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몇 년간 딱 한 가지에 욕심을 부리고 살아왔다. 다른 모든 걸 차치하고 무엇이 되었건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힘겹지 않게 살아가는 것. 높은 연봉과 지위, 그리고 폭 넓은 사회활동과 인간관계에 대한 욕구를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미미한 성과만을 안겨준 채 참 이루기 녹록지 않은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나는 수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했다. 다른 욕심 부리지 않고 하나만 원하는데 왜 나에겐 '이것' 하나가 주어지지 않는 걸까. 그런 내게 영화 <소공녀>는 그 대답을 안고 다가왔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착한 여자다. 능력은 없지만 가정부라는 자신의 일도 잘 해내고 자신보다 아프고 힘든 사람을 도와주려 하며 남의 것을 탐하거나 누구를 탓하지도 않는다. 특별한 꿈이나 욕심 같은 것이 없고 그저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남자 친구뿐이었다(아, 덤으로 백발 억제 한약이 있다). 제도권 밖에 있어 그 혜택을 누리지는 못하나 누구 눈치 볼 일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만족을 영위해가는 자유로운 삶, 나름대로 좋아보였다. 성경의 곳곳에 나와 있는 욕심 없는 삶의 영화 속 실현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스키 값도 오르고 담배 값도 오르고 남자 친구는 떠나가자 미소의 '이것'은 위기에 봉착한다. 남자친구가 떠나가는 건 자신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일, 그렇다면 남은 건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흑발 유지용 한약인데 그녀는 그것들을 위해 집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사실 이 부분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집이 아닌 기호품을 택했다는 것이 현실성이 없는 얘기이고 가사 도우미 월급이 방세 하나 내지 못할 만큼 적지도 않다).

미소의 담배와 위스키를 지키기 위해서는 담배 값과 위스키 값 외에 여분의 저축인 '저것'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더 많은 돈이 있었다면 어쩌면 남자친구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순간 나는 정곡이 찔린 듯 가슴 속이 싸해졌다. 어쩌면 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척 한 불편한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것'만을 원해 '이것'만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것'도 필요하고 또 다른 무엇들도 필요한 것임을 아프게 깨달았다.

글을 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해야 하는 작업이라지만 직장 생활을 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더 있었다면 일찌감치 교육기관을 찾아 더 빨리 글의 맥을 찾았을 테고,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면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생활해 조금은 덜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지내지 않아도 됐을는지 모른다.

그렇지 못한 지난한 시간 속의 연소는 내게 이것 아닌 '저것'에 대한 갈망을 애초부터 차단한다.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인 연소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나이가 더 들고 경력이 단절되어 직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이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저것'을 찾을 수 없는 여자를 영화 속에서 발견해냈다.

 <죽여주는 여자>

<죽여주는 여자> ⓒ CGV아트하우스


<죽여주는 여자>의 소영(윤여정 분)은 65세 박카스 아줌마다. 소영은 한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먹고사는 일이니 자신의 일이 부끄럽지 않다. 그녀의 '이것'은 먹고 사는 것 하나. '이것'만을 원한 그녀의 삶은 고독과 빈한함으로 근근이 흘러가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그리고 그 삶은 때론 누군가에겐 보살핌으로 누군가에겐 쾌락으로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아 주기도 한다.

그런 그녀의 삶에도 위기가 닥치고 만다. 자꾸만 그녀를 찾아와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만 가진 사람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인지 원. 처음엔 이 당황스러운 제안에 고개를 내젓던 소영은 그들의 간절한 심정에 감화되어 그들을 진짜로 죽여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만다.

'이것'만 바란 그녀 역시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나쁜 일에 연루되면 눈에 불을 켜고 그녀를 대신해 대항해줄 가족이나 박카스 아줌마로 살지 않아도 될 건강이나 여분의 돈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 아닌 '저것'의 부재, 하지만 늙고 쇠락한 그녀는 이제 '저것'을 찾아 분투할 수도 없다.

미소와 소영의 결말은 스포일링을 피하기 위해 상상에 맡기겠다. 나의 결말을 얘기하자면 흘깃 바라보며 가능성을 타진했던 '저것'에서 시선을 돌려 위태로운 '이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든 성장시켜 그 바탕으로 '저것'과 또 다른 것들을 만들어 가려 한다. 이젠 그 방법 밖에 남아있지 않은 듯 하고 또 기꺼이 그러고 싶다.

하지만 예상되는 그 과정의 고단함 때문일까. 이런 푸념이 든다. '이것'만 가지려는, 혹은 갖고 있어도 힘겹지 않을 수는 없나? 꼭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많은 걸 가지려 분투해야 하나? 많은 것을 이루고 가지며 화려하거나 풍요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대로, 또 작은 것을 원하고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그런대로 즐거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소공녀 죽여주는 여자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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