앞으로 이러한 양성 평등의 시선을 담는 콘텐츠들을 계속 제작해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골든벨에서 한 학생의 페미니즘 문구를 검열하고 모자이크 처리해서 논란이 있었다.
 골든벨에서 한 학생의 페미니즘 문구를 검열하고 모자이크 처리해서 논란이 있었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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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는 '살림하는 남자들' 프로그램등을 통해 변화하고 있는 남녀 역할들을 반영해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KBS에서는 "살림하는 남자들" 프로그램등을 통해 변화하고 있는 남녀 역할들을 반영해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 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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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KBS에서는 <살림하는 남자들>이라는 예능 프로그램과 여성 아나운서들이 주축이 되는 <그녀들의 여유만만>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담아가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제작진들이 이렇게 여성에 대한 콘텐츠들을 제작할 때 신중해지는 것은 좋은 사회적 변화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예민해진 것일까?

익명을 요구한 김아무개 PD는 "예전에는 별 것 아니었을 장면들도 요즘에는 여성 혐오 등으로 쉽게 논란이 되어서 제작 피로도가 올라간다"며 "갈수록 여성들의 성 대결 현상 등으로 사회가 예민해지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러한 방송계의 피로도 호소에 대해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신주진 대표는 "여성들의 정당한 문제의식과 행동을 성 대결로 몰고가면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은 많은 경우 반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의 성 차별구조와 문제들을 외면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남녀 능력 차이 없음 보여주는 콘텐츠 많아져야"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떨까? 성 역할이 바뀌기 전과 후의 KBS 신입사원 공채 영상을 함께 전달하며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신동엽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같은 내용을 남녀 역할을 바꿔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매우 창조적이면서 좋은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PD가 문제의식을 느꼈던 여성의 소극적 대사에 대해 "(수정전 영상은) 여성은 소극적이고 과감한 도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사들이었다"며 "이런 근거없는 스테레오타입이 바로 유리천장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인데, 이번에 바뀐 KBS의 여성중심 채용 광고가 스테레오타입과 유리천장에 균열을 만드는 좋은 시도로 보인다"라고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지점을 남녀 간 대결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남녀 간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쪽으로 가는 게 좋다고 본다"며 남녀간 성별 대결로 보는 시각들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과거의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이제는 사회가 변화하면서, 그 변화를 잘 포착해서 미디어가 끌고 가는 것"이라며 "미투 운동, 페미니즘 등을 통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고, 그러한 부분을 잘 살려주는 것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신주진 대표는 "내부에서 대본이 수정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긴 하나, 최종 방영된 광고 또한 아쉬운 것은 사실"이라며 "최종 수정된 영상에서도 마치 남성이 여성에게 '넌 안될거야'라고 함으로써 현실을 직시하게 일깨우고, 가르치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신 대표는 "물론 여성이 어려움을 딛고 나갈거라는 의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 또한 남성의 목소리는 울림 있는 어른스러운 형태로, 여성의 목소리는 어리고 여린 음색으로 설정된 느낌을 더욱 강하게 준다"며 남녀 역할을 바꿔도 여전히 영상에 남아있는 남성 권위주의적 시각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태그:#KBS, #양성평등, #신입공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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