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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박종철 흉상 옆에 선 아버지 박정기 선생.
 아들 박종철 흉상 옆에 선 아버지 박정기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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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영국의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은 기도문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느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


이 시에서 보듯이 좀 더 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람은 인류의 한 분자로 모든 사람의 삶은 서로 연결돼 있다. 나는 7월 28일 아침 운명하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을 생전에 두 번 만나 뵌 적이 있고, 서너 차례 통화한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내가 권중희 선생과 백범 암살진상 규명 차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갈 때 금일봉을 보내주시는 등, 이후 내 인생길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신 분이시다.

2002년 말, 나는 한 시인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는데 바로 옆자리에 박정기 선생이 앉아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자, 당신은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이사장 자리를 맡고 있다고 하시면서 명함을 건네줬다. 그때 나는 오마이뉴스 새내기 시민기자로 뭔가 의미 있는 기사를 쓰고자 고심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 이듬해 [의를 좇는 사람]이라는 연재기사를 기획한 뒤, 첫 번째로 박정기 선생 탐방 취재 기사를 쓰기로 했다. 전화로 나의 그런 뜻을 말씀드리자 당신은 언론에 여러 번 인터뷰했지만 늘 편죽만 울릴 뿐이었다면서 어렵게 승낙해 주셨다.

나는 기왕이면 6.10 항쟁 16돌 기념일 직전에 기사가 나가면 좋을 것 같아 6월 초로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그날 학교 행사로 오전수업을 마친 뒤(당시 나는 이대부고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서울 동대문 옆 창신동 '한울 삶' 부근 찻집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서울대학교로 향했다.

택시에 오른 뒤 기사에게 "서울대학교로 갑시다"라는 말만 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서울역을 거쳐 남영동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남영동은 대공분소가 있는 곳이 아닌가. 나는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사진 두 장을 찍고 다시 택시에 올랐다. 그 남영동 대공분소는 겉모습만 조금 변했을 뿐,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아버님은 말씀했다.

'목욕탕집 주인'이 되는 게 마지막 소원

 아들의 돌비석에 묻은 새 오물을 닦던 아버지 박정기 선생 .
 아들의 돌비석에 묻은 새 오물을 닦던 아버지 박정기 선생 .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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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선생, 1929년 생으로 당시 일흔 넷이었다(올해 여든 아홉으로 소천). 경남 동래(현 부산광역시)에서 중농 집안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 부산수도국에 들어간 이후, 날이면 날마다 수도 파이프를 만지면서 33년을 보냈다. 당신은 정년퇴임 후에 목욕탕을 차려 '목욕탕집 주인'으로 남은 생을 마감하는 게 소원이라 했다.

그런 그가 1987년 1월 14일, 막내아들 종철을 잃은 뒤부터는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걷고 있다. 아들의 죽음이 당신의 운명을 확 바꿔놨다. 태백산맥과 같은 꿋꿋한 민주투사로.

그날 오후 4시 무렵,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뜰에 세워진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 앞에 도착했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독재의 아스팔트 발바닥을 태우던 1987년 6월 어느 날, 너의 모습이 일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영영… 그러나 눈물 흐릿한 시야 바깥으로 겨울이 거대하게 빠져나가는 광경 또한, 들렸다. 그렇다. 나아가는 자 시간을 알고 역사를 느끼며, 그 너머 죽음을 가슴에 미리 새긴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보다 희망의 나이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의 찰나, 찰나의 광경에 동참한다. 그것은, 그것이 너의 광경…. 박종철, 여기 10년 동안 견고해진 눈물로 너를 세운다. 1997년 6월."

당신은 이곳을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찾는다고 했다. 그는 우선 비 앞에 참배객들이 두고 간 마른 꽃다발을 치운 뒤, 비 뒤에 놓인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1991. 10. 24. 종철이를 추모하는 벗들이"라고 새겨진 돌로 가서 새들이 남긴 하얀 배설물을 닦았다.

그는 이런 일들을 늘 해왔듯 아주 익숙하게, 마치 대학 관리인처럼 스스럼 없었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비 언저리를 깨끗하게 치웠다. 청소가 끝나자 당신은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식은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내가 이 비를 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만 오면 다른 분들에게 미안해요. 서울대학교에서만 민주화운동으로 죽은 이가 여럿 되고 종철이 이전에 우종원, 최우혁, 김용권, 김성수 같은 이도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았는데... 우리 종철이만 이렇게 비까지 세웠으니 정말 죄송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뜻밖에 말씀이었다. 천금보다 귀한 자식을 잃고도 행복한 사람이라니.

"사람은 한번 죽는데,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종철이는 죽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으니 복이요, 그 복으로 내가 더 많은 자식을 얻었으니. 그 놈이 애비에게 잔뜩 복을 안겨주고 간 거지요. 여태 자식의 시신도 못 찾은 이도 얼마나 많은데…."

득도한 스님 같은 말씀이었다. 마침 가까운 등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이 일대를 그놈이 얼마나 쏘다녔겠어요. 아주 바지런한 놈이었거든요. 이곳에 올 때마다 아직도 어디선가에서 "아부지' 하고 그 놈이 달려들 것 같은 착각에 빠져요."

1987년 1월 14일

아마 박종철 열사도 생전에 친구들과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게다. 아버님과 나는 등나무 그늘에 나란히 앉아 대담을 나눴다.

- 그날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해(1987년) 1월 14일, 나는 그날도 예삿날처럼 공사 현장에 있었는데, 본청 총무과장이 오후 7시에 다방에서 좀 보자고 해요. 그 전화를 받고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인사 이동이면 인사과장이 보자고 할 테고, 총무과장은 볼일이 없을 텐데…' 하는 정도였어요.

약속시간에 다방으로 갔더니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들은 인상도 험악하고 그 순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직감적으로 찬 기운이 확 돌더군요. 두 사람은 부산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었어요. 부산 사람 두 사람(안기부 요원과 운전기사)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남은 두 사람이 대뜸 위압적으로 '서울에서 왔소. 곧장 서울로 갑시다' 하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어떻게나 그들의 서슬이 무서웠던지 '내가 왜 서울에 가야 하느냐?'는 반문도 못하고,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갑시다' 하니까 마지못해 응해 주더군요. 집에 가자 아내와 은숙(종철 누나)이가 '종철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다그쳐 묻더군요. '마 내, 서울 가서 알아보고 전화하마'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왔어요. 그날 밤 서울행 열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몇 번이나 물었으나 그들은 '가 보면 알 겁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을 뿐이었어요.

새벽녘에 서울역에 도착하자 새까만 양복을 입은 너댓 명의 덩치들이 마중 나왔어요. 그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아차'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들은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요(나중에야 그곳이 남영동 대공 분실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한사코 종철이를 먼저 보여 달라고 애원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는 밤차를 타고 왔으니 몸이나 닦자는 거예요. 대충 몸을 닦고 나오자 해장국밥을 시켜주고는 다시 (대공 분실) 가건물 2층에서 기다리게 하대요. 무작정 기다리고 있으니까 조바심이 났어요.

그들 몇은 번갈아 내가 있는 방을 드나들면서 대답은 않고 '마음을 크게 먹으세요' 하면서 계속 나에게 엉뚱한 질문(주로 내 과거 전력이나 집안에 사상문제 여부 등)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짜증을 내면서 '이 사람들 와이 이라나. 종철이나 빨리 보여줘요' 했으나 여전히 딴 청만 하는 거예요. 나는 점차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니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버지 박정기 선생.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버지 박정기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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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선생의 말씀이 이어졌다.

"마침내 나를 다른 사무실로 데려가데요. 실내는 책상에 세 개 있었고, 덩치 좋은 형사들이 빙 둘러 서 있었어요. 자신을 박원택 계장이라고 소개한 자가 사건 경위의 말문을 열었어요.

한 다부지게 생긴 자(나중에 알고 보니 조한경)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으로 살아왔고, 국가에 충성해 왔다. 경찰이 수사를 하다보면 피의자에게 위협을 주는 일도 있는데, 아드님을 조사할 때 발을 구르면서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밥을 줘도 안 먹고 물만 많이 먹더라'고 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말만 잔뜩 늘어놓는 거예요.


마침 종철이 형과 내 삼촌이 왔기에 그 자리에서 한 번 사건의 시말을 재연해 보라고 하니까 박원택은 지시하고 조한경이가 재연하대요. 그래서 실장실에 가서 똑같이 재연해 보라니까, 대공 분실장 전수린 앞에서도 똑같이 재연하대요. 그것은 강민창 치안국장이 발표한 그대로예요. 하지만 그때 그 발표를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멀쩡한 젊은 놈이 책상을 치자 죽는다는 건 소도 들으면 웃을 일이지요.

나는 그날 오후 4시경에야 경찰병원 영안실에 있는 종철의 시신을 봤습니다. 그새 부산에 가족들도 비행기를 타고 와서 같이 봤지요, 종철이는 온몸이 이미 굳어 있었어요. 그때 제 집사람이 아들의 시신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더군요. 그들의 작전이 맞아떨어진 거지요. 순간 나는 남은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이런 와중에 저들은 내게 거의 강제로 도장을 받아가 부검을 했어요. 처음 시신을 검진한 분이 중앙대 의대교수 오연상 박사였고, 부검한 분은 고려대 법의학 교수 황적준 박사였어요. 입회검사 안상수, 지휘 검사는 최환씨였어요.

다음날 벽제 화장장으로 갔지요. 영구차에서 종철이의 시신을 담은 관이 내려지자 아내가 또 기절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대기시켜 놓은 구급차에 아내와 은숙이를 싣고 갔어요.

나는 종철의 화장에 합의해 준 일은 없었어요. 그때 나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또 다른 불상사가 날까 봐 저들에게 계속 끌려 다니기만 했어요. 종철이의 뼛가루를 가지고 임진강으로 갔습니다. 거기 샛강에다 뼛가루를 뿌렸어요. 그날은 강물도 얼지 않았고 비까지 뿌렸습니다. 그날의 내 모습을 한 신문기자가 단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거듭된 조작에 또 조작, 진실은 없었다.

- 수많은 학생운동 사건 중에서 박종철 사건만은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난 셈이지요?
"아직도 시원케 밝혀지지 않은 게 있습니다. 우선 종철이 연행 시간입니다. 그들은 1월 14일 오전 8시에 연행했다고, 심지어 고문 경찰관 부인 일기장까지 조작했습니다만 제가 조사한 바로는 1월 13일 자정 무렵에 연행해 갔어요. 그들은 종철이를 심문한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유리하다고 판단해 조작한 듯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바로는, 1월 13일 학교에서 박명진 친구의 성적표를 대신 받아 밤 11시 무렵 신림동 하숙집에 전해준 뒤 자기 하숙집으로 돌아오다 행방불명됐거든요.

그런데 경찰은 오전 8시에 연행해 와서 11시에 죽었다고 하거든요. 7시간 남짓 차이가 나요. 그동안 무슨 짓인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연행 후 3시간이라고 끝까지 우겼어요. 3시간동안 자술서도 두 차례나 썼다고 하는데,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합니까?

또 하나는 부검 결과 흉부압박사라고 했지만, 우리 가족(종철이 삼촌)이 부검 때 입회해 보니까, 전기고문 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체의 여러 군데에 반점이 있었다고 그러더군요. 아마 강민창 주도하에 관계대책회의에서 하나만이라도 뭔가 숨기자라는 회의결과를 따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그때 고문 경찰관은 다 풀려나왔나요?
"그럼요. 조한경 10년, 강진규 8년, 황정웅과 반금곤은 5년, 6년을 실형 받았고, 이정호는 3년을 받았지만 모두 형량대로 다 살지 않고 가석방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지휘선에 있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 등도 여태 잘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네 사람은 철저하게 감싸더라고요. 일제 때 독립군을 고문한 경찰이 해방 후에도 잘 사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 그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까?
"나도 용서란 말이 좋은 줄은 잘 압니다. 한때는 '저들은 하수인이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들의 태도를 보면 도저히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어요. 저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가 생긴 실수라고 가볍게 여겨요. 그런 자에게 '좋은 게 좋다' 식으로 용서해 버리면 이 땅에 고문은 근절시키지 못하고 부당한 권력은 계속 이어갑니다.

나는 현재 유가협 조직을 이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강하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국가 공권력에다가 막대한 자금으로 회유하고 협박 공갈을 일삼아 왔어요. 정말 그동안 학생 하나 죽거나 실종시키는 일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늘 힘없는 백성만 당해 왔지요. 그래서 늘 흐려지는 내 마음을 추스르면서 스스로 독해지려고 애썼지요."

- 제가 보기에는 박종철군은 그래도 인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 뻔했지요. 먼저 시신을 검안했던 중앙대 부속 병원의 오연상 박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종철이가 숨을 거둔 후 불려갔던 그분이 입을 다물었다면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 이부영씨의 역할도 컸습니다. 영등포 교도소에 갇힌 몸으로 범인이 축소됐다는 것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그분의 용기 덕분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교도소에서 나온 그분의 쪽지를 그해 5월 18일 미사에서 밝혀 5공 정권의 부도덕성을 백일하에 입증했지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진실을 밝혔던 김승훈 신부님도 용기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쪽지를 전달한 교도관, 황인철, 김광일 변호사 그밖에 내 일처럼 앞장섰던 수많은 애국 시민들…. 정말 그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들을 잃고 눈을 뜨다

 박종철 열사
 박종철 열사
ⓒ 박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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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길이 바뀐 셈입니다. 아들을 원망해 보지 않았습니까?
"대학 입학 후 경찰서에 드나든다는 걸 알고서는 그 당시 대학생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통과의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실 나는 지방 공무원이었고, 정치에는 별로 관심도 없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내 소원이 퇴직 후 목욕탕 주인으로 손자들 재롱 속에 내 인생을 마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을 잃고 내 눈이 떠졌습니다. 종철이가 죽고 난 뒤 곧 정년퇴임하게 됐고, 그후 유가협에 참석하게 됐지요. 여기 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내 아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몇 해 전 강경대군 사건 때는 재판 방청 중에 법정 소란으로 석 달 남짓 교도소 생활도 했지요. 이 모두가 아들 때문이지만 한 번도 그 놈을 원망해 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 놈이 내 눈을 띄워준 효자지요.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데 죽는 날까지 내 힘자라는 데까지 지가 바라던 세상이 오도록 투쟁의 대열에 앞장 설 겁니다."

- 아들이 바라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주' '민주' '통일'. 이 세 말입니다. 사실 해방 후 모든 문제는 조국 분단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분단 문제 해결이 사회 갈등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분단 극복이 쉽지 않은 줄 압니다. 하지만 남북이 인내하면서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정부 간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교류가 더 잦아져야 합니다."

- 대담 마무리 말씀을 해주십시오.
"아쉬운 것은 현재 운동권 역사가 잘 조명이 안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론과 학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 같습니다. 그들이 그렇지 못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이 있는 듯한데, 이럴수록 백성들은 체념할 게 아니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얘기로 대학 뜰에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유가협을 이끌고 있기에 그 일도 만만치 않은 듯, 대담 중에도 몇 차례 전화가 왔다. 저녁에 또 만날 분이 있다고 해서 다시 택시를 타고 동대문으로 돌아왔다. 나는 을지로3가에서 그날 찍은 사진을 맡기기 위해 내리고, 아버님은 창신동 '한울 삶' 집으로 향했다.

박종철 그는 누구인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984년 3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했으며,
1986년 4월 11일 청계피복노조가 주도한 가두시위 도중 연행, 구속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받으며 고문을 당하던 중, 대의와 신의를 지키며 생을 마쳤다.
그의 거룩한 죽음이 그해 6월 항쟁의 기폭제로 민주화의 큰 물길을 돌린 계기가 되었다.


- <박종철 평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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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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