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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한 지사 묘소 앞 표지석
 김충한 지사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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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국립묘지로 승격된 대구 신암선열공원을 찾아 김충한, 방한상, 신재모, 정상득, 김점학 다섯 분 독립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김충한 지사는 김천 만세운동, 방한상 지사와 신재모 지사는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항일 운동, 정상득 지사는 산남의진 의병, 김점학 지사는 일본 유학 중 퇴학당한 후 국내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투사이다.

김충한(金忠漢) 지사는 1883년 10월 24일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1965년 12월 30일 별세했다. 김천교회(현 황금동 교회) 목사였던 지사는 1919년 3월 11일의 김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그는 3월 초순 서울과 평양 등지로 여행하던 중 독립만세시위를 목격했고, 그 후 김천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지사는 대구 3월 8일 학생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주도한 후 김천에 내려온 계성중학교 김수길을 만나 대구의 운동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함께 김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기로 결의한 후 교회 장로 최용수·한명수 등과 실행 방법을 논의했다. 이튿날 밤 김충한 지사는 다시 교회에서 김수길·최용수·한명수·주남태·김원배·박태언·차경곤·김성집 등과 만나 구체적인 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김천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충한 지사

지사와 김수길은 경고문 작성을 책임졌고, 김수길·최용수·박태언 등은 인쇄를 담당하기로 했다. 김수길은 비단으로, 주남태·김원배는 종이로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하고, 거사일은 김천읍 장날인 3월 11일 오후 3시 감천교(甘川橋) 부근으로 결정했다. 3월 10일 교회에서 김수길과 함께 경고문을 작성하여 최용수의 집에서 300여 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도 제작하여 김천 공립보통학교 학생 및 인근 주민들에게 배부하였다.

하지만 3월 11일 오전 11시경, 일제에 독립운동 계획이 탐지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시위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사도 체포되어 그해 5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김원배 10개월, 최용수 1년 6개월, 한명수 10개월, 주남태 10개월, 김재위 6개월 등 다른 주동자들도 실형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방한상 지사의 묘소와 시비
 방한상 지사의 묘소와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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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한 지사의 묘소 동쪽은 방한상(方漢相) 지사의 묘소이다. 방한상 지사는 1900년 8월 23일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여 1970년 1월 8일 타계했다. 방한상 지사는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23년 5월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가업인 한약상을 도우면서 대구청년회 간부로 활동했다. 1924년 4월 서울에 머물면서 북풍회·화요회 등 사회주의 계열과 접촉하며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의 단체에 참여하였다.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한 방한상 지사

그 후 방한상은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사회주의 계열과의 공동 투쟁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무정부주의 동지들의 독자적 이념 연마와 결속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1925년 9월 대구에서 신재모·서동성·정명준·서학이·마명·정해룡·안달득·하종진·김동석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했다. 이때의 동지인 신재모 지사와 정명준 지사의 묘소도 방 지사의 묘소와 함께 이곳 신암선열공원 제4 묘역에 있다.

5월 1일 신암선열공원 국립묘지 승격 기념행사 때 공원 묘역 담장에 게시되어 있던 방한상 지사 관련 현수막의 일부
 5월 1일 신암선열공원 국립묘지 승격 기념행사 때 공원 묘역 담장에 게시되어 있던 방한상 지사 관련 현수막의 일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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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연맹은 당시 1100여 명이나 되는 회원을 가진 대구노동친목회를 그 세력권 하에 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과도 연락을 하면서 연계 투쟁의 길을 모색했다. 진우연맹은 항일의 구체적 방법으로 향후 2년 내에 대구의 도청·경찰서·우편국·법원을 비롯하여 일본인 점포를 파괴하는 한편 지사·경찰부장 등 관청의 수뇌부 암살을 계획하였다.

아나키즘,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은 모든 정치조직·권력을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흔히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 부르지만, 아나키즘은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를 포함하여 자본, 종교 등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는 지배를 부정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을 좌익 운동의 일파로 제한하여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나키즘 사상이 명확한 사상 계보로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부터이다.

암살과 파괴를 위해 파괴단을 조직하다

진우연맹은 파괴와 암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파괴단(破壞團)을 조직하고 상해 민중사(民衆社)의 유림(柳林)을 통해 폭탄을 입수하기로 했다. 방 지사는 1925년 11월 일본 동경으로 파견되어 자아인사(自我人社)의 구리하라(栗原一男), 흑화사(黑化社)의 랴쿠모토(掠本運雄) 등 일본 무정부주의자 및 흑우회의 김정근, 그리고 흑선풍, 해방전선, 자유노동, 관동노동조합연합회 등과 연합해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본부를 동경에 두었다.

그 무렵 방 지사는 시곡(市谷) 형무소로 박열(朴烈)과 그의 부인 가네코(金子文子)를 면회하고 돌아와 의연금을 모아 송금하기도 했다. 1926년 4월 구리하라·후세(布施辰治) 등이 대구로 오자 진우연맹과 흑색청년연맹의 협력을 다짐하는 등 무정부주의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경북 문경 '박열 기념관' 경내 왼쪽에 조성되어 있는 박열 지사의 부인 가네코 여사의 묘소
 경북 문경 '박열 기념관' 경내 왼쪽에 조성되어 있는 박열 지사의 부인 가네코 여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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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연맹 회원들은 여러 차례 회합 끝에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흑색청년연맹과 제휴할 것, 부호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대구 일대에서 파괴·암살을 실행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우선 경상북도 도청(현 경상감영공원 일대) 및 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자리)·재판소(현 삼덕동)·정거장(현 대구역 맞은편 대우빌딩 일대)을 한꺼번에 파괴하고, 도지사 이하 중요 관리들을 암살한 이후에 일본인들의 시가지인 원정(元町) 일대를 파괴하고 나아가 전조선에 무정부주의 사상을 선전하기로 하였다.

상해에서 폭탄을 반입하던 중 일제에 적발되다

그리하여 상해의 김관선(金官善)과 연락해 폭탄의 밀반입을 추진하던 중 안달득이 절도 혐의로 잡힘에 따라 거사 계획이 드러나, 8월에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오랜 예심 끝에 재판에 회부되어 1927년 7월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방한상 지사 묘소 옆에 세워진 시비(뒷면에는 선생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방한상 지사 묘소 옆에 세워진 시비(뒷면에는 선생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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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상 지사 묘소의 앞면 동쪽에는 특이한 비석이 1기 세워져 있다. 비문을 우리나라 초기 국문학계의 대학자 조윤제(1904∼1976)가 지었다는 사실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抗日鬪士(항일투사) 故(고) 晩翠(만취) 方漢相(방한상) 先生(선생) 墓碑(묘비)'의 내용을 읽어본다.

"여기 길이 잠들어 누우신 이는 만취 방한상 선생이시다.
선생은 한평생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자신보다 나라와 겨레를 생각한 일이 더 많았고,
따라서 편안한 날보다 괴로운 날이 더 많았다.
그러나 돌아가시니
세상 사람들은 다 선생을 보람 있게 사셨다 하여
뜻을 같이한 이들이 모여 이곳에 정중히 장사지내고
뒷날 영원히 선생의 이름을 잊지 않고자
대구라이온스클럽은 (1973년 4월) 이 글과 아울러 그 약력을
돌에 새겨 뫼 앞에 새기다.
명(銘, 돌에 새긴 글)하여 가로되
'겨레 위해 산 사람 그 이름 장하네
청사에 남을 이름 다시 한번 뇌우세'"

묘비 뒷면에는 '선생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1900.8.23. 경남 함양에서 방규진(方圭鎭) 씨 장남으로 출생
1922.6.20. 일본 와세다 대학 중퇴
1925.9.28. 대구 진우연맹 주동으로 해외로 탈출하였다가 귀국
1926.7.7. 대구에서 진우연맹을 조직하여 일 관서 폭파를 목적으로
무기를 반입하려다가 발각, 일경에 치안유지법 제1호 위반으로 피체
1927.7.2. 징역 5년형의 언도를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1933.2.5. 출옥 후 구일한약방을 경영하면서 동지들 뒷바라지에 전념
1945.8.15. 해방 전에 일 관헌에 예비 검속 중 8.15 해방과 동시에 출옥
1946.2.11. 반탁운동 경북지부 부위원장으로 활약
1949.2.22. 반민특위 경북 조사관 피임
1963.3.1.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장 추서
1970.1.8. 하오 10시 70세를 일기로 불귀의 객이 되셨다."

5월 1일 신암선열공원 국립묘지 승격 기념 행사 때 묘역 담장에 게시되어 있던 현수막의 일부
 5월 1일 신암선열공원 국립묘지 승격 기념 행사 때 묘역 담장에 게시되어 있던 현수막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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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상 지사의 묘소 아래에 신재모(申宰模) 지사의 묘소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재모 지사의 공적은 우해룡, 방한상 지사의 공적과 상당 부분 겹친다. 함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을 실천한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읽어본다.

"생몰년도 : 1885.4.26.~1958.6.16. / 출신지 : 경북 칠곡
운동 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연도) : 애국장(1990)

공적 내용 : 그는 대구노동공제회 농민부 위원과 대구노동친목회 상무서기(商務書記)로 있으면서 1925년 9월 29일 서동성·방한상 등과 함께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진우연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진우연맹은 당시 회원이 1만1000여 명에 달하던 대구노동친목회를 세력권 하에 두고 있었다. 또한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반역아연맹 등과 관련을 가지면서 연계 투쟁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는 방한상과 함께 진우연맹에서 이러한 대외 교섭을 주도하였고 투옥된 박열에게 의연금을 송부하기도 하였다.

동 연맹에서는 항일운동의 구체적 방법으로 향후 2년 내에 대구 부내의 도청·경찰서·우편국·법원을 비롯하여 관서·일본 점포를 파괴하는 한편, 지사·경찰부장·관아(관청) 수뇌부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하여 파괴단을 조직하고 중국 상해에 있던 무정부주의자 유림을 통하여 폭탄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획을 추진하던 중 연맹원 안달득이 일경에 피체되어 가택수색을 당한 결과 진우연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정상득 지사 묘소 앞 표지석
 정상득 지사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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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는 1926년 7월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산남의진 의병으로 활동한 정상득 지사

신재모 지사의 묘소 아래에 있는 정상득(鄭尙得) 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묘소에는 지사의 부인 '월성 이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정상득 지사는 1886년 7월 1일 경북 영일에서 출생했고 1969년 9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나이 21세이던 1906년 산남의진에 참가하여 척후장으로서 활약하던 중 체포되었다.

출옥한 후 1909년 의병장 민긍호·김상태 등과 회합하여 복계곡에서 적과 교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만세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지사는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인 1920년에도 '3·1 동지회'를 조직하여 3.1정신을 고취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점학(김선기) 지사의 묘소
 김점학(김선기)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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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득 지사 묘소의 서쪽에 있는 김점학(金點學, 일명 김선기) 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묘소에는 청도 김씨인 부인 김명화(金名花) 여사도 함께 모셔져 있다. 김 지사는 1906년 10월 6일 대구에서 출생하여 1960년 3월 5일 타계했다. 21세이던 1926년 대구 교남학교 고등과(현 대륜고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4월 일본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유학하였다. 입학 즉시 동경조선청년동맹(東京朝鮮靑年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지사는 7월에 퇴학을 당해 귀국했다.

김점학(김선기) 지사 묘소 앞 표지석
 김점학(김선기) 지사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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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한 지사는 대구에 거주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 협동전선 운동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등 반일 활동을 펼치다가 1927년과 1929년에 연이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의 대구복심법원은 1930년 3월 11일 지사에게 소위 '보안법' 위반을 적용하여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장진홍 의사를 살려내라" 옥중 투쟁

지사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일 때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을 일으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장진홍 의사도 함께 갇혀 있었다. 장진홍 의사는 일제의 손에 처형될 수는 없다면서 1930년 6월 5일 방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을 9월에 알게 된 김점학 지사는 장진홍 의사의 순국에 항의하는 옥중 시위를 벌였다. 대구지방법원은 1930년 9월 18일 김 지사에게 형무소 건물 파괴 죄를 덧붙여 징역 8월을 추가로 언도했다. 그 바람에 1931년 3월 13일이던 김 지사의 출옥 날짜가 11월 13일로 연장되었다. 김 지사는 1944년 7월에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갇혔다가 1년 뒤인 1945년 7월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계속)

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운동가 공훈록' 참조



태그:#방한상, #김점학, #신암선열공원, #김충한, #정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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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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