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은 막을 내렸지만, 여운은 길게 남았다. 월드컵과 유로 등 내로라는 축구대회는 삼시세끼 밥 먹듯 다 챙겨 봤지만,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처럼 재미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조별 예선에서 결승전에 이르기까지, 한두 경기를 제외하고는 몇 번이고 다시 돌려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경기마다 전후반 90분을 통째로 녹화해 소장하고 싶을 정도다.

이변이 많았던 만큼 감동도 컸다. 인구 30여 만 명의 북극권 소국 아이슬란드가 영원한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와 비기고, 일본이 남미의 축구 강국 콜롬비아를 격파하고 나중에 준결승에까지 오른 벨기에와 대등한 경기를 펼친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우리가 피파랭킹 세계1위인 독일을 완파한 경기는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로 우뚝하다.

녹화해 소장하고픈 월드컵 명장면들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의 페널티킥을 현직 영화감독인 아이슬란드 골키퍼가 막아낸 뒤, 관중석에서 보여준 응원단의 일사불란한 '바이킹 박수'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감독은 치과 의사이고 수비수는 소금 공장 직원인 이 '외인구단'이 써내려간 동화는 비록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보다 더 감동적인 스토리는 월드컵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다. 축구광들에게 아이슬란드는 이미 가장 가보고싶어하는 버킷리스트가 됐다.

메시, 페널티킥 실축 아르헨티나 리오넬 메시가 16일 모스크바 스파르타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러시아월드컵 D조 아이슬란드와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뒤 아쉬워하고 있다.

▲ 메시, 페널티킥 실축 아르헨티나 리오넬 메시가 16일 모스크바 스파르타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러시아월드컵 D조 아이슬란드와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뒤 아쉬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우승 후보인 벨기에,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 편성된 파나마 선수들의 투지와 눈물 또한 잊을 수 없다. 월드컵에 처음으로 출전한 파나마는 1승은커녕 1무조차 힘들다며 32개 참가국 중 최약체로 평가된 터다. 잉글랜드에 6골이나 허용하는 등 대패했지만, 1골을 만회했을 때 감독과 선수, 관중들이 부둥켜안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월드컵 역사상 첫 골이 주는 감동이다.

 2018년 6월 18일(현지시간), 파나마와 벨기에의 러시아 월드컵 G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 벨기에의 로멜루 루카쿠 선수가 득점 후 기뻐하고 있다.

2018년 6월 18일(현지시간), 파나마와 벨기에의 러시아 월드컵 G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 벨기에의 로멜루 루카쿠 선수가 득점 후 기뻐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축구가 곧, 삶인 나라'라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맞서 주눅 들지 않고 대등한 기량을 뽐낸 이란과 모로코의 선전도 기억할 만하다. 지금도 직관한 이들은 VAR(Video Assistant Referee)과 심판의 '도움'이 없었다면 16강 진출 팀이 달라졌을 거라고 입을 모은다. '결과는 졌지만, 과정에선 이겼다'는 탈락 팀 감독과 선수들의 당당한 모습이 결코 허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2-0으로 이기는 것보다 7-0으로 지는 게 확률이 높다고 조롱당했던 독일과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 승부였다. 체력이 이미 바닥난 후반 추가 시간, 골을 위해 '빛의 속도'로 공을 향해 달려가는 손흥민 선수의 모습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패배 뒤 '그들은 간절했고, 우리는 나태했다'며 축하를 보낸 독일 감독과 선수들의 '쿨'한 모습도 인상 깊었다.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결승전이었다. 애초 친구들과의 내기에선 브라질의 우승에 걸었지만, 내심 프랑스의 우승을 바랐다. 혹 브라질과 프랑스가 결승에서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살짝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과거 '아트 사커'의 지휘자 지네딘 지단과 공격수 앙투안 그리즈만의 '사생팬'인 데다, 흑백 구분 없이 여러 나라 출신들이 섞여있는 이민자들의 팀이기 때문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 경기 7월 16일 오전 0시(한국시각) 러시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201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4-2로 이긴 프랑스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 경기 7월 16일 오전 0시(한국시각) 러시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201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4-2로 이긴 프랑스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 PENTA-연합뉴스


결승전 두 나라 선수들의 면면

익히 알려진 이야기지만, 월드컵 엔트리 23명 중 프랑스 순수 혈통은 단 2명뿐이다. 포그바와 음바페, 캉테, 마투이디, 바란, 움티티 등 주축 선수 대부분이 아프리카와 남미, 아랍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혈통과 피부색,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국가대표를 꾸리고, 세계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는 '다국적군' 프랑스를 축구팬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메시와 호날두의 계보를 이을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 19세의 축구 신동 음바페는 부모가 각각 카메룬과 알제리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유벤투스에서 맨유로 옮긴 포그바는 서아프리카 기니 출신이다. 준결승에서 결승골을 넣은 중앙 수비수 움티티는 카메룬 출신이며, 외려 드문 백인인 그리즈만은 부모가 각각 포르투갈과 독일 출신이다. 마치 출신 지역의 대표를 한 사람씩 뽑아 프랑스라는 이름으로 묶어낸 것 같다.

최근 들어 유럽 전역에서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고 극우 성향의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지만, 프랑스 축구 대표 팀에서는 정반대의 분위기다. 숱한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정책적으로 민족과 문화적 다양성을 견지해온 까닭이다.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월드컵 우승을 이룬 프랑스 축구의 수준도, 따지고 보면, '다민족, 다문화주의'가 뿌리내린 다양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축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중국, 터키와 함께 세계 3대 요리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음식 문화도, '똘레랑스'로 불리는 관용적인 사회 문화도 다양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나아가 대중교통의 파업으로 손발이 묶여도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까지도, 민족적,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프랑스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상식 무대에서 쥘리메컵을 들고 환호하는 프랑스 선수들을 보다가 제주도에서 발이 묶인 500여 명의 예멘 사람들이 떠올랐다. 야박하게도 난민을 가장해 돈벌이를 하러온 사람들일 뿐이라며 수용 불가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은 것 같다. 그들로 인해 성폭력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확산되면서 공포마저 조장되는 분위기다.

"혐오가 아니라 지지와 연대를" 12일 오후 청와대앞 분수대광장에서 '제주 예멘 난민에게 혐오가 아니라,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이주인권노동단체 기자회견'이 이주노동자공대위, 난민네트워크, 제주난민인권을위한범도민위원회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혐오가 아니라 지지와 연대를" 12일 오후 청와대앞 분수대광장에서 '제주 예멘 난민에게 혐오가 아니라,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이주인권노동단체 기자회견'이 이주노동자공대위, 난민네트워크, 제주난민인권을위한범도민위원회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마치 그들이 죄다 우리 국민의 세금을 축내고 나라에 해악을 끼칠 것처럼 말하지만, 가짜 뉴스에 부화뇌동한 억측일 뿐이다. 실제로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하며 우리 경제를 지탱해온 건 동남아와 아랍권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의 몫이 크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등 농어촌 지역에서는 이미 초중등학교에 재학 중인 다문화가정 자녀가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부러 찾아본다면 모를까, 우리는 음바페와 포그바, 캉테 등의 주축 선수들의 출신 지역에 대해서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프랑스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프랑스의 축구 선수로 기억할 뿐이다. 그들은 인종과 혈통, 출신 지역은 달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함께 부르는 어엿한 프랑스인이고, 이제는 온 프랑스 국민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결승전 보며 예멘 난민 떠올리는 이유

떠밀리듯 제주도에 온 예멘 사람들 중에도 누군가는 그들처럼 장차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입만 열면 '지구촌'을 들먹이면서, 우리는 왜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제2의 모국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지 못하는 걸까. '단일민족'이라는 용어가 교과서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인데, 우리는 여전히 그 낡은 고정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의 결승 상대는 동유럽의 크로아티아였다. 1991년 유고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신생국으로, 인구가 416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레알 마드리드 소속의 모드리치와 FC 바르셀로나 소속의 라키티치 등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이 즐비하지만, 그들의 국적인 크로아티아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축구가 아니었다면 거의 무명에 가까운 나라인 셈이다.

 2018년 7월 12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준결승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경기. 크로아티아의 마리오 만주키치가 결승골을 득점한 뒤 환호하고 있다.

2018년 7월 12일 오전 3시(한국시간) 러시아 월드컵 준결승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경기. 크로아티아의 마리오 만주키치가 결승골을 득점한 뒤 환호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그런데, 크로아티아 역시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흑인이 보이지 않을 뿐 프랑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전쟁 난민'으로 구성된 팀이라 불러도 될 만큼 선수들마다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11명의 주축 선수들 중 8명이 유고 연방의 내전을 피해 크로아티아에 정착한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월드컵 최고의 선수로 뽑힌 모드리치는 어릴 적 내전 당시 할아버지가 학살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또, 수비의 핵심 선수인 로브렌은 내전을 피해 이웃한 독일 등을 전전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경우다. 준결승까지 토너먼트 세 경기 모두 연장전까지 치르며 승리를 거둔 그들의 투혼과 가슴에 새겨진 체크 문양의 크로아티아의 국기가 큰 감동을 주는 까닭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월드컵의 결승전은 이민자 가정 출신들로 구성된 두 나라가 만났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승 후보로 꼽은 프랑스와는 달리 크로아티아의 결승 진출을 예상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견강부회일지언정 프랑스와 크로아티아의 월드컵 결승은 난민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과 미국, 그리고 제주도에 발이 묶인 예멘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아량을 촉구하는 시위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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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결승전 난민 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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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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