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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트임' 운영위원 '라라'씨가 깃발을 들고 웃고 있다.
 대구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트임' 운영위원 '라라'씨가 깃발을 들고 웃고 있다.
ⓒ 트랜스젠더부모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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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는 커밍아웃은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스물다섯 살까지만 살고 그만 살려고 했다는데..."

이야기를 꺼내던 '물'님이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말을 멈추자 옆에 있던 '겨울빛'님이 작게 웃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지월'님도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라라'님은 "우리가 이래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이제는 웃어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부모다. MTF(male to female; 남성의 신체로 태어났으나 성정체성은 여성인 사람), FTM(female to male; 여성의 신체로 태어났으나 성정체성은 남성인 사람), 무엇 하나로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은 '젠더퀴어'까지, 자녀의 정체성은 다양하다. 나이도 천차만별이다. 20대 초반의 자녀도, 30대 후반의 자녀도 있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도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르며 서로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

이들은 지난 4월 '트랜스젠더 부모모임(아래 트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트랜스젠더의 상징인 하늘색, 분홍색, 흰색이 섞인 '프라이드 플래그'로 깃발도 만들고, 대구 퀴어퍼레이드에도 참여했다. 첫 모임에는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부모 17명과 당사자 13명 등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법제화까지 꿈꾸고 있다는 트임의 운영위원 '지월', '물', '겨울빛', '라라'님을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서 만났다.

'트임' 운영위원들을 8일,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서 만났다.
 '트임' 운영위원들을 8일,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서 만났다.
ⓒ 이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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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어디로, 수술은 어떻게... 의학적 정보 물어볼 곳 없어

김승섭 교수에 따르면 한국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에 참여한 트랜스젠더 중 40% 이상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트랜스젠더에게 '자살'은 먼 얘기가 아니다. '스물다섯 살까지만 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부모들이 놀라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른 성소수자와 달리 트랜스젠더는 겉으로 봤을 때 차이가 드러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호르몬치료나 성전환수술이 필요하지만, 정보를 찾기도 어렵고 비용도 수천만 원에 이른다.

이들이 '트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단은 어디서 받는지, 수술은 어떻게 하는지 등 의료적 정보를 궁금해하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나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원래 '트랜스젠더 부모모임'은 10년 전부터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부모가 간간이 모여 고민을 나누던 자조모임이었다. 자녀의 커밍아웃을 겪은 후 당황해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트랜스젠더 부모모임을 소개받은 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원래 운영자들의 사정으로 모임이 중단되자, 트랜스젠더 모임의 필요성을 실감한 이들이 '트임'을 다시 한번 제대로 운영해보기로 결심했다.

한국에서는 원칙적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아야만 성별 정정이 가능하다. 신체적 성별이 남성인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군대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군 면제를 위해서는 고환 적출이 필요하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되돌릴 수 없는 수술이기 때문에 선뜻 선택을 내리기 쉽지 않다. 만약 이후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다르게 정체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라'는 이런 정책이 성별이분법에 갇혀 있다고 지적한다.

"성별에 남성과 여성 두 가지만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정책이 나오는 거죠. 남자가 아니야? 그럼 여자로 바꿔. 그런데 왜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요? 어떤 친구는 가슴은 없애고 싶지만, 재생산에 대한 욕구가 있어서 성기 수술을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외국에서는 실제로 트랜스젠더 부부가 결혼해서 자궁 적출을 하지 않은 FTM 트랜스젠더가 아이를 가진 경우도 있었어요. 내가 어떤 성별로 살아갈지는 내가 정해야지 국가가 강제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군대 때문에, 혹은 성별정정 때문에 지금 당장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바꿔야 한다는 게 트랜스젠더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죠."

"처음엔 레즈비언인 줄 알았는데..." 두 번의 커밍아웃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평균 나이는 12세, 커밍아웃을 하는 나이는 20.5세다. 약 8년 동안은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혼자 괴로워한다는 이야기다. '지월'의 딸은 다섯 살 때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했다. 유치원 시절 주변 친구들이 여성 남성을 이제 막 구별 짓기 시작할 때부터 자신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가 커밍아웃을 한 나이는 35세. 무려 30년 동안 부모에게 이를 말하지 않고 살아온 셈이다.

"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직장을 다녀요. 같이 살지 않으니까 더 잘 몰랐죠. 남자애가 머리도 기르고, 매니큐어 이런 것도 좋아하고, 셔츠도 보라색 이런 걸 입고 그래서 나는 '얘가 좀 요란스러운 앤가보다' 했지. 서른다섯 살에 커밍아웃을 할 줄은 몰랐어요. 삼십몇 년을 그러고 살았으니까 나는 그냥 쭉 그러고 살 줄 알았죠."

'겨울빛'은 자녀의 커밍아웃을 두 번 겪었다. 지정성별이 여성이었던 아이가 어느 날 '내가 레즈비언인 것 같다'고 고백한 것이다. 소녀시대를 유독 좋아하던 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고 혼자 찾아보더니 '내가 아무래도 트랜스젠더인 것 같다'고 다시 이야기했다. 여자를 좋아해서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스스로를 남성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빨리 깨닫거나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교육의 탓이 크다. 정규 교육에서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전 세대에 교육받은 부모들에게는 더욱 낯설다. 아버지에게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머니와 자녀가 다른 도시에 있는 병원에 진단을 받으러 가자, 아버지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이가 임신해서 중절하러 가냐'고 물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트랜스젠더가 무엇인지 제도권 교육에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다.

'물'은 아이가 커밍아웃을 할 무렵 청소년 교육을 공부하고 있었다. 아이의 무기력 때문에 말다툼하던 중에 아이가 "엄마는 전공했으니까 내가 왜 이러는지 맞춰봐!"하고 화를 냈다. '성 문제'냐고 미루어 짐작했는데, 아이가 당황하더니 트랜스젠더라고 털어놨다. 그 말을 듣고 전공책을 뒤져봤지만, '성과 사회' 교재에 아주 잠깐 언급되어 있는 게 전부였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전문가들에게조차 이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라라'는 "무게가 있는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게이 챔피언'의 존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처음 알린 존재는 하리수다. '물'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소꿉놀이를 좋아하던 아들을 보고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TV에서 하리수가 나오는 걸 봤는데 우리 아이도 혹시 '그쪽'이 아닐지 묻자 선생님은 "어머니가 너무 오버하신다"고 웃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오버'가 아니게 됐다. '물'은 "하리수라는 존재가 아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됐다"고 말한다.

대전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트임' 회원이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
 대전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트임' 회원이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
ⓒ 트랜스젠더부모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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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지션'에도 보험 적용될 때까지... 법제화 꿈꾼다

'트임'에 모인 사람들은 의학적 정보를 공유할 뿐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부모모임을 통해 트랜스젠더 당사자와 부모는 서로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이해한다.

'물'은 "부모모임을 한다고 해서 내 아이와 소통이 그렇게 잘 되기만 하는 건 아니"라며 웃었다. 부모모임에는 당사자와 그의 부모가 함께 오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부모를 이해하고 싶은 자녀와, 자녀를 이해하고 싶은 부모가 온다. '지월'은 "당사자들은 우리를 통해서 엄마 마음을 알고, 우리는 당사자들을 통해서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그렇죠"라고 말한다.

위로는 모여 희망이 됐다. 처음에는 자녀의 커밍아웃이 막막하기만 했던 이들은 이제 전문가가 다 됐다. "이번에 누가 OO병원에서 진단받는다던데" "거기 괜찮았어". 웬만한 당사자들도 모를만한 병원 이야기도 척하면 척 알아듣는다. 과거의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트임'의 문을 두드릴 당사자나 부모를 위해 상담 매뉴얼을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들은 14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서울 퀴어문화축제에도 참가한다.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좀 더 잘 보이도록, 다른 트랜스젠더 단체와 함께 모여 깃발을 들 예정이다. 부스에서는 성중립화장실에 대한 서명을 받는다. 트랜스젠더들이 당장 피부로 겪는 시급한 문제가 바로 화장실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라'는 성중립화장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상가 건물에 설치된 남녀공용 화장실을 떠올리다 보니 여성들은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아니라 여성, 남성용 화장실에 추가로 1인용 화장실을 하나 더 설치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제 시작이죠. 아직 갈 길이 멀어요."

'화장실' 같은 일상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멀리는 '트랜지션(성전환수술)'에도 보험이 적용되도록 '트랜스젠더 특별법'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이들의 꿈은 트랜스젠더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도록 한국을 보다 '트랜스젠더 프렌들리'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직은 먼 꿈이지만, 이들은 차근차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트랜스젠더 부모모임
- 트위터 : https://twitter.com/transparent_kr
- 페이스북 : 검색창에 '트랜스젠더 부모모임'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사 일정
- 서울퀴어문화축제
장소: 서울광장
시간: 11:00~19:00

- 서울퀴어퍼레이드
장소: 서울광장
시간: 16:30~17:50



태그:#트랜스젠더부모모임, #트랜스젠더, #부모모임, #성소수자, #성중립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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