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을 위해 배우 한상진은 살을 빼고 이를 가는 것은 물론, 진짜 맞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죽도를 가져와 지인들에게 자신의 등을 때려달라고 했다. 죽도로 제대로 맞은 그의 등은 시뻘겋게 피멍이 들었다. 분장을 한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정을 모른 채 그저 "리얼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속사도 그의 아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스스로가 원해서 한 일"이라고 한상진은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면서 "외국에서는 연기를 위해 이를 뽑기도 하지 않느냐. 한 번 해보고 싶었다"라며 웃었다. 그리고는 "일일드라마니까 대충 하라는 인식이 싫었다"고 덧붙였다. 계속 미소를 띤 채 답을 하던 한상진은 그 말을 하면서는 웃지 않았다.

"매일 하는 연속극이니까 대충 찍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배우, 감독, 스태프들 그 누구 하나 대충 넘기는 사람은 없었다. 매일 하는 거니까, 일상적이니까 대충한다고? 그렇지 않다. 매일 봐주는 시청자들에게 더 잘해야 하는 거다."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한상진의 말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인형의 집>에서 최악의 악역 '장명환'을 맡았다. 그는 등장인물을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며 짜장면 그릇을 머리에 뒤집어 쓰기도 하고, 심지어 총까지 쐈다. 장명환은 이기기 위해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오로지 자기 욕심에만 가득 차서 사는 인물이다.

시청자들은 한상진의 행동에 분통을 터트렸고, 반면 그의 불행에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자주 가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너무 나빠. 그렇게 살면 안돼. 난 네가 왕했을 때가 좋았어"라는 말을 들었단다. 그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한 식당 아주머니는 한상진이 <마의>에서 왕을 연기했을 때는 "내가 장금이가 됐으니 수라상을 차려주겠다"고 했던 분이라 한다. 한상진이 "저건 드라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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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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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오후 배우 한상진을 만나 <인형의 집> 종영에 대해 묻고 들었다. 한상진은 이 드라마를 통해 "잃은 게 없다. 난 배우로서 다양한 폭을 넓혔고 많은 걸 배웠다"고 답했다.

다음은 한상진 배우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일일드라마 편견 깨고 싶어"

- <인형의 집> 마지막 회에서 장명환이 총을 쏘고 자살해서 논란이 좀 있었다. 한국식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사실 대본을 받고 놀랐다. 아니, 이래도 되나? 저녁 8시에 하는 일일드라마에서? 감독님도 어디까지 보여줘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셨다. 막판에 내가 최명길 선배를 쏘고 내 목에 총을 쏴서 자살을 하는 장면을 연기했는데 우리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다보니, 오히려 세상에 더 충격적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많은데 드라마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웃음) 세상은 더 험악하게 돌아가는데 드라마가 항상 웃을 수만은 없으니까 이런 장르의 드라마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사람들이 한상진이 맡은 역할을 많이들 미워하더라. 이 드라마를 통해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배우로서 폭을 넓혔다고 생각한다. 악역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난 눈도 쳐지고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코도 커서 그간 맡은 역할들이 비슷했다. 착한 아들이나, 나라를 위하는 왕, 정의로운 역할 같은...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놈이었다. 한상진이 저런 연기도 할 수 있네, 그런 인식을 얻었다. 반면 잃은 건 없다. 악역을 했음에도 '코봉이'라는 캐릭터를 얻어서 감사하다. 동네에서 만난 아기도 '코봉이'라고 불러서 깜짝 놀랐다. (웃음) 살을 빼니 안 그래도 큰 코가 더 두드러져 보여서 그렇다. 모든 단어들이 코로 통했다. '인형의 집'을 '코봉이의 집', 놀랐을 때는 '코들짝' 그리고 '코리둥절' '코둥지둥' '코무룩' 같은 말. (일동 웃음) 실제로 코에 대한 광고도 들어왔었다. 코봉이 안경을 쓰고 하는 콘티도 있었는데 코 광고는 되도록 피하자 싶어서 하지 않았다."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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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의 인기가 대단했다. 상반기 동시간대 드라마 시청률 1위였는데 기분이 어떤가.
"사실 일일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다. 반신반의했고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 왜 연속극을 가냐면서... 난 '연속극을 가면 왜 안 되는 건가' 싶었다. 연극 무대에서 관객 2명을 두고도 공연한 적이 있다. 내가 연기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연세가 많으시고 몸도 안 좋으셔서 내 드라마를 제대로 본 적이 없으시다. 늦은 시간에 미니시리즈에 나오는 것보다 내 아들이 매일 TV에 나왔으면 좋겠고, 일일드라마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도 환자들에게 우리 아들이라고 자랑할 수 있게끔 말이다."

- 효도를 하려고 일일드라마를 선택한 건가? (웃음)
"그리고 일일드라마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다. 일일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이라고 해서 연기를 못 하지 않는다. 다 잘 한다. 일주일에 150분 방송이 나간다. 영화 한 편 이상인데,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중심을 지켜가면서 연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 최명길 선배님, 왕빛나씨, 박하나씨에게 감동했다. 이들이 '진짜 프로'라고 생각했다. 이순재 선생님이 '똥배우'는 '나 눈물 연기할 테니까 조용히 해주세요'라면서 감정 잡는 배우라고 그랬다. 맞다. 연기자는 프로이고 '나 이제 감정 잡을 거니까 조용히 하라'고 하면 '똥배우'다.

최명길 선배님은 연기를 하다가도 '컷' 소리 나면 바로 "점심 뭐 먹을까?" 하신다. 현장이 전쟁터 같았는데 이미 기술적인 부분에서 연기 경지에 오른 분들에게 많이 배웠다. 이들이 대기실에 앉아서 대본을 볼 때면 몸에서 마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그 많은 신에서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들과 장난을 치고 싶다가도 경외심을 느끼게 됐다."

"드라마에서 못생김과 추악함 담당했다"

- 다음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나.
"지금 검토 중인 작품들이 좀 있다. 시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캐릭터를 찾고 있다. 실생활에서 생존 본능이 강한, 절실한 사람을 연기하고 싶다. 연기 데뷔한 지 20년이 됐다. <인형의 집>이 50번째 작품이라 나름대로 의미도 있다. 대중들이 한상진이 하면 '쟤가 하는 연기는 생존형 연기야', '저 캐릭터는 살아남으려는 사람이야'라는 평가를 해줬으면 좋겠다. 밋밋한 건 하고 싶지 않다."

- 왜 살아남으려는 캐릭터를 원하건가.
"어떤 작품에서든 보통 악인은 다 생존하려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정의로운 주인공들은 상대를 배려한다. 흔히 말하는 오지랖이다. (웃음) 나도 오지랖 부리는 역할을 많이 해봤다. 그런 역할 말고 오직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캐릭터를 맡고 싶다."

- 이러다가 계속 악역을 할 것 같은데. (웃음)
"악역이 너무 좋다. 감독님한테 '더 나쁘게 해주세요', '끝까지 나쁜 놈으로 살게 해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개과천선까지 필요 없고, 더 맞고 싶고 욕 먹고 싶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내 욕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맞는 장면이 있었는데 일부러 상처를 만들었다. 죽도로 진짜 때렸다. 다들 분장인 줄 알고 리얼하다,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했다. 난 다 해보고 싶었다. '연속극은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물론 또 하라면 못할 것 같은데 연속극이니까 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 악역을 하면 사람들이 보통 힘들어 하고 그 역에 대한 당위성을 찾으려고 한다. 한상진이 연기했던 장명환은 당위성을 찾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악역이다. 어떻게 연기했나.
"장명환에 한해서는 합리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욕심만 있고, 자기만 잘 됐으면 싶은 사람으로 설정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았다. 요즘 현실 사회를 봐도 밑도 끝도 없는 악인들이 많다. 굳이 합리화시킬 필요 없다. 보통 멋을 부리려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형의 집>에서만큼은 멋있게 보이려는 악역을 하지 않을 거고 그런 악역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악역을 해서 그런지 외모가 좀 바뀐 것 같다. (웃음)
"어떻게 더 나빠 보일까 고민을 많이 했다. 조금이라도 타협을 하는 순간, 착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정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내가 멋있게 보이고 싶고 잘생기게 보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끝이다. 메이크업도 안 하고 머리 스타일도 안 고치고 나온 적이 있다. 화면에 잘 나오고 싶어서 애쓸 필요 없다.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한 거다. 처음 <인형의 집>이 방송되고 나서 댓글에 "한상진 얼굴이 이상해졌다" "못생겨졌다"는 반응이 나왔을 때 감사했다. 정말 못생겨지려고 했으니까. 물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잘생겨 보이지는 않는다. 이 말은 꼭 써달라. (웃음) 착해 보이는 게 싫어서 일부러 턱을 빼고 얼굴도 각이 찌그러지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드라마 속에서 추악함과 못생김과 혐오스러움을 담당했다."

- 특히 짜장면을 머리에 맞는 신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건 좀 맞기 싫었다. 연속극을 하다 보면 그런 장면들이 있다. 대본을 보고 설마 진짜 시키시려나 싶었는데 감독님께서 '짬뽕을 맞을 수도 있어'라고 하셨다. '여름이니까 시청자들이 덥다고 할 수도 있으니 냉면으로 가면 어떨까요?' 했다. 그런데 조폭들이 짜장면을 먹는 설정을 바꾸기도 뭐 하더라. 리허설 많이 하고 들어갔는데 짜장면을 내 머리에 엎어주시는 조폭 보스 분께서 기가 막히게 한 번에 오케이를 냈다. 사실 찍을 때부터 이 장면이 내 연기 생활에 걸림돌이 되겠구나, 어딜가나 '굴욕 장면'으로 나오겠구나 생각은 했다. (웃음)"

단역들 출연하는 유튜브 계정 운영 이유

- 유튜브 계정 '원포인트'를 운영하고 있다. 소개를 부탁한다.
"소속사는 모른다. (웃음) 나랑 마음 맞는 지인 5명이서 제작사를 차렸다. 내가 단역을 한 12년 정도 했다. 1995년에 처음 TV에 나왔고 2007년에 신인상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몰라주는, 사촌 이내만 알아주는 '가내수공업 탤런트'였다. 단역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학에서 연극을 할 때도 무대에 올라가 대사를 많이 하는데 막상 드라마 무대에 오면 단역들은 한 1초 나온다. 이 단역 연기를 가르쳐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주인공 둘이서 연애신을 찍는데, 그 옆에서 밥 먹는 단역을 해야 할 때, 밥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연기하다가 혼났다. '밥 먹는 연기를 누가 그렇게 하느냐'고. 그런 단역 연기를 알려주는 거다.

신인 배우들은 학원 같은데 가서 처음부터 주인공 연기를 배우는데, 실제 처음 현장에 투입되면 긴 대사를 주지 않는다. 물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주연을 맡기까지의 기간이 짧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신인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아무도 이걸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내 단역 시절의 연기를 후배들이랑 나누고 싶었다. 후배들에게 밥 사주고, 술 사주고 그런 것보다 제작사를 만들어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주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TV에 나오지 않는 99%의, 항상 준비된 배우들이 있는데 이들이 편하게 나와서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싶었다."

- 구독자가 얼마나 되나?
"유튜브에 '원포'라고 치면 나오는 채널인데, (24일 현재) 107명 정도 구독자가 생겼다. 100명 넘어서 곧 우리들끼리 파티를 할 거다. 100명이면 소극장 하나를 채운 셈이다. (웃음) 이 배우들이 와서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말하면 다들 운다.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던 거다. 나오면 큰 돈은 아니지만 출연료도 준다. 출연하셨던 분들 중에 영화든 드라마든 작품 포스터에 그 사람 이름이 들어가면 그 촬영장에 커피차를 보내드리고 내가 직접 촬영장까지 운전해서 모셔다 드릴 거다. 그렇게 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당장 보내드린다. '원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중에 가장 행복한 일이다."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지금은 107명 밖에 안 되지만 수익을 내게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수익을 낼 수 있을까. (웃음) 자극적이지도 않고 게임 방송처럼 인기가 있는 방송도 아니다. 그래도 지금보다 구독자 수가 늘어난다면 배우들의 출연료를 올려드릴 것이다. 처음에는 장소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인형의 집' 촬영장 세트가 비는 시간을 이용해 잠시 가서 녹화를 해볼까 싶기도 했는데, 출연한다고 며칠 전부터 설레서 온 친구들에게 예의가 아니겠다 싶었다. 신인일 때는 아주 작은 스케줄이라도 소중하다. 그 마음을 잘 안다. 예전에 신인 때 '할머니 안녕하세요'라는 대사를 해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대사 하나만으로 너무 설레서 잠을 못 자기도 했다. 일단 나오시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유튜브 채널 이름이 왜 '원포인트'인가?
"원포인트 레슨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만 알려준다는 의미다. 하나 이상 알려주면 과부하가 걸린다. 회사원 연기를 할 때는 복사하는 연기만 알려주면 된다. 밥 먹는 거 하나만 알려주면 된다. 우리끼리는 밥 먹는 연기 하면서 콩자반 잡지 말라고 한다. 콩자반 놓치면 주인공들 시선을 뺏을 수 있다. 잘못하면 쌍욕 먹을 수도 있고... 배우라는 직업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다. 아마 집에서 처음부터 배우를 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배우는 고생할 게 뻔한 직업이니까."

- 사실 많은 배우들이 주연을 하게 되면 이전에 자신이 했던 작은 역할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이렇게 계속 기억하는 이유가 뭔가.
"중간에 나도 잊었던 시기가 있었다. 내 자신이 잘 안다. 갑자기 아무도 못 알아보다가 상도 받고 자동차 광고 모델도 하게 됐다. 그런데 사람이 계속 상승세를 탈 수는 없다. 평지를 걸어갈 때도 있고 내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다. 난 지금껏 평평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걸어온 길이 내리막인지 오르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과거를 돌아보게 됐다. 감사하게도 상승세가 많았던 거다. 그때부터 조금 느리더라도 내가 가파르게 올라가지 않더라도 뒤를 챙겨보고 사람들과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가면 혼자 가고 멀리 가라면 같이 가라는 말이 있다. 난 배우를 멀리, 길게 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초심을 생각하게 됐다. 물론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다. 첫 마음을 늘 가질 수는 없지만 그때를 생각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이렇게 연기를 좋아하는데 10년 전에는 왜 이민까지 가려고 생각을 했나.
"이 일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한국에 있으면 계속 매달릴 것 같았다. 가족들, 주위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하더라. 일을 끊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걸 잘라버리고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전화 한 통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 한 통이 절실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오디션을 위해서 말이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이 일이 미워지려고 하더라. 너무 안 되니까.

예를 들어 너무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10년을 매달렸는데, 하루만 더 있으면 이 여자를 미워하게 될 것 같은, 사랑했던 감정마저 잃게 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10년 동안의 시간을 부정할 것 같았다. 넌 인생의 낙오자고 실패자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자마자 기회가 왔다. 하늘에서 선물을 준 게 아닐까 싶다. 요즘 들어 만약 내가 10년 전에 <하얀거탑>과 <이산>을 하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생각한다."

- 얼마 전에 <하얀거탑>이 UHD로 재방송을 했다. 보았나.
"봤다. 너무 부끄러웠다. (웃음) 첫 회 재방송할 때 (김)명민이 형이랑 전화 통화를 하면서 한참 웃었다. '대박! 우리 진짜 어렸네!' 그랬다. 그때 명민이 형 나이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리다. 명민이 형을 그때 연기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했다. (<하얀거탑> 당시) 명민이 형은 단역들이 한 장면 더 나올 수 있게 서류철을 보다가 그냥 덮지 않고 후배 배우들에게 다시 넘겨주기도 했다. 그러면 후배 배우들은 한 컷을 더 받을 수 있다. 보통 주연 배우들은 본인이 탁 덮고 만다. 본인에게 카메라가 가게 하는 방법이다.

명민이 형에게 후배들을 챙겨주는 마음, 배려심을 많이 배웠다. 얼마 전에 우연히 <우리가 만난 기적>과 <인형의 집> 일정이 겹쳐서 명민이 형을 보러 건물을 막 뛰어올라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는 거다. 형이랑 복도에서 손을 잡고 같이 걸었다. '상진아 너가 잘 돼서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 난 지금 좋은 선배님들 덕분에 잘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잃기는 쉬운데 얻기가 어렵다. 내가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배우 한상진 KBS 2TV 저녁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의 배우 한상진이 2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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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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