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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암선열공원(왼쪽에 안내판, 오른쪽 멀리 사당 단충사가 보인다.)
 신암선열공원(왼쪽에 안내판, 오른쪽 멀리 사당 단충사가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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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신암선열공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이다. 이곳에는 52분의 독립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다. 지금은 장언조, 박만선, 우해룡 세 분의 묘소를 참배하려 한다.

공원 입구 안내판에는 장언조(張彦祚) 지사의 묘소에 7번 번호를 매겨 두었다. 물론 번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관리상의 필요 때문에 붙였을 뿐이다. 그래도 번호는 답사자들에게는 특정 지사의 묘소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안내판의 위치도를 자세히 본 후 장언조 지사의 묘소로 올라간다.

장언조 지사는 1924년 9월 5일 대구에서 태어나 1998년 9월 29일 타계했다.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운동가 공훈록'(아래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기록되어 있는 장언조 지사의 '공적 내용'은 2번 묘소 신길우 지사의 그것과 동일하다.

 장언조 지사 묘소 앞 표지석
 장언조 지사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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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언조, 신길우 두 분의 공적 내용이 같은데

신길우 지사의 공적 내용을 먼저 살펴보았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장언조 지사의 공적 내용에 그대로 재수록되어 있으리라 짐작할 수는 없다. 물론 앞에서 읽은 내용을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두 분이 같은 때에 강제 징집되었고, 함께 중국 남경 주둔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란히 탈출하여 처음에는 중국군 유격대로 갔다가 다시 같은 때에 광복군에 입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같은 날 독립을 맞았기 때문에 공적 내용이 동일한 것이다. 아무튼 신길우 지사와 같은 장언조 지사의 공적 내용을 읽어본다.

장언조 지사는 1943년 10월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을 당하여 중국 남경 지구 주둔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중 일본군으로부터 중국 중경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광복군에 입대하기 위하여 1944년 4월 일본군을 탈출한 지사는 처음에는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윽고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하여 광복군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였고,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경위대(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광복군이 있다는 말 듣고 일본군을 탈출하다

장언조 지사 오른쪽은 6번 박만선(朴晩善) 지사의 묘소이다. 박만선 지사는 1924년 3월 11일 경북 경산에서 출생했고, 1999년 타계했다(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타계 시기 '미상'). 지사는 국내에서 항일 운동을 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장언조, 박만선, 우해룡 지사의 묘소가 있는 신암선열공원 제1 묘역 전경
 장언조, 박만선, 우해룡 지사의 묘소가 있는 신암선열공원 제1 묘역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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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선 지사는 1942년 3월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8세 때 학도병 소집 반대 등 지하 선전 활동을 했다. 1942년 9월에는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장춘 주재원 박동만(朴東萬)과 접선하여 특수 임무를 맡았고, 1943년 5월 박기수(朴基秀) 등 동지들을 포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지사는 1943년 5월 영천신사(永川神社) 방화를 준비했고, 같은 해 7월 14일 대구 주둔 일본군 부대의 탄약고 폭파를 계획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1944년 8월 23일 영천에서 동지들과 함께 대구헌병대에 피체되어 1945년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및 '조선 임시 보안령' 위반, 불경·방화예비 등의 죄목으로 징역 7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지사는 8·15광복을 맞아 8월 20일 출옥하였다.

무정부주의자 우해룡 지사의 독립운동

박만선 지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면 제2 묘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박만선 지사의 묘소 뒤에 9번 우해룡(禹海龍) 지사의 묘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소개되어 있는 우해룡 지사 관련 내용을 읽어본다.

생몰년도 : 1906.7.16.~1969.3.9. 
출신지 : 대구
운동 계열 : 국내 항일 
훈격(연도) : 애족장(1990년)

공적 내용 : 대구청년혁진단(大邱靑年革進團)의 간부로 있던 그는 1925년 7월 18일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의 창립대회 석상에서 '약소 민족의 생존권을 말살하는 일제의 위정자는 가면을 쓴 이리족(族)과 동일하다.'라고 일제를 규탄하다 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받았다.

 우해룡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우해룡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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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동성·방한상·신재모 등이 중심이 되어 1925년 9월 29일에 조직된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진우연맹은 당시 회원이 1,100여 명에 달하던 대구노동친목회를 그 세력권 하에 두고 있었다.

또한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반역아연맹(反逆亞聯盟) 등과도 관련을 가지면서 연계 투쟁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박열(朴烈)의 피체 후 흑우회(黑友會)를 주도하던 김정근이 진우연맹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락을 담당하였다.

동 연맹에서는 항일운동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2년 내에 대구부 내의 도청·경찰서·우편국·법원을 비롯하여 관서·일본점포를 파괴하는 한편 지사·경찰부장·관아(관청) 수뇌부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하여 파괴단(破壞團)을 조직, 중국 상해에 있던 무정부주의자 유림을 통하여 폭탄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획을 추진하던 중 동 연맹원 안달득이 일경에 피체되어 진우연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우해룡 지사의 묘소
 우해룡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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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분은 아니지만 우해룡 지사의 '공적 내용'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박열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박열은 1902년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1974년 1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낸 것으로 유명한 박열은 어릴 때부터 일제에 저항했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할 당시 3·1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한 것이다. 박열은 그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정칙(正則)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22년 동안 일제의 감옥에서 옥중 생활을 했던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이 경북 문경 마성면 오천리 95에 세워져 있다.
 22년 동안 일제의 감옥에서 옥중 생활을 했던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이 경북 문경 마성면 오천리 95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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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중에도 박열은 일제에 저항할 길을 찾느라 분주했다. 1921년 5월 동경에서 김약수·조봉암·김종범 등과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하지만 김약수·조봉암 등의 공산주의와 사상적으로 대립되어 해산했고, 다시 장상중·홍진유 등과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친일파 응징 위해 무정부주의 표방

1922년 4월 정태성 등 동지 16명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 및 악질적인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 9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천황을 비롯하여 황족과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의 실현을 위해 폭탄을 구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로 동지 김중한을 파송하다가 체포되었다.

박열은 1926년 3월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후 1926년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는데, 나라가 해방될 때까지 풀려나지 못하고 옥중 생활을 했다. 결국 박열은 20년 이상의 옥고를 치른 후 1945년 10월 17일 출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박열 생가터의 '박열 선생 추모비'
 박열 생가터의 '박열 선생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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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언조, 박만선, 우해룡 지사의 묘소를 둘러보았다. 무정부주의를 신봉한 우해룡 지사의 독립운동을 살펴보던 중 경상북도 문경의 박열 지사 생가와 기념관도 보았다. 아직도 신암선열공원에는 미처 참배하지 못한 묘소가 40곳이나 남았다.

그냥 휙 둘러보면 10여 분만에 끝날 일이지만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묘역을 살피고, 소개한다.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를 아직 찾지 못한 독자들에게 이곳을 열심히 알리고, 독립운동정신을 최대한 널리 전파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이제 우해룡 지사 묘소의 왼쪽에 있는 10번 박태현 지사의 묘소를 참배할 차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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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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