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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의 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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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무슨 페미니스트야?'

'페미니즘'을 말하면 '남성과 여성의 대결 구도'를 떠올리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인권이란 게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여성의 권리 보장을 주장하면 '남성이 권리를 빼앗겨 손해 보는 것 아니냐'는 식의 반응도 나온다.

남성이 페미니즘에 관해 SNS에 글을 쓰거나 매체에 기고하면 '여성이 페미니스트인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남성이 무슨 페미니스트냐'는 물음이 댓글로 돌아오기도 한다. 아마 '페미니스트'가 '남성에 적대적인 사람'이라는 식의 편견이 작용한 게 아닐까.

최근 페미니즘이 여러 매체에서 언급되고 관련 도서들도 화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이처럼 화두가 된 게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상황은 아닌 듯하다. 발생 당시엔 각각 하나의 동떨어진 사건인 것 같았는데, 돌아보면 큰 흐름이 된 일들이 지난 몇 년간 벌어졌다.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이 드러낸 불안은 시작에 불과했다.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온라인에서 시작된 성폭력 고발은 미투 운동으로 이어져 사회 각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쌓이고 쌓인 게 어느 시점에서 터져나온 셈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정말 '그저 여성만을 위한 것'일지 다시 물어봐야 할 것이다. SNS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을 언급하면 '이기적인 소리'라거나 '여성만 챙기지 말고 양성평등 챙겨야 한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 등의 말이 반박처럼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편견에 가깝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특정 대상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보편적으로 적용됨으로써 다른 약자들의 인권도 함께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종합해서 담은 책이 있다. 페미니즘이 화제가 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상황을 설명하고,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건데 남자가 무슨 페미니스트냐'라는 질문에 답을 줄 책. 현직 교사 최승범씨가 쓴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책이다.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던 교사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

강남역 2주기, 기억의 발걸음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2주기를 맞은 17일 서울 동작구 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 안에 마련된 '기억ZONE: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한 여성이 포스트잇 글들을 읽으며 피해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 강남역 2주기, 기억의 발걸음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2주기를 맞은 지난 5월 17일 서울 동작구 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 안에 마련된 '기억ZONE: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한 여성이 포스트잇 글들을 읽으며 피해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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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승범씨는 남성이자 한국 고등학교 교사다. 남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페미니즘 사고의 시작'에 관해 과거의 기억을 언급한다.
"어릴 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종이로 인형 옷 만드는 걸 좋아했지만 '계집애처럼' 논다고 어른들에게 혼나기가 일쑤였다. 공기놀이와 고무줄 놀이가 재미있었는데 친구들이 놀려서 계속할 엄두를 못 냈다. 툭하면 눈물이 났는데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말에 꺽꺽대며 울음을 참았다. 남자가 말이 많다고 핀잔을 들었고, 사내자식이 집에서 책만 본다고 걱정을 샀다. 여자애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는 적극적으로 '남자 되기'를 노력했다.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고, 친구들과 야한 비디오를 보고, 몇 번의 싸움을 하고, 걸공하게 욕도 날렸다.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는 느낌은 달콤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슷한 상황이 계속됐다. 어딜 가도 군대 문화와 폭력, 음담패설이 빠지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남자 선배들을 따라, 임용된 학교에서는 남자 교사들을 따라 여기저기 술자리에 자주 끌려다녔다. 만취하지 않고서는 진솔한 대화가, 허심탄회한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보통 초면에 나이를 묻고 형-동생, 선배-후배의 위계를 정립한 다음에야 흉금을 터놓고 상대를 대했다. 윗사람을 만나면 입과 손발이 바빴고, 아랫사람을 만나면 지갑이 분주했다. 여성의 삶도 기구하다 생각했지만 결국 저렇게 되는 남성의 삶도 이상했다. 남자들은 왜 그럴까, 늘 궁금했다." - 본문 5~6쪽 중에서

어린 시절의 일화에서 성인이 된 이후의 물음까지. 한국 사회에서 남성을 살면서 저자가 겪은 일 중 다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상식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교과서엔 유관순이 '열사'가 아니라 '누나'로 묘사되고, 가르치는 국어 과목에 인용된 작품에서도 마치 남성이 기본인 것처럼 설정된 상황과 설정이 자주 나왔다.

학생들이 보고 듣고 따라 하는 유행어엔 성희롱이나 왜곡된 인권의식이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당연히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본인 어머니의 희생을 보면서 저자는 깨닫는다. 가부장제로 인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상황, 비뚤어진 편견으로 상처받는 이가 나오는 상황은 분명 잘못됐다고.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2016년 기준 100점 만점에 25점을 받아 29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4년 연속 꼴지로, 성불평등이 심하기로 유명한 일본,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 신자인 터키보다 낮은 순위다. (중략)

운전이 미숙한 여성은 '김여사'로 조롱받지만 교통사고는 남자가 많이 낸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2010년 발표한 <남녀 교통사고 특성 비교>에 따르면 남성 100명당 1.13건, 여성 100명당 0.34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남성 운전자의 비율이 3.3배 높았다. (중략) 2014년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 남성은 하루 45분의 가사노동을 한다. 한국 여성이 매일 할애하는 227분의 2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 시간이다. 같은 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가사분담률은 16.5퍼센트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 본문 95~96쪽 중에서

저자 최승범씨가 자신의 자리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은 '페미니즘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기 위한다는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의 교육이념에 따라, 수업 시간에 성평등에 관한 토론과 대화를 적절하게 진행했다는 것이다.

"침묵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중략)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교사였고 내게는 800명의 남학생이 있었다. 이들이 기성세대 남성과는 다르게 자랄 수 있다면, 눈과 귀와 가슴을 열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그보다 보람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본문 107쪽 중에서

페미니즘은 여성이 당사자, 하지만... '남자가 바뀌어야 새로운 날 온다'

'촛불 혁명 이후의 시대 정신'으로 약자의 목소리를 듣자고 말하고, 그런 의미에서 성평등 수업이 필요성을 언급하는 교사. 수업을 직접 들은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책 본문에 따르면, 학생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의견도 많이 나왔지만, 교원 평가 주관식 설문에 "여자 편을 너무 많이 들어서 가끔 기분 나쁨"이라는 응답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 내용을 보면, 저자의 페미니즘 수업이 딱히 '여성 편드는 일'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며 늘 강해야 한다'는 인식이나 가부장의 의무 등 성역할의 틀에서 남성의 숨통도 틔워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건강한 사회는 남의 아픔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다"라고 쓰면서 페미니즘이 더 많은 주체에게 큰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이 특정 집단의 이득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과연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가능할까? 혹은 남성이 페미니스트로서 발언하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에 관해 저자가 내놓은 의견은 꽤 흥미롭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스스로 자신을 여성의 '협력자'로 정체화하고 남초 사회에서 발언할 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책의 내용처럼, 통계를 기반으로 한 여러 지표를 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기득권이다. 저자는 남성들에게 불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쥐고 있는 것들을 조금 내려놓자고 책에서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당사자인 운동이지만, '남자가 바뀌어야 새로운 날이 빨리 온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다시 글의 첫 부분에서 던진 물음을 살펴보자. '남자가 무슨 페미니스트냐'라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사람이라면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를 권하고 싶다.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을 대결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기 쉽게 책 속의 내용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오늘날 젠더 문제가 던지는 시사점과 함께 말이다. 더불어 저자가 남성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치며 체험한 일들은 기성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2018년이 된 현재 페미니즘은 출판계와 방송, 정치와 예술계까지 분야를 넘어 피할 수 없는 파도가 됐다. 이제 성희롱이 섞인 농담이나 특정인을 대상화하는 말 따위를 전처럼 쉽게 소비할 수 없다. 이런 변화의 바람 때문에, 페미니즘이 파도처럼 지나간 이후에 이전처럼 '그냥 웃고 넘어가던'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누군가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말과 행동이 불편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사회적인 분위기는 변해갈 것이다.

2018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남성이라면, 변화의 시기에 발맞춰 책 제목처럼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이미 남성 페미니스트의 길을 걷는 이의 발자취가 좋은 조언이 되어줄 것이다. 기존의 성역할과 편견에 답답함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미투, 미드유.
 #미투, 미드유.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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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최승범 씀/ 생각의힘 펴냄/ 2017.4.13/ 1만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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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출판 담당 기자로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ohmybook201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