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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내각이 끝내 3월 25일 자위대를 헌법9조에 명기하는 개헌안을 발표했다. 9조 2항(전력 보유 불가 조항)에 위배되는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기함으로써 헌법9조를 무력화하려는 개헌안이었다.

헌법9조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이날 도쿄 곳곳에서 반개헌·반아베를 외치며 아베 내각 퇴진을 촉구했다. 1947년 탄생한 헌법9조, 일명 평화헌법이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정치의 뜨거운 쟁점이자 최전선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개헌 세력들은 평화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의 주된 근거로 '평화헌법은 미국이 강요한 비자주적 헌법'이라는 논리를 들이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이 세운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주도하던 미국이 억지로 평화헌법을 패전국 일본에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일본 정치학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헌법9조의 사상수맥>에서 그런 주장을 단호히 반박한다. 그는 "헌법9조가 '밀려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인이 계속 주장해온 사상의 '자주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누워서 침 뱉는 행위"(45쪽)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헌법9조가 제정되기 이전부터 일본에 존재했던 반전‧평화사상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헌법9조의 사상수맥>은 "헌법9조는 패전 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대와 국경을 넘어 면면히 이어져온 평화운동과 반전사상의 도달점이라는 점을 당파성 없이 냉정한 자료 비판으로 검증했다"(19쪽)는 평가를 받으며 11회 시바 료타로 상을 수상했다.

국제연맹, EU에서 실현된 막부 말기의 반전 사상

<헌법9조의 사상수맥> 표지.
 <헌법9조의 사상수맥> 표지.
ⓒ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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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야마무로 신이치에 따르면, 일본이 서구 열강의 위협을 받던 막부 말기부터 이미 요코이 쇼난, 나카에 초민 등 여러 사상가가 소리 높여 반전을 외쳤다. 특히 <서국입지편>, <자유지리> 등을 펴내 자유민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나카무라 마사나오, 역시 자유민권운동을 이론적으로 이끈 우에키 에모리의 주장은 이후 현실에서 일부 구현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메리켄시 서> 등에서 전쟁을 멈추는 방법으로 평화의회와 세계연방을 제안했다. 그는 미국 연방제도를 모방해 '각국 원수가 의회와 협동하여 각각의 토지와 인민을 하나의 공법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영국·프랑스·스위스 등의 국명은 일절 폐지하여 하나의 국회를 세우고, 관리가 되는 사람들이 원래 출신국과는 다른 장소에서 근무하는' 세계연방을 구상했다.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세계연방이 실현되면 '종래의 원한이나 시기, 의심이 사라지고, 합동·협화·우애·공평의 선한 면들이 생길 것이며, 세계 사람들이 합동·협화·우애·공평을 누릴 때 세계평화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화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평화·자유 동맹에 의한 만국평화회가 제네바에서 1867년부터 1876년까지 13회 열리고, 1899년 제1회 헤이그 평화회의가 개최되면서 실현됐다. 여러 국가가 하나의 공법하에서 출신지를 초월해 관리로서 근무하는 것도 부분적이지만 EU에서 실현되고 있다.

우에키 에모리는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만국공의정부'를 제창했는데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국공의정부'는 각국이 정체를 불문하고 참가할 수 있으며, 각국은 동수의 의원을 내고 헌법에 따라서 헌법에 따라서 규칙을 세워서 집행할 수 있으며, 경비도 각국이 부담하며, 미개 국가는 보호하여 독립시키며, 불복하면 탈퇴할 수 있지만 내정간섭은 할 수 없으며, 공의정부의 결정에 위반할 경우에는 징벌을 받지만 국토를 몰수당하지는 않는다."(146쪽)

저자는 우에키 에모리의 구상을 설명하며 "이러한 대강이 37년 후에 창설된 국제연맹의 규약과 공통점이 많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최초로 군비철폐 강령 내건 사회민주당

나카무라 마사나오, 우에키 에모리 등의 반전사상은 이후 고토쿠 슈스이를 필두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계승했다. 고토쿠 슈스이, 가타야마 센 등이 1901년 결성한 사회민주당은 '이상강령'에서 '만국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군비를 전폐할 것'을 주요 과제로 제기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강령'에서 "전쟁은 원래 야만의 유풍이어서 명백히 문명주의와 반대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군비철폐·전쟁 폐지를 호소한 최초의 정당 강령이다.

사회민주당은 군비철폐를 강령으로 내걸었다는 이유로 창당과 함께 해산됐지만, 고토쿠 슈스이는 사회민주당 해산 이후에도 사카이 도시히코 등과 함께 <평민신문>을 창간해 반전·평화운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평민신문> 창간호에 '나는 인류가 박애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서 평화주의를 창도한다. 때문에 인종의 구별, 정체의 이동을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군비를 철폐하고 전쟁을 금절하기 바란다'고 선언했다.

근대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도 반전·평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청일전쟁은 나에게 실로 의로운 전쟁이다"라면서 청일전쟁을 정당화했던 인물이었지만, 청일전쟁이 약탈 전쟁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회의를 느낀 뒤 반전주의자가 됐다. 그는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죄악이다. 그래서 대죄악을 범하면 개인도 국가도 영구히 이익을 얻을 수는 없다"며 모든 전쟁에 반대했다.

탄압 속에서도 끝내 헌법 9조로 이어져

물론 반전·평화운동이 언제나 대세거나 주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들은 비주류일 때가 많았고, 때로는 일본 정부의 혹독한 탄압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다. 러일전쟁 승전 후 일본 정부는 반전운동에 앞장섰던 고토쿠 슈스이 등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12명을 대역 사건으로 사형에 처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동료였던 가타야마 센, 이시카와 산시로 등도 대역 사건 이후 외국으로 도피해야만 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뒤를 이어 오스기 사카에가 1914년 월간 <평민신문>을 간행하지만, 6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다. 오스키 사카에는 "대역 사건 이래 우리들의 정치상 및 경제상의 주장은 완전히 언론의 자유를 빼앗겨 버렸다"고 회상하고 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이후에는 내무성 경보국장이 전쟁목적에 반하는 기사와 관련해 '자발적 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실질적인 사전 검열을 실시해 반전사상을 게재한 잡지는 차례차례 발행 금지처분을 내리거나 폐간했다.

하지만 이런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반전·평화사상은 살아남았다. 후일 수상이 된 이시바시 단잔, 요코하마 정금은행 총무부장이던 기우치 노부타네, 헌법조사위원회 위원이던 미야자와 도시요시 등이 패전 전후의 일본에서 전쟁포기, 군비철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삼국동맹 체결을 추진해 A급 전범으로 소추된 시라토리 도시오도 요시다 시게루 외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병역거부권, 전력 불보유 등을 일본헌법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헌법이 결코 미국에 '밀려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시데하라 기주로 당시 수상이 전쟁포기 조항을 발의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맥아더 회상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시데하라 수상이 신헌법을 작성할 즈음에 이른바 '전쟁포기' 조항을 포함하고 그 조항에서 동시에 일본은 군사기구를 일절 갖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구 군부가 언젠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을 미연에 없애는 것이 되고 또 일본에는 다시 전쟁을 일으킬 의지가 없다는 것을 세계에 납득시킨다는 이중의 목적이 달성된다는 것이 시데하라의 설명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오랜 세월의 경험에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든지 매우 흥분시킨다든지 하는 것에는 거의 불감증이 되어 있었지만 이때만은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맥아더는 1951년 5월 미국의 상원 군사외교합동위원회, 1955년 1월 샌프란시스코의 연설, 1958년 다카야나기 겐조 전 헌법조사회 회장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시데하라 기주로 수상 자신도 1946년 3월 20일 귀족회의 자문에서 "전쟁포기는 정의에 근거한 올바른 길이어서 일본은 오늘 이 큰 깃발을 들고 국제사회의 들판을 단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각국이 언젠가 전쟁포기를 진지하게 생각할 날을 꿈꾸며 "그때 나는 이미 묘지 안에 있겠지만 그 묘지 그늘에서 뒤를 돌아다보고 열국이 이 대도를 따라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내 아이를 전쟁이 가능한 나라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헌법9조의 사상수맥>은 헌법 9조 제정 이후의 반전·평화운동은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9조 제정 이전에 그랬듯 그 이후에도 수많은 일본시민이 반전·평화운동에 나섰다. 안보조약을 개정해 일본을 미국의 세계전략에 편입시키려던 기시 내각을 끌어내린 1960년대 안보투쟁의 주역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전 반대를 외쳤던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철수시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이 책의 주제인 헌법9조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이들도 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에 맞서 헌법 9조를 지키려던 시민들의 모임 '헌법9조에 노벨 평화상을' 실행 위원회는 3년째 노벨평화상에 도전하고 있다.

'헌법9조에 노벨 평화상을' 운동을 처음 제안한 다카스 나오미는 한 인터뷰에서 운동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내 아이들을 전쟁이 가능한 나라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전쟁 안 하는 헌법을 바꾸면 큰일 난다. 내 아이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린이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꿈꿨던 막부 말기 사상가들의 반전사상이 150여 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일본 사회에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서 평화헌법은 극우세력 주장과는 달리 미국의 강요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평화헌법은 평화와 전쟁 없는 세계를 염원하는 일본 시민이 만들어낸 소중한 성취이자 나아가 평화를 바라는 세계 시민이 함께 지켜야 할 공동자산이다.


헌법9조의 사상수맥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박동성 옮김, 동북아역사재단(2010)


태그:#평화헌법, #고토쿠 슈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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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한겨레출판 편집자.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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