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6월 30일 러시아 소치 피슈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년 월드컵 16강 경기에 출전한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연합뉴스/EPA
누군가에게 등번호는 유니폼 등에 새겨진 번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슈퍼스타의 이름이 더해지면 등번호는 그 가치를 달리한다. 선수는 자신의 선호하는 등번호를 달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이에 팬들은 열광한다.
이번 유럽 여름 이적 시장을 통해 유벤투스 FC로 이적한 호날두의 상징은 '7번'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부터 레알 마드리드를 거치는 최근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7번'은 곧 호날두의 번호였다. 유벤투스에서도 '7번'을 부여받으며 상징성을 이어가게 됐다.
호날두의 등장으로 기존 유벤투스의 '7번' 후안 콰드라도는 등번호를 잃게 됐다. 콰드라도는 호날두라는 거물의 등장에 순순히 등번호를 양보했다. 단순한 양보를 넘어 자신의 SNS를 통해 "새로운 모험에 나선 그에게 신의 가호가 따르길 빈다"며 배려심 가득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축구계에서 등번호를 양보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J리그로 이적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팀 동료 미타 히로타카의 배려로 등번호 '8번'의 역사를 이어가게 됐다. 선수들 사이의 불화를 줄이고 팬들의 미소를 자아내는 축구계의 배려남들을 살펴본다.
등번호에 플러스(+)를 넣은 사모라노이반 사모라노는 등번호 양보의 역사 혹은 특이한 등번호의 계보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칠레의 전설적인 공격수 사모라노는 세비야 FC와 레알 소속으로 라리가에 큰 족적을 남기고 1996년 이탈리아 세리아A의 FC 인터밀란으로 이적을 했다.
이적 당시 사모라노의 등번호는 '9번'이었다. 1998년 여름까지 두 시즌 간 사모라노는 '9번'을 달고 이탈리아 무대를 누볐다. 하지만 이탈리아 축구의 거장 로베르토 바조가 인터밀란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당시 인터밀란의 '10번'은 브라질의 호나우두의 등번호였는데, 이탈리의 '10번'의 상징 같은 바조가 들어오면서 호나우두는 바조에게 등번호를 내줬다. 바조 등장의 연쇄작용으로 호나우두에게 '9번'을 양보해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사모라노였다. 난감해진 상황에 더불어 호나우두를 이용한 마케팅에 혈안이었던 한 스포츠 용품 업체의 압박까지 받게 됐다.
사모라노는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불쾌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그는 쿨하게 자신의 후배에게 등번호를 양보했다. 사모라노는 재치있게 상황을 풀었다. 사모라노는 '18번' 등번호 사이에 플러스(+)를 넣은 등번호, 즉 '1+8번'이라는 특이한 등번호를 달았다. 사모라노의 배려심과 특유의 재치가 빛난 유명한 사건이었다.
이탈리아의 '10번'을 포기한 델 피에로이탈리아 축구 역사에서 유벤투스는 빼놓을 수 없는 구단이다. 무수한 트로티와 팀을 거쳐간 영웅들이 이를 증명한다. 등번호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동안 유벤투스의 '10번'이 곧 아주리 군단(이탈리아 대표팀 애칭)의 '10번'일 정도로 유벤투스의 영향력을 막대했다.
반드시 유벤투스의 '10번' 선수가 이탈리아의 '10번' 등번호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유벤투스의 '10번'은 으레 국가대표팀에서도 그 번호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1990년부터 다섯 시즌 간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바조다. 바조는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10번'을 달고 존재감을 뽐냈다.
유벤투스에서 바조의 등번호를 이어받은 인물은 델 피에로. 그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10번'도 물려받았다. 하지만 델 피에로는 리그에서 보여줬던 퍼포먼스를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국가대표팀의 권력은 빠르게 AS 로마의 '10번' 프란체스코 토티로 넘어왔다.
유로 2000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토티를 중심으로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팀을 개편했다. 등번호 변경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트라파토니 감독은 델 피에로에게 '10번' 등번호를 누가 차지하면 좋겠냐고 질문을 던졌다.
팀의 중심이 토티인 것을 모를리 없는 델 피에로는 쿨하게 '10번'을 토티에게 양보했다. '10번' 대신 등번호 '7번'을 달게 된 델 피에로는 "개최국 일본에서는 7번이 행운의 번호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던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번호다"라며 의연한 반응을 보였다.
부드러운 등번호 정리로 순항할 것 같았던 이탈리아는 16강에서 한국 대표팀에게 패하며 예상보다 일찍 짐을 챙겼다. 델 피에로의 등번호는 이양받은 토티는 날카로운 플레이를 보여줬지만, 한국과 경기에서 퇴장을 당하며 불명예스러운 탈락을 경험했다.
"형들이 미뤄서..." 이영표의 월드컵 '10번' 비화앞서 소개한 두 사례가 자발적인 등번호 양보라며 이제 풀어갈 이야기는 다르다. 양보보다는 떠넘기기(?)에 가까운 등번호 배정 사건이 있었다.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우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10번'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10번'은 팀의 '에이스'이자 보통 주전 공격수를 상징하는 등번호였다. 한국 축구 '10번' 계보만 보더라도 박창선, 고정운, 최용수, 박주영 등 굵직한 이름이 즐비하다.
그런데 국내에서 열리는 특별한 월드컵에 정작 '10번'을 달고 뛴 선수는 윙백 이영표였다. 당시 대표팀에 황선홍, 최용수, 안정환이라는 거물급 공격수들이 포진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특이한 선택이었다. 심지어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차두리 등 젋은 공격 재능들도 충분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10번' 배정이었지만, 이영표는 월드컵에서 날아다니며 가치를 스스로 입증했다. 화려한 드리블과 영리한 움직임, 결정적인 크로스 두 방으로 자신이 '10번'이 된 이유를 증명했다.
이영표의 2002년 등번호의 비화는 10년이 지난 2012년에 밝혀졌다. 한 공식석상에서 이영표가 "다들 양보하고 아무도 (10번을) 달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최용수 전 FC 서울 감독은 "당시에 솔직히 10번을 누가 달겠어"라며 이영표의 등번호 '10번' 사건의 전말을 밝혔다.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등번호 '10번'을 달고 뛰는 부담감을 선배급들이 이겨내지 못한 결과 후배급이었던 이영표가 그 과업을 떠맡게 된 것이다. 2002년의 대성공을 아는 지금에야 웃을 수 있는 얘기지만, 당시 선수들이 받았을 부담감의 크기가 전해지는 에피소드기도 하다. 이유가 어찌됐든 이영표는 한국 축구 역사에서 짧지만 가장 뛰어났던 '10번'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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