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 영화 포스터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 영화 포스터 ⓒ 넷플릭스


어떤 영화가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원작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이때 두 의견이 나온다. 원작을 보아야만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원작을 볼 필요 없다는 의견. 이 의견은 이렇게 두 가지로 확대할 수 있다. 원작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 원작은 원석처럼 다른 형태로 가공될 수 있다는 의견.

양쪽 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 둘 다 취할 수 있다면 무척 이상적일 테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원작을 변형하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영화화 과정에서 위의 의견 중 후자를 택하게 된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영화화의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 영화화란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법이 있듯 영화에서는 영화의 법도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법도란 무엇일까?

영화화의 개념

영화는 기본적으로 '소설'에 '사진'이 합쳐진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초기 영화는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매체가 회화-문학-만화-사진-영화를 거쳐 발달한 것을 떠올려 볼 때, 영화는 그전의 발달 과정을 모두 포괄한다. 즉, 영화는 소설처럼 이야기가 있고 회화처럼 시적이기도 하며 사진처럼 순간포착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화라는 것은 '원작이 영화가 되기 위해 부족한 점을 덧붙이는 과정'이다.

소설의 영화화는 이미지를 그려내야 하고 사진의 영화화는 움직임에 이상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과 사진의 중간에 있는 만화는 영화가 되기 위해 무엇을 덧붙여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만화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 상상력을 어느 정도 덜어내야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성이라고 부른다. 

현실성은 우리가 작품에 이입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현실성은 '현실에 있을 수 있는가'를 뜻하는 게 아니다. '내가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는가'를 뜻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장면을 떠올려 보곤 한다. 영화관에서는 영상미에 흠뻑 취하곤 한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은 '내가' 떠올리는 장면이다. 영화는 '감독이' 떠올리는 장면이다. 그래서 두 매체는 능동성과 피동성이라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면, 소설의 지문을 영상 언어로 번안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말하자면, 소설의 능동성이 영화의 피동성으로 바뀌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기주도에서 타인주도로 바뀌는 것을 달가워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원작의 팬 중에는, 영화화된 작품이 원작과는 다르게 내 뜻대로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발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상상하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했다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아주 적절한 예다. 두 작품은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랐으며, 어떤 면에서는 원작을 초월하기도 했다. 결국, 중요한 건 작품의 완성도다. 원작의 팬이라도 영화 완성도가 떨어지면 그 영화를 '없던 일'로 취급하기 일쑤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자책하는 <그린 랜턴 : 반지의 선택>을 떠올려보자.

멋들어진 각색

 영화 <타짜>의 작품 포스터

영화 <타짜>의 작품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완성도라는 개념 자체는 포괄적이므로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오밀조밀한 짜임새가 있다' 정도로 정리하도록 하자. 이쯤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짜임새를 맞추느라 원작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지면, 원작이란 게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바로 각색이다. 이를테면 <타짜>나 <올드보이>도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지만 원작과는 영 거리가 멀다. 작품의 소재만 따왔을 뿐, 주제의식이나 이야기 전개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한 경우다. 원작을 변형한다는 점에서 원작 팬의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원작을 '보여주는' 것에 그칠 경우, 원작 팬이 아니라면 영화를 관람하기 꺼려질 것이다. 한정된 시간에서 많은 걸 전달해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메시지 함축은 불가결하다. 결국 원작이 잘 되려면 멋들어진 각색을 해야만 한다.

이때, 혹자는 만화의 영화화는 이미 구현된 걸 동일하게 재현하기만 하면 되니 무척 쉬운 게 아니냐 묻기도 한다. 하지만 '동일하게'는 무척 어려운 단어다. 애초에 매체가 다르니 '동일하게'가 아니라 '비슷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예를 들어, 만화가 영화가 된다는 건 2D가 3D가 된다는 뜻이다. '입체'를 담당하는 'Z'축이 추가되므로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아진다.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2D 프린터와 3D 프린터는 다르다. 2D 프린터는 사진을 인쇄하지만 3D 프린터는 사진이 아니라 모형을 뽑아낸다. 쉽게 말해,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만화는 연출을 위해 실제 세계의 비례를 무시하는 게 태반이므로, 만화를 영화화할 땐 무척 신중해야 한다. 이를테면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 영화를 떠올려 보자. 원작을 그대로 재현했더니 오히려 불쾌해졌다. 원작의 팬을 존중한다며 '재현'했더니 오히려 팬들에게 외면받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 완성도와는 별개의 문제다.

 영화 <그린 랜턴 : 반지의 선택>의 한 장면

영화 <그린 랜턴 : 반지의 선택>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반대로, <공각기동대> 실사 영화는 원작 이미지의 변형을 통해 나름의 영화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분명 이 작품은 완성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품을 향한 비판 대부분은 원작에 깃든 철학을 성공적으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즉, 영화가 원작의 미래도시를 멋지게 재구성했다는 점만은 동의했다. 할리우드라는 시장 특성상 원작보다 대중에게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야 했음을 고려해볼 때, 아쉬움은 남아도 이해는 간다. 

글을 마치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작을 좋은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현실성은 관객이 작품을 얼마나 주도할 수 있느냐를 뜻한다. 이때 만화와 영화의 관객이 요구하는 게 다르므로 이야기는 다시 쓰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각색이다. 결국 원작의 영화화란 각색과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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