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자 형상의 만희(영화 첫 장면)

ㄷ자 형상의 만희(영화 첫 장면) ⓒ (주) 영화제작전원사


텅 비어 있다. 객석에 나 혼자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에 대한 보이콧 같다. 의자에 깊숙이 고쳐 앉는다. ㄷ자 형상으로 몸을 굽혀 뭔가를 쓰는 만희(김민희 분)가 보인다. 남양혜(장미희 분)가 와서 대화를 나눈다. 둘의 발성이 말풍선처럼 도드라진다. 대사에 쏠리게 하는 연출 탓에 화면이 연극 무대 같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깜찍하다. 출연진이 단출하고 줄거리도 간단하다. 만희가 느닷없이 해고당하고, 소 감독(정진영 분)과 남양혜의 관계에 균열이 간다. 그 사이사이 사진 찍는 클레어가 우연히 개입하면서 만희의 정황이 변화한다. 그 네 명으로 꾸리는 영상 문법의 열쇠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클레어다.

폴라로이드는 현상과 인화가 1분 이내에 이루어진다. 찰나의 고착화다. 피사체인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고착화된 자기를 새삼 응시하는 행위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자기를 관조하는 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해프닝에 취약한 파편적 삶에 피드백을 유도한다.

사진을 왜 찍느냐는 만희의 물음에 대해 클레어는 대답한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만희는 클레어와 함께하는 동선을 이어가며 양혜와 마주했던 카페의 그 자리에 다시 앉아 당시를 되살린다. 깊은 들숨이다. 그 이후 소 감독과 소원해진 양혜가 찾아왔을 때 주저 없이 만난다.

만희가 낯선 클레어를 대하는 언행에는 경계가 없다. 자작곡한 노래를 들려주고, 사는 게 싫다며 분홍색 천을 조각내는 등 속내를 툭툭 내보인다. 설명도 없이 부정직하다고 해고당한 순간은, 짧은 반바지를 가리키며 남자들의 싸구려 욕망을 끌어들인다고 비난하던 소 감독에게는 내비치지 않았던 날숨이다.

배경음악의 도돌이표를 흉내 내듯 반복적 기법 쓰는 영화

 해고당한 만희에게 공감하는 클레어

해고당한 만희에게 공감하는 클레어 ⓒ (주) 영화제작전원사


영화의 배경음악은 <사계>의 겨울이다. 그 곡의 도돌이표를 흉내 내듯 영화는 반복적 기법을 쓰고 있다. 만희와 클레어가 각자의 상황에서 인도에 엎드린 커다란 개를 보고 "아름답다"며 쓰다듬는다. 숙소의 계단 벽화가 "이상하다"는 클레어의 관점에 대해 만희는 한 번 더 응시한 후 좀 전의 견해를 바꾸어 이상하다고 동의한다. 또한 클레어는 양혜에 대해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영화는 두 사람의 공감지수가 비슷함을, 아울러 "아름답다"나 "이상하다"가 겉모습이 아닌 비가시적 내면세계를 향한 것임을 암시한다. 시를 읽어주는 클레어를 꾀려고 "아름답다"고 내뱉고, 만희를 아름답다면서도 헤퍼 보인다며 공격하는 소 감독은, 클레어나 만희의 내면세계를 도외시한 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가시적 현상에 치우친다.

삶의 진정한 변화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좇을 때 일어난다. 클레어와 공감하며 만희는 양혜와 소 감독이 제 입맛대로 폄훼한 자기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클레어의 카메라>가 뭇 가십을 대하는 홍 감독의 관점을 대변한다는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다.

별 항변 없이 양혜의 해고를, 그리고 소 감독의 질책을 감내했던 만희가 다시 직장에 복귀해 열중하는 마지막 장면에 눈이 간다. 셔터가 찰칵하듯 끝나 어리둥절했지만, 그 화면처럼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가 일상의 어우러짐 속으로 스며들기 바란다.

객석에서 일어서며 내게도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음을 떠올린다. 어서 가서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클레어가 되어봐야겠다. 내 삶의 들숨과 날숨을 위해서도 카메라의 도돌이표는 필요하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만희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남양혜

숙소 근처 카페에서 만희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남양혜 ⓒ (주) 영화제작전원사



클레어의 카메라 홍상수 감독 김민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온갖 종류의 책과 영화를 즐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