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커다한 붉은 천이 날린다. 하늘하늘한 그 천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감싸 그들이 마음껏 사랑을 나눌 비밀 공간을 만든다.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지만 두 사람의 집안은 오랜 원수 사이였다. 사랑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티낼 수도 없고 만남조차 캄캄한 밤 몰래 가져야 했다.

비극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

 늦은 밤 학생들이 몰래 빠져나와 금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낭독하고 있다.

늦은 밤 학생들이 몰래 빠져나와 금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낭독하고 있다. ⓒ 쇼노트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아는, 비극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알앤제이>는 엄격한 가톨릭 남학교 4명의 학생들이 금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몰래 낭독하는 내용이다.

이토록 유명한 희곡이 금서였다니. 작품 속 학교가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엄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억압적인 학교의 모습은 공연 도입부에 잘 표현된다. 학생들은 울리는 학교 종소리에 맞춰 발을 쿵쿵 구르며 움직인다. 무릎은 항상 90도를 유지하며 방향을 바꿀 때도 몸을 빠르게 움직여 90도로 틀어야 한다. 앞만 보고 다니며 무표정이고 고해성사, 성경 공부 등의 과목을 배우며 오로지 시간에 딱딱 맞춰 살고 있다.

그런데 아무 감정도 없을 것 같던 학생들이 밤이 되자 얼굴에 생기를 찾는다.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비밀의 숲으로 간 학생들은 그곳에서 붉은 천으로 감싼 금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펼친다. 10개의 역할, 4명의 사람. 한 명은 로미오고 나머지는 줄리엣, 캐퓰렛 부인, 머큐소, 로렌스 수사, 유모 등으로 나눠 역할극을 시작한다. 과거 셰익스피어 시대 때 모든 희곡을 남자들만 연기했듯이 학생들의 연극에도 모두 남자뿐이었다.

낭독이 시작되고 학생들은 극 속의 인물에 몰입한다. 그런데 자꾸만 현실의 모습과 연극 속 모습이 겹쳐지고 급기야는 현실인지 꿈인지 환상인지 경계도 모호해진다. 그 이유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학생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담겨 있어서다. 4명의 학생들은 저마다의 아픔이 있었다. 동성 친구에게 느끼는 사랑, 억압적인 학교에 대한 두려움, 체벌과 폭력 등 아픔은 다양했다. 그들이 낭독하는 고전 속에서 사랑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기도 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낭독 시간은 탐스러운 욕망이자 자유고 현실 도피처였다. 갑갑한 학교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제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려본 한 여름 밤의 꿈.

잊을 수 없는 붉은 천

 연극 <알앤제이>의 한 장면. 학생들이 붉은 천을 이용해서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극을 하고 있다.

연극 <알앤제이>의 한 장면. 학생들이 붉은 천을 이용해서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극을 하고 있다. ⓒ 쇼노트


올해 국내 초연을 선보이고 있는 연극 <알앤제이>는 무대가 멋있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 중 단연 최고는 '붉은 천'이다. 붉은 천은 단순 소품을 뛰어 넘어 등장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맡은 역할도 크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붉은 천은 때로는 단단한 칼로 변해 긴장감이 도는 격투 씬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독약이 되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시험한다.

의자·책상밖에 없는 단순한 무대에 강렬한 빨간색의 천이 휘날리니 저절로 극에 긴장감이 생긴다. 천이 인물들의 손끝에서 생기를 얻어 움직일 때면 너무나 아름다워 붉은 색만 쫓아가게 된다. 이 천의 매력을 느낀 것만으로도 <알앤제이>를 본 것에 후회가 없을 정도다.

붉은 천 말고도 무대 자체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탁 트여 있는 공연장은 들어가자마자 꿈 속 세상 같다. 배경음악, 인물에 맞춘 테마 음악은 신비스러우면서도 억압적인 <알앤제이>의 매력을 끌어 올렸다. 또한 무대 양 쪽에 큰 책상들이 쌓여있고 객석 중간에도 책상들이 놓여 있는데, 배우들이 그 위에 올라가 연기를 한다. <알앤제이>에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뒤 쪽에 설치된 '무대석'이 있다. 무대석은 마치 무대 세트에 관객이 일부인 것처럼 공연 도중 배우들이 옆에 앉기도 하고 지나가기도 해 일반 객석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그들만 '공감하는 꿈'

다만 공연을 보는 내내 답답했다. 대본의 90% 이상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본이었기 때문에 대사들은 아름다웠고 빈틈없이 채워진 연출들도 멋있었다. 붉은 천이 휘날릴 때는 눈으로 천을 쫓아가면서 즐겼다. 그런데 단 한 순간도 인물들의 이야기에 공감 할 수 없었다. 분명 내 앞에 펼쳐지는 공연은 멋있고 아름다운데 나만 동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대사들은 감흥 없이 들렸고 휘몰아치는 극적인 연출들도 설레지 않았다.

 엄격한 카톨릭 남학교의 4명의 학생들은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다.

엄격한 카톨릭 남학교의 4명의 학생들은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다. ⓒ 쇼노트


왜 그랬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에 흥미가 없어서였다. 한 눈에 반해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상해 보였고 여러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헷갈려서 극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도 자세히 모르는데 그를 통해 학생들의 문제를 이해하려 했으니 어쩌면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극은 상당히 모호하고 불친절하다. 좋은 극은 관객과 호흡해야 하며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무사히 끌어 들인 뒤 메시지를 펼쳐야 한다. 그런데 <알앤제이>에는 그런 친절함이 거의 없었다. 무대의 아름다움만 객석과 호흡할 뿐 극은 객석을 뒤로 한 채 혼자 달린다. 현실과 환상이 모호한 건 작품의 특색이라고 치더라도 작품의 가장 중요한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할 때조차 불친절하기만 하다. 연극의 매력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들을 음미하는 거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하니 아쉬웠다.

<알앤제이>는 분명히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제대로 읽고 가거나 2번, 3번 재관람을 하다 보면 더 좋아질 작품이다. 그런데 나는 관객이 공부를 하지 않고 극장에 가도 온전히 그 작품 속에 빠져들 수 있는 극을 원했기에 <알앤제이>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푸른 창문과 붉은 천, 신비로운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훌륭한 무대와 연출이 있었기에 온전히 즐기지 못한 점이 슬픈 작품이었다. <알앤제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꼭 로미오와 줄리엣 희곡을 보고 가기를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연극 <알앤제이>는 9월 30일까지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공연합니다.
연극알앤제이 알앤제이 쇼노트 윤소호 손승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