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각 많은 사람과 대화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번다하고 피로하다. 단순한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유쾌하되 이내 지루하다. 그래서 이야기꾼은 프로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며, 복잡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경계의 줄타기에 능하다. 재미를 추구하되 함몰되지 않으며, 교훈을 찾되 '엄근진(엄숙·근엄·진지의 줄임말)'과 거리를 둔다.

영화의 서사(敍事)도 같은 틀을 가진다. '시간 죽이는' 오락 일변도의 영화가 아니라면 시나리오 작가는 교훈과 재미의 두 마리 토끼를 쫓기 마련이다. 새털처럼 가벼운 세태라지만 이런 고전적인 미학은 아직도 힘이 있다. 이창동처럼 인간 내면의 심연을 찾으면서 동시에 그것과 세상을 연관 지으려는 감독은 선택지가 별로 없다.

개봉하기 전부터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은 영화 <버닝>이 6월 들어 종영(終映)의 길을 가고 있다. 영화 비평가들은 하나같이 호평했지만, 현장 대중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것이 <어벤져스> 같은 마블 영화 탓이든, 계절적 요인 탓이든 <버닝> 상영관은 썰렁하다. 누군가는 <버닝>이 '칸영화제'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것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버닝>은 148분 상영시간 내내 서사의 힘을 유지한다. 2018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객석을 휘어잡는다. 그것은 탁월한 이야기꾼 이창동의 힘이기도 하고, 색감과 상징이 차고 넘치는 영화의 힘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객석은 자상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감독의 영화가 싫은 청춘들의 고단한 일상 때문 아닐까.

단절과 연대

 < 버닝 > 스틸컷.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정쩡한 종수(유아인 역)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조하고있다.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배달 알바생 종수가 등짐 지고 길을 간다. 영사기는 종수(유아인 분)의 뒤를 따르면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군상(群像)의 걸음걸이와 표정을 잡아낸다.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종수의 발걸음이 위태롭게 휘청댄다. 그가 도달한 목적지에는 행사 도우미 두 사람이 몸을 흔들고 있다. 때마침 진행되는 경품행사에서 종수는 여성용 시계를 얻는다.

"야, 이종수! 너, 나 몰라?! 나, 해미야, 해미! 파주에서 같이 살았던!..."

그렇게 청춘남녀는 거리에서 해후한다. 종수가 어린 시절 함께 보냈던 해미(전종서 분)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성형'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지난 행적과 사연을 알지 못한다. 스쳐 지나가듯 전해지는 말이나 그들의 거주공간으로 넘겨짚을 따름이다. 500만 원 카드빚이 있는 해미나, 이런저런 알바를 전전하는 종수의 삶은 뿌리 뽑힌 듯하다.

괴팍한 성격의 아버지와 가출한 어머니, 결혼하여 애도 있다는 누나를 가진 종수. 카드빚을 청산하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모친과 언니를 둔 해미. 그들이 해후 첫날 자연스럽게 엮이는 데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미가 통보하는 아프리카 여행은 뜻밖이다. 없는 돈을 모아 케냐의 일몰을 보고 오는 해미.

 버닝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종수와 해미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벤(스티븐 연 분). 그것은 종수의 낡은 포터와 벤이 몰고 다니는 포르쉐로 선명하게 구현된다. 종수와 동질성을 느끼지만 해미는 시종 벤과 엮인다. 해미와 종수의 연대도, 벤과 해미의 관계도, 그들 관계를 질투하는 종수의 내면도 견고하지 않다. 그것은 이 시대 청춘들이 살아나가는 양상이자 서사의 기초다.

노동과 유희

예닐곱 살 나이 차이가 있는 종수와 벤은 해미를 사이에 두고 대화한다. 포터와 포르쉐 차이만큼 노동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거리가 멀다.

"특별하게 하는 일은 없어요. 요즘엔 일하는 것과 노는 것 차이가 없잖아요."

벤은 하는 일도, 딱히 하려는 일도 없어 보인다. 무직의 그에게 수치심이나 부담감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그의 화려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돈의 출처를 모른다. 물속의 고기처럼 자유롭게 벤은 주어진 삶을 향수(享受)한다. 벤은 지금껏 슬픔을 느낀 적도 눈물을 흘린 일도 없다고 한다. 빗물처럼 판단하지 않으며 가슴의 충만을 방침으로 살아가는 벤.

 버닝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문창과 출신으로 소설을 쓰려는 종수는 언제나 육체노동에 내몰려 있다. 그의 글쓰기는 재판 중인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작성하는 장면으로 국한된다. 종수는 해미의 옥탑방 원룸에서도 글을 쓰지만, 그것이 소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포크너의 소설에서 자신을 찾고 있지만, 종수의 글쓰기는 그의 일상과 행장만큼이나 혼란스럽다.

육체노동으로 먹고 살아왔지만 해미는 언제부턴가 일하지 않는다. 벤 옆에 서성대면서 그가 던져주는 것으로 끼니를 잇는다. 케냐의 황량한 주차장에서 본 부시맨의 춤사위를 시연하면서 해미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차이를 말한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고픈 사람이지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이에요. 나는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어요."

흐르는 강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바람처럼 자신의 의미와 자취를 남기지 않고 해미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 한다. 그녀를 길러온 시공간과 인과율과 절연(絶緣)하고 작별하려 한다. 마치 낡은 헛간이나 쓸모없는 비닐하우스처럼 태워져도 무방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해미는 세상 모든 것이 춤이나 유희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격절(隔絶)된 공간과 관계

영화는 종수가 사는 파주와 해미가 사는 후암동, 벤의 집이 있는 강남 반포를 번갈아 보여준다. 아버지의 부재로 고향에 돌아오는 종수.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려오는 파주. 아프리카로 가기 전에 해미가 머물렀던 후암동 원룸.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에 반사된 빛이 잠시 찾아오는 공간. 세련된 호텔 방을 연상시키는 벤의 거주지. 한반도처럼 분단되고 격절된 공간들의 연속.

해미의 방에서 종수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자위(自慰)한다. 콘돔도 낯설었던 그의 반복되는 배설에는 고통과 고독이 함께한다. 그것은 첫 번째 만난 날 하나가 되었지만 따로였던 둘의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음을 뜻한다. 하룻밤 사랑에 익숙한 해미와 그녀의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잇단 실종과 부재로 덜거덕거리는 종수의 영혼과 육신.

해 질 녘 종수의 집을 찾아온 두 사람. 그들이 대마초를 피우면서 먼 곳으로 떠나려던 때 해미가 춤추기 시작한다. 케냐에서 보았던 저녁 노을의 분광(分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다시 보라색에서 남색으로 변하여 이윽고 그마저 사라져 어둠만이 사위(四圍)를 채운다. 변화의 종말이 암흑과 대면하는 상징적인 장면.

경찰차가 일정한 간격으로 순찰하는 정갈하고 화사한 반포의 빌라촌. 거기서 '일회용 여인'을 정성스럽게 화장해주는 벤. 해미로 인해 그곳을 찾은 종수는 벤의 화장실에서 뜻대로 배설하지 못한다. 문득 열어본 장에 담긴 목걸이와 머리 묶는 줄과 시계, 여성용 화장품이 빼곡하게 들어있는 벤의 손가방을 봤기 때문이다. 종수의 몸과 발걸음이 사뭇 흔들린다.

진실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해미가 잠든 사이에 종수는 벤에게 사랑에 관해 말한다. 해미를 사랑한다는 종수의 말에 벤은 마치 나무라듯 시큰둥하다. 그의 오롯한 관심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더럽고 외떨어진 비닐하우스를 골라 태운다는 벤. 경찰도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벤. 파주에서 태울 비닐하우스를 물색하러 왔다는 벤.

해미는 옛날 살았던 파주의 집 옆에 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거기 빠져서 오래도록 울고 있을 때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종수였다는 게다. 하지만 종수는 종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해미의 가족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른 우물을 16년 전 가출한 종수 모친이 기억해낸다. 누구의 기억이 맞는 것일까. 여기서 영화는 <라쇼몽>(1950)과 잠시 만난다.

연락이 끊긴 해미를 찾아온 종수. 그를 기다리는 것은 말끔하게 정돈된 해미의 방이었다. 언제나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던 해미의 방. 그가 주곤 했던 고양이 사료도, 고양이 화장실도 사라지고 없다. 그러하되 창밖 너머 남산타워는 여전히 말끔한 빛을 던지고 있다. 머릿속이 허옇게 되도록 망연해지는 종수. 여기서 우리는 해미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야 한다.

"중학교 때 네가 말했어. 너, 정말 못생겼다고. 자, 이제 진실을 말해봐."

성형한 해미는 예뻐졌을까. 정말 과거 종수는 해미에게 못 생겼다고 말했을까. 우물과 고양이는 실제로 있었을까. 종수에게 마지막으로 전화한 해미는 어디로 갔을까. 그레이트 헝거를 찾아 제 발로 떠난 것일까. 아니면 종수의 의혹이나 방화가 정당한 것일까.

우리가 습관처럼 말하는 진실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과거의 진실은 변함없이 오늘도 진실하며, 그것은 미래에도 진실할 것인가? 고요 속에서 비닐하우스를 활활 태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버닝>은 숱한 질문을 던지며 객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영화 <버닝>의 포스터

영화 <버닝>의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이창동 버닝 칸영화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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