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하하> 포스터

영화 <하하하> 포스터 ⓒ 전원사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는 내가 극장에서 처음으로 본 '19금 영화'였다. <하하하>가 개봉하던 2010년 성인이 된 나는 '청소년 관람불가'인 영화를 극장에서 합법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간혹 궁금증이 많고 호기심이 왕성했던 내 친구들은 고등학생 때도 동네 극장의 보안이 허술한 틈을 타 몰래 상영 중인 영화관에 잠입해 <쌍화점> 같은 19금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매사 답답했던 나는 왠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그렇게까지 해서 19금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고등학생 때는 고등학생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또 혹시나 몰래 보러 갔다가 잡혀서 집으로 끌려가 '얘가 영화관에서 19금 영화를 보다가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겁도 났다.

또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의 적나라한 살을 굳이 생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영화관에서 봐야하는 그 민망한 상황을 애써 감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그 친구들의 멋진 모험정신이 부러울 뿐이었다. 친구들은 그렇게 19금 영화를 보고 온 날이면 학교에 와서 영화의 그렇고 그런 장면들에 대해 키득키득 웃으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쑥덕쑥덕 풀어놓았다. 누군가의 엉덩이와 가슴에 대해, 우리는 한참을 떠들어댔다.

괜시리 옆자리에서 이야기만 들었는 데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 이야기들이 내 궁금증을 자극했다. 하지만 '어차피 1년만 지나면 합법적으로 뭐든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걸'이라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극장에서 최초로 본 '19금 영화'

당시 나는 감독의 주관이 강한 소위 '예술 영화'라는 것이 보고 싶었다. 예술 영화를 보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하하>는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 대상을 탄 작품이고, 그 점이 나를 자극했다. 상을 받은 영화는 어떤 영화인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직도 <하하하>를 보러 극장에 가던 날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극장에 가기 전 나는 몇 번이나 <하하하>의 예고편을 돌려보면서 준비를 마쳤고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더운 여름날이었다. 오후에는 아르바이트가 있었기 때문에 오전 중에 영화를 보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했다.

'드디어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를 극장에서 당당히 볼 수 있다!' 홍상수 영화는 지금도 그렇지만 2010년에도 상영하는 영화관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영 중인 영화관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다. 영화관은 인적 드문 터미널에 위치해 있었다. 왠지 사람들이 찾지 않을 것 같은 영화관이었다.

매표소 앞에서 주민등록증을 내려고 체크카드와 함께 손에 꼭 쥐고 있었으나 직원은 주민등록증을 따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바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의 티켓이 내 손에 쥐어졌다.

영화관은 한산했다. '이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홍상수의 '예술영화'를 보러 온 대단한 사람들일 거야'라고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물론 우연이었겠지만) '예술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대체로 손에 팝콘을 들지 않았고 그때는 그게 그저 멋있게만 보였다.

그때까지 내게 극장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팝콘을 먹으러 가는 장소였다. 나는 혼자였고, 내 손에는 팝콘이 들려 있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영화관에는 나처럼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영화가 시작했고 관객들은 다들 띄엄띄엄 앉아 조용히 영화를 보았다. '그렇고 그런' 장면이 나와도 성인답게, 태연하게 넘기면 그만인 일이었다. 절대 긴장하지 말고 웃어야지.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고 영화는 시작됐다.

 영화 <하하하> 스틸사진

영화 <하하하> 스틸사진 ⓒ 전원사


<하하하>는 굉장히 특이한 영화였다. (당시 나는 막걸리를 한 번도 마셔보지 못했는데) 배우 김상경과 유준상이 나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자신들이 통영에서 겪은 일을 하나씩 풀어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김상경과 유준상의 현재 시점의 화면은 사진으로 처리됐고 통영에서 있었던 일들이 중간중간 영상으로 삽입돼 두 사람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관객들은 어떤 대사에서 가끔 소리를 내 킥킥 웃기도 했지만, 난 그 장면에서 왜 웃어야 하는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들 아는 걸 나만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웃었다. 마치 미국 농담을 듣고 웃는 사람들을 보고서 따라 웃는 것처럼 나도 따라 웃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홍상수 영화는 소위 '홍상수 영화' 속 허세의 문법을 대강이라도 아는 사람이어야 웃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영화 속의 웃음이란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훨씬 속 편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소리나지 않게 팝콘을 녹여 먹느라 팝콘통에는 팝콘이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그렇고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불로 그렇게 가릴 거면 뭐하러 '청소년 관람불가'를 붙이나. 잔뜩 긴장을 하고 들어간 영화관이었지만 터덜터덜 나와 '에이, 이 영화가 왜 19금 영화야?' '19금 영화도 별 거 없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관에서 나왔다. 다만 <하하하>의 배경이 됐던 통영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영화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바로 아르바이트에 가야했다. 당시 일하던 아이스크림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같이 일을 했던 언니들에게 오늘 처음으로 '19금 영화'를 보았노라고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언니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후 홍상수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영화를 '청소년 관람불가'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청소년이 내 영화를 보는 것을 안 좋아한다. 그 친구들이 이 영화를 봐서 뭐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청소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성인도 아니었던 난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고, 한동안 그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영화 <하하하> 스틸사진

영화 <하하하> 스틸사진 ⓒ 전원사


난 아직도 팝콘을 먹는다

이제 영화관 앞에서 더 이상 '민증'을 내미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술을 마실 때도 마찬가지다. 간혹 형식적으로 '민증'을 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면 실실 웃는다. 아무래도 점점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어플을 통해 영화를 예매할 수 있었고, 내가 청소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여전히 예술영화를 볼 때도 팝콘이나 나초를 갖고 들어간다. 예술영화라고 특별히 주전부리를 먹지 않는다는 건 어린 내 눈에 비친 작은 편견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아니면 내가 그저 다른 사람에 비해 영화관에서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도 가끔 홍상수 영화를 본다. 그의 작품 곳곳에는 분명 빛나는 구석이 있다. 특히 홍상수는 인간 군상을 그처럼 오랜 시간 탐구하며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최근작 중에는 <그 후>를 좋아해 영화관에서 두 번이나 보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라고 몇 번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만든 몇 편의 영화는 보다가 정체모를 불쾌함에 끝까지 보지 못하기도 했다.

다시 <하하하>를 극장에서 볼 날이 올까. 만에 하나 다시 개봉을 한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기 때문에 그때와 같은 조마조마한 감정으로 <하하하>를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극장이라는 공간은 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매번 다른 기억을 가져다준다.

덧붙이는 글 '극장에서 생긴 일' 공모 기사입니다.
홍상수 19금영화 하하하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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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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