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 (주)연극열전


[기사 수정 : 25일 오전 9시 53분]

"당신은 지금 희생자를 처형 중이에요. 심장에 총을 쏴요, 빠르고 정확하게, 그럼 일 점. 배에 총알을 박아 천천히 죽이면? 백 점. 머리에 비닐 봉투를 씌워서 질식사시키는 동안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씩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망치질을 해요. 그럼 천 점!"

여기,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일으킨 게임이 있다. 이름하여, 킬롤로지. 이 게임은 온라인에서 가상의 인물을 살해하는 게임으로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에게 높은 점수가 주어진다. 희생자는 처형을 당하는 동안 피가 범벅이 된 몸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때 유저들은 이 끔찍한 장면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 감점되니까.

연극은 데이비가 살해당한 시점에서, 알란이 폴의 집에 잠입하면서 시작한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무대의 다른 편에서 데이비와 폴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데이비는 16살에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다가 후방에서 달려오는 승용차의 운전자와 승객들에게 게임 '킬롤로지'와 같은 방법으로 무참히 살해당한다. 알란은 데이비 죽음의 일차적 원인을 '게임'에서 찾고, 게임 개발자 폴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이렇듯 <킬롤로지>는 한 소년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특이한 점은 작품 속 대부분의 서사가 인물 간 발언권을 주고받으면서 독백으로 서술된다는 점이다.

독백은 관객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연극 요소이다. 어떤 무대장치도 없이 오로지 배우의 입만을 통해 전달되는 대사는 가장 '날 것'에 닿아있다. 우르르 쏟아지는 방대한 양의 텍스트는 의존할 것이 대사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객들을 더욱 몰입하게 한다. 이렇듯 치밀하게 짜인진 독백이 매력적인 연극 <킬롤로지>.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쉬움도 있다.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3인의 서사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 (주)연극열전


<킬롤로지>의 3인은 각기 다른 서사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주제를 말한다. 데이비는 그 죽음으로써 미디어의 폭력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는 부모가 부재한 환경에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는 청소년을 그린다. 알란은 데이비의 독백 속에서 무책임한 아버지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허나, 그는 아들의 복수를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시행했다는 점에서 부정(父情)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폴은 억압된 가정환경 아래 소시오패스적 인물로 자라난다. 알란 부자에게 폴은 악인으로 그려지지만, 그의 가정환경은 관객으로 하여금 동정심이 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3인의 서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 한 데 뭉쳐지지 않는다. 마치 무대에서 분리된 존재들처럼.

환경은 다르지만, 데이비와 폴은 부적합한 부모 역할이 개인의 성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나타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폴은 미디어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이 극은 그 또한 기형적인 가정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의 임종 앞에 무리하게 연명치료를 시도하는 그는 모순된 가정교육의 결과로 일종의 파더콘을 호소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점은 데이비 죽음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린 폴이 캠핑 간 날의 일화나 이집트 여행 일화는 두 사람이 너무도 다른 사람임을 입증하는 도구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폴은 아버지를 만족시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더 높은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폴 또한 제대로 된 아버지의 사랑은 받지 못하고 자랐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폴의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오롯이 그릇된 가정환경으로부터 탄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범죄자의 가정환경이 그 범죄에 합리성을 부여하지 않듯, 가정환경이 절대적인 이유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 우리는 폴의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윤리적으로 문제 삼아야 할까. 이 또 하나의 물음에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 혼란은 데이비가 죽음으로써 던진, 게임의 폭력성과 모방범죄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를 까맣게 잊게 한다.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 (주)연극열전


알란은 극 중 가장 이중적인 인물이다. 데이비가 묘사하는 아버지는 생후 18개월 된 아이를 아내 손에 떠맡기고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난 작자이다. 그는 심지어 아들의 죽음마저 렌달 패거리와 같은 양아치들의 폭력과 광기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한다. 알란은 가정을 돌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데이비를 18개월 때, 아홉 살이 되던 해 생일, 장례식에서 영정 사진으로 총 세 차례 마주했다. 고로 데이비의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은 아홉 살에 본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는 아버지를 따라나서기를 자처했다. 아버지와 살고 싶다고. 하지만 알란은 또다시 데이비를 어머니 곁에 버려둔다.

알란은 데이비의 아홉 살 생일에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한다. 당시 데이비가 필요했던 것은 고작 소풍 갈 5파운드,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을 때 간식거리로 제공할 만한 소시지 2개 따위였는데도 말이다. 데이비가 그 강아지의 이름을 메이시라고 붙이고 메이시와 꽤나 좋은 추억을 쌓았던 것은 맞지만, 이는 실로 데이비의 가정환경은 묵살해버린 처사였다. 당시 데이비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라고 있었고 아무리 알란이 데이비를 직접적으로 보진 않았더라도, 그의 가정환경 정도는 지레짐작할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알란이 데이비에게 강아지를 선물함으로써 그의 행동은 생활고에 또 다른 생활고를 얹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알란은 아들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하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이다. 그는 슬픔에 그치지 않고 폴에 대한 살인계획을 꿈꾸고, 계획하며, 실행한다. 윤리적으로 어긋나긴 하였지만, 어쨌거나 알란이 부정(父情)을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맥락이다. 그리고 살해 행위 중 "이 개자식의 부모도 이 개자식을 사랑하겠지"라는 대사로부터 '그렇다면 그 부모도 나처럼 슬플 거야'라는 논법으로 귀결되어 알런이 살인을 멈추는 행위는 알란이 극 중 부정(父情)을 그리는 인물임을 좀 더 명확하게 되짚어준다.

이 일련의 흐름은 알란이 데이비를 돌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고, 그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정(극 중에서 그는 블루칼라로 묘사된다. 노동자 계급의 생계를 떠올렸을 때, 그는 데이비에게 유복한 가정을 제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필자는 알란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두려워했을 것 같다)이 있었을 것이라고 변명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표현되는 것만이 아버지의 사랑인가. 그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데이비가 부모의 부재로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다가 무참히 살해당했다는 비극은 옅어진다.

그 자리에 모정(母情)은 없었나

극 중 여성을 서술하는 방식 또한 실망스럽다. 데이비의 어머니인 캐롤은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알란과 이혼 후 데이비의 유일한 양육자로서 그녀가 '워킹맘'일 것이라는 점을 관객들은 지레 짐작할 수 있다.

 연극 <킬롤로지> 공연 사진. 아버지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폴(김승대).

연극 <킬롤로지> 공연 사진. 아버지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폴(김승대). ⓒ (주)연극열전


하지만 이것은 짐작에 불과할 뿐,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캐롤은 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 전적으로 데이비나 알란의 독백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데이비는 그녀를 "나를 거리로 내모는 어머니"라고 말할 뿐이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것은 관객들에게 캐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모진 어머니였다는 오해를 사게끔 할 수도 있는 처사이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캐롤이 아들에게 무관심한 어머니였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데이비의 죽음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무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알란과 캐롤이 다른 점은, 알란은 직접 무대에 등장해 아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최소한 변명이라도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캐롤에게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변명조차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알란의 독백에서 "그녀와 나는 장례식이 끝난 후 바에서 몇 잔을 마시다가 방을 잡았고, 침대로 함께 쓰러졌다"고 그 슬픔만이 짤막하게 서술될 뿐이다. 그녀가 왜 아들에게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건 당일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었는지, 아들의 죽음에 양육자였던 자신이 얼마나 죄책감에 사무치는지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조차 없다. 결국 캐롤은 데이비를 더욱 비극적으로 그리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이는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서사라고 볼 수 있다. 부정(父情)을 다루려고 했다면, 모정(母情)도 다뤘어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데이비의 양육자는 어머니 아니었던가. 부정(父情)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긴 시간동안, 모정(母情)에 대해서는 한 줄 언급조차 없던 것이 이 극에서 또 하나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연결고리의 부재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 (주)연극열전


이 극은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첫 번째는 '미디어'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미디어와 아버지라는 소재의 조합이 신박할 수는 있겠다. 다만,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잘 이루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그나마 데이비가 겪는 사건이나 그의 독백에서 이 두 개 소재는 제법 잘 엮인 모양새였다(폴이 게임을 묘사하는 대사에서 자극적인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게임의 폭력성이 더욱 우세하게 다뤄지는 것 같긴 했지만). 하지만, 데이비가 죽은 후 알란이 정신병동에 감금되는 시점을 기점으로 미디어의 폭력성에 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이 지워지고 극은 '아버지'만을 말할 뿐이다. 아버지의 참된 역할에 대해서. 이는 하나의 극이 마치 두 개로 나뉜 것과 같은 사이드 이펙트를 일으켰다.

알란이 폴의 집에 잠입하였을 때, 둘 간에는 게임의 존폐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폴이 킬롤로지를 폐지하기로 약속하긴 했지만, 이후 폴은 여전히 게임회사의 대표이사 직책을 맡는다. 여기에서 관객들은 폴이 진짜로 킬롤로지를 폐지하고 다른 게임을 개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인지, 그 약속이 당장 죽음의 위협을 느껴서 한 거짓말이었는지, 그래서 킬롤로지는 계속된 것인지에 관해 알 수가 없다. 킬롤로지가 계속되었어도 문제고 아니었어도 문제다. 전자라면 킬롤로지가 계속해서 존재함에도 극 안에서 미디어의 폭력성에 관한 이야기가 지워진 것에 문제가 있고, 후자라면 폴이 알란을 가격하는 행위에서 실제로 사람을 때리는 것에 흥미를 느꼈음에도 이것이 킬롤로지가 더욱 잔인한 게임으로 거듭되었다는 것을 말하기보다, 단지 폴이 소시오패스적 인물임을 말하는 '설명충'적인 서술에 불과했다는 점에 그 문제가 있다.

어쨌거나 극 안에서 킬롤로지는 행방불명 된 채 그 종적을 감췄다. 따라서 폴은 더 이상 잔인한 게임의 창시자가 아니게 되었다. 대신, 극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에게 독설을 퍼붓는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임종 직전에 놓인 그의 연명치료를 위해 애쓰는 가여운 사람으로 그려진다. 알란은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데이비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에 대한 상상을 한다. 알란의 환상 속 데이비는 병원에서 근무하며 우연히 만난 아버지를 자신의 집에서 임종까지 극진히 보살핀다. 이는 현실과는 다른, 상냥한 모습이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알란은 상상 속의 데이비를 보며 생각한다. "내가 손을 잡아줬더라면 그 아이가 될 수도 있었던 모습"이라고.

이 갑작스러운 인물들의 변화는 전반부와 후반부 둘로 나뉘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결국 '시뮬레이션의 잔혹함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라는 화두는 찝찝하게 남은 채 관객들은 다른 주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지난 4월 26일 개막하여 현재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트원 씨어터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킬롤로지>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연극 <킬롤로지>는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 미디어의 폭력성, 가정 내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 (주)연극열전


별은 각자의 자리에서 반짝이지만, 밤하늘이라는 공간에서 그 빛들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폴이 캠핑 간 날 밤하늘이 그러했을 것이고, 데이비가 자전거로 도로를 질주하던 날 밤하늘이 그러했을 것이다. <킬롤로지>라는 밤하늘에 별들은 반짝였지만, 그 별들이 어우러지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가 다시 <킬롤로지> 쪽 밤하늘을 본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아름답길 바란다.

연극 킬롤로지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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