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통, 혹은 권위라 불리는 것에는 신묘한 힘이 있다. 행여 그것에 생채기라도 날새라, 조그만 위협도 용납치 않으며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을 격렬히 탄압한다. 여러차례 흠집이 나고 아물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것은 더욱 더 공고해진다. 그리고 다시금 예전과 같은 모습과 그 위용을 되찾는다. 사람만 바뀔 뿐, 성은 공고하다. 굳이 여러 예를 애써 찾을 것 없이 역사적으로 늘 같은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이 글은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느낀 바를 서술하는 서평의 형식이다. 그러나 책에 대한 단순한 감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논평으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된다. 이 책 <이방인>의 출간 배경에 숨겨진 또 다른 주제의식이 전통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책 내용 외적으로, 번역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해 말이다.

프랑스 문학은 늘상 묘한 여운을 남기곤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런 연유인지 난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편'이 맞는 어법인 줄은 모르겠지만 딱 저 표현 그대로다. 카뮈의 <이방인>을 처음 읽었던 당시를 아직도 난 생생하게 기억한다. 선선한 바람 불던, 아랫집인지 옆집인지 그 출처를 알 수 없던 생선굽는 냄새가 진동했던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카뮈의 이방인에 대해 저자는 기존의 권위있는 번역자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논거를 들며 그 미묘한 번역의 오류를 비판하고 있다. 그 옳고 그름은 이 책을 통해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 카뮈의 이방인 카뮈의 이방인에 대해 저자는 기존의 권위있는 번역자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논거를 들며 그 미묘한 번역의 오류를 비판하고 있다. 그 옳고 그름은 이 책을 통해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 이의성

관련사진보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역시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편'이다. 절제된 문장 속에 숨어있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손 더듬어가며 찾아가는 재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읽은 뒤에 물 밀듯 밀려오는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좋기도 하다가도 다시 읽을라치면 손이 잘 가지않는, 그런 책이다. 그런 <이방인>을 다시 읽게 된 연유는 책을 엮은이가 당당하게 내놓은 문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소설 <이방인>이 가진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 구조 상, 다르면 얼마나 다르다고 이런 과격한 문구를 삽입했을까, 중소 출판사에서 으레 써먹는 자극적인 홍보의 일환인가 싶어 눈쌀이 찌푸려지다가도 문득 궁금해진다. 책 띠지에 넣은 문구를 책에선 어떻게 수습했을까, 얼마나 그럴싸하게 포장했을까에 대해 말이다. 길에 이어져온 전통에 흠집 내기를 시도함으로써 존재의 당위성을 찾는 건 그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느냐에 따라 갈리게 마련이다. 애시당초 그런 게 있을리 만무하다는 전제를 깔고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카뮈는 지금으로 치면 4차원적인 인간으로 평가될 수 있는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카뮈는 우리 안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했다. 불합리한 세상과 이에 맞서는 인간의 합리, 애시당초부터 우리 안의 부조리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로 대표되는 그의 철학은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이방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에게 '죽음'을 앞둔 상황이야말로 그의 '존재 가치'를 극명히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던 듯 싶다.

엄마가 죽었는데 울어야 할지, 울지 않아도 될지, 마리와 결혼을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부조리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 자신이 종일 찾고 있던 생의 의미를 죽기 전 비로소 깨달았으니, 이만하면 행복한 삶이라고 해야할지, 비극적인 삶이라고 해야할지. 왠지 소설 속 뫼르소가 어디선가 중얼댈 것만 같다. '어느쪽이든 아무렴 어떤가.'라고 말이다.

책의 이야기 구조는 간단하다 못해 단순하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낯선 이방인 같은 주인공 뫼르소, 그리고 그가 죽음에 이르는 길지 않은 여정 속에서 느낀 심경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 문제는 서두에 밝혔던 바, 그간의 번역들 상에서 발견된 오역에 대한 부분이다. 혹자는 여전히 '해석의 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로 그 부분 말이다.

나 역시 몇 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당시와 비교했을 때 이번 <이방인>을 읽으며 뭔가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소설 특유의 난해함이라 치부하며 넘어갔던 몇 가지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 난해함이 상당부분 해소됐다. 그야말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몇 년 간에 걸친 나의 지적성장이 일구어 낸 쾌거라고 봐야할까? 그러나 책에서 절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는 (논문에 가까운) 역자의 번역 노트를 보며 나의 지적인 성장이 아닌, 누군가의 치열한 사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이름난 학자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책의 옆면에서 확연히 드러나듯, 실제 이 책에서 '이방인'을 담고 있는 (하얀색)분량보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건 역자가 번역에 대해 분석한 '역자 노트'(주황색)다. 논문 수준의 근거들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책임있는 번역가의 자세가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 소설과 역자노트 책의 옆면에서 확연히 드러나듯, 실제 이 책에서 '이방인'을 담고 있는 (하얀색)분량보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건 역자가 번역에 대해 분석한 '역자 노트'(주황색)다. 논문 수준의 근거들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책임있는 번역가의 자세가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 이의성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했던 초대형 블록 버스터 영화 <어벤져스> 관련하여, 우리나라에 작은 소동이 한 차례 있었다. 다수의 초대형 외화들을 번역해온 어느 번역가의 오역에 대함이었다. 그 이전 외화들을 통해 오역과 '해석의 차이'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반복해 오다가 이번 <어벤져스>를 통해 대중들의 불만이 터지게 된 듯 보인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사 "We're in the end game now." 및 닉 퓨리 국장이 죽기 전 남긴 'mothe F...' 와 같은 대표적인 오역에 대해 당사자인 번역가는 '해석의 차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 데 그친다. 해석의 차이를 유발시키는 어떠한 근거나 본인이 해석한 번역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지 않은 채 말이다.

별일 아닌 일로 싸우던 두 하인의 이야기를 듣고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 역시 옳다."던 황희 정승의 지혜를 본받기라도 한 걸까. 자못 지혜 있는 현자의 말처럼 두리뭉실한 말만 남긴 채 다시금 입을 닫았다. 오역에 비판을 하는 사람들과 당사자인 번역가, 결국은 모두 옳았다더라는 열린 결말을 기대했던걸까. 이를 통해 그 자신이 재능있는 번역가일지는 모르지만, 책임있는 번역가는 아님이 분명해졌다.


얼마 전 개봉했을 당시 화제가 됐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엄청난 규모의 영화로도 화제가 됐던 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오역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으로도 역시 화제가 됐던 바 있다.
▲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워' 얼마 전 개봉했을 당시 화제가 됐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엄청난 규모의 영화로도 화제가 됐던 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오역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으로도 역시 화제가 됐던 바 있다.
ⓒ 이의성

관련사진보기


이 <이방인> 역시 커다란 틀에서 이와 마찬가지라고 보여진다. 카뮈의 <이방인>을 처음 번역한 권위 있는 누군가와, 그 번역이 옳은 번역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상대 진영 사이의 논쟁, 혹은 논쟁이라고도 할 수 없을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묵묵부답, 혹은 비판 아닌 원색적 비난. 이것은 카뮈라는 시대의 걸출한 소설가에 대한 예의, 그리고 그의 책을 번역했다는 막중한 책임감 모두를 져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다만 그 실수가 드러날 때가 있고 아무도 모르게 덮일 때가 있을 뿐. 우리 인간이 실수를 저지른다는 명제가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누군가의 진가를 확인 할 수 있을 때는 그 실수를 저지른 다음이다. 너무 늦지 않은 인정과 그것을 통한 정정은 오히려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한다. 이미 쌓아온 권위와 정통성이 있음에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그 사람의 권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기까지 한다.

다만 문제는, 권위를 가진 자가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 대한 원색적 비난이나, 혹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때 발생한다. 그것이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가장 빠르고 쉬운 방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 자신의 정통성에 스스로 흠집을 내게 되는 셈이니, 흠집을 통해 생긴 '의심'이라는 바이러스가 정통성을 무너뜨리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때문에 그간 쌓아온 정통성과 권위를 지키고자 한다면, 자신의 실수와 의도치 않은 오류에 대해 그 누구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꼭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번역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고민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의 의도를 흠집 하나 나지 않게 조심히 담아 여러 문화권의 독자에게 고스란히 꺼내어주는 것, 그 과정에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 의해 발생될 수밖에 없는 여지를 최소화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번역이 아닐까. 그리고 그 올바른 번역을 위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 실수 없는 번역에 앞서 타인의 견해에 늘 열려있는 마음가짐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려본다.

여전히 카뮈의 <이방인>이 난해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럼에도' <이방인>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번역은 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용한 도구가 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고 믿는다. 조금 더 효과적인 도구를 통한 저자와의 대화, 그것이 우리가 책을 통해 얻는 진정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지금에라도 <이방인>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맛보길 바란다. 조금이라도 더 올바른 번역을 위한 저자의 사투 역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이방인, #카뮈, #새움출판사, #새움, #이정서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