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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가을에 피는 꽃이 많다. 약간은 생소하게 다가오는 가을꽃들. 그래서 새롭고 더 반가운 기분이 든다. 긴 무더위에 지쳐서일까, '가을' 그리고 '가을꽃'은 발음에서 느껴지는 기분까지도 상쾌하고 시원하다. 그래, 다가오는 가을에는 가을꽃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상사화’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불공을 드리러 온 여인에게 반한 스님이 가슴앓이하다 상사병으로 쓰러진 자리에서 피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상사화’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불공을 드리러 온 여인에게 반한 스님이 가슴앓이하다 상사병으로 쓰러진 자리에서 피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정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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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가을에도 이렇게 다양한 꽃이 피는구나' 하며 가을꽃의 존재를 의식한 것은 차꽃이다. 여름을 보낸 시퍼런 찻잎 사이에 삐죽이 고개를 내민 하얗고 소담한 차꽃을 발견했다. 신기해서 요리조리 살펴보던 기억이 새롭다.

푸른 녹차 밭에 하얗게 피어있던 차꽃을 보며, 코스모스와 국화 외에는 가을엔 꽃이 없다고 단정 짓고 있던 나의 협소함을 깨달았다. 둘러보니 가을에 꽃이 참 많이 피고 있었다. 더욱이 분위기 있는 꽃들이 말이다.

녹차 꽃잎을 세며 인생을 생각하다

차꽃은 꽃과 열매가 함께 마주 보고 있는 것부터 독특하다. 꽃은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피고 진다. 하얀색의 꽃잎 다섯 장으로 돼 있는데 꽃잎은 각각 인생의 맛을 뜻한다고 한다. 너무 인색하지 말고, 너무 티 나게도 말고, 너무 복잡하게 말고, 너무 편하게도 말고, 그리고 너무 어렵게도 살지 말라는 의미라니 삶의 깊이가 묻어난다. 가을꽃의 격조가 느껴진다. 

꽃무릇은 붉은 가시 왕관 모양의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9월이면 연초록의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운다. 초록 숲에 불꽃을 피워 올린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꽃무릇은 화려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애틋한 그리움의 꽃이다. 흔히 상사화(相思花)로도 불리는 꽃무릇은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먼 옛날 토굴에서 정진하던 스님이 불공을 드리러 온 여인에게 반해 가슴앓이하다 상사병으로 쓰러진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것이다. 그리움의 꽃으로 알려진 것은 꽃무릇이 지닌 습성에서 유래한다.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나기 때문에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주로 절 주변에 많이 자라는데 뿌리에 있는 성분이 절에서 탱화를 그리거나 책을 만들 때 방향제로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피어나는 그리움의 꽃, 꽃무릇은 애틋한 가을의 주인공이다.

메밀꽃도 있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보름달이 휘영청 뜬 가을날 밤 장돌뱅이들이 메밀꽃밭을 걸으며 느끼는, 고고하면서도 먹먹한 분위기는 책을 읽는 우리 마음까지 전해온다. 가을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메밀밭 길을 나도 그저 따라 걷고만 싶다.

구절초도 빼놓을 수 없다. 음력 9월 9일이면 아홉 마디가 된다 해서 이름 붙은 구절초는 국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수수한 동네 언니 같은 정겨운 우리 가을꽃이다. 

가을꽃 여행지 : 봉평 메밀꽃밭과 불갑사 꽃무릇, 옥정호 구절초

가을꽃이 주는 고고함, 그리움과 정겨움을 찾아서 가을여행을 떠나보자. 메밀꽃 여행지로는 9월 초, 강원도 봉평이 대표적이다. 꽃밭의 규모도 크고 개화시기에 맞춰 메밀꽃축제도 열린다. 이효석 생가도 같이 들려볼 수 있어 문학답사까지 가능하다.

단 시끌벅적한 게 싫다면 경북 봉화의 소천면 일대의 메밀밭을 추천한다. 낙동강을 따라 펼쳐지는 산허리의 고즈넉한 메밀밭들은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소박하고 자연스럽다. 한적한 농촌의 가을 풍광에 마음까지 편안해 질 것이다. 단, 관광지가 아니므로 딱히 어디로 가야할지 목적지를 정하기 쉽지 않다. 차를 직접 몰며 이 길 저 길, 길 따라 달리며 시간 제약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여행자에게나 가능한 코스다. 

 
고창 학원농장 메밀밭
 고창 학원농장 메밀밭
ⓒ 정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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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 경에는 전북 고창의 학원농장에도 광활한 메밀밭이 펼쳐진다. 국내에서 대규모의 경관농업을 최초로 시작한 곳이다. 경관농업이란 농사와 동시에 농작물이 자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제공해 관광수입을 올리는 형태의 농업이다. 국내에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이다.

학원농장은 푸른 하늘 반, 꽃밭 반으로 넓은 구릉에 펼쳐지는 메밀꽃밭도 근사하고, 근처에 고인돌박물관, 선운사 등 쏠쏠한 관광지도 있어 여행코스를 다양하게 짜기에 좋다.

9월 중순에 피는 꽃무릇은 영광 불갑사와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가 볼만하다. 추천하는 코스는 용천사에서 출발해 작은 고개를 넘어 불갑사로 이어지는 트레킹길이다. 두어 시간이면 훌쩍 넘을만한 너무 길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은 길이다. 사람도 덜 붐비고 고즈넉한 산길을 걸으면서 붉고 화려한 꽃무릇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 꽃무릇이 질 때쯤이면 피어나는 구절초는 추석을 지나 10월 초순이 절정기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구절초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 정읍의 옥정호구절초공원, 세종시의 영평사가 가볼만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정지인님은 여행카페 운영자입니다. 매이지 않을 만큼 조금 일하고 적게 버는 대신 자유가 많은 삶을 지향합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가을꽃, #여행, #봉평, #불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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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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