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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요즘 말로 '최애(最愛 : 최고로 좋아하는)' 리스트가 있다. 솔직히 나는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영화 일을 하던 때, 페이를 좀 더 많이 받는 드라마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너무 열악한 노동 조건을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최애' 드라마가 있으니 MBC에서 2005년에 방영되었던 <떨리는 가슴>이다.

이 드라마는 '사랑, 기쁨, 슬픔, 바람, 외출, 행복'이라는 6개의 감정을 키워드로 해서 6명의 작가와 6명의 연출자가 팀별로 만든 옴니버스 드라마다. 김창완(아빠), 배종옥(엄마), 배두나(이모), 고아성(보미/딸) 가족을 중심 인물로 설정해 놓고 각자 구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떨리는 가슴
 떨리는 가슴
ⓒ MBC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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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은 박성수 PD(<햇빛 속으로>, <네 멋대로 해라>)가 맡았고, 이경희 작가(<미안하다 사랑한다>, <상두야 학교가자>), 김진만 PD(<위풍당당 그녀>, <아일랜드>) 등 당시 MBC 드라마를 맡고 있던 쟁쟁한 제작진이 참여했다. 나에게는 인정옥 작가(<네 멋대로 해라>, <아일랜드>)의 마지막 드라마 작품으로 더 자리잡아 있다.

'기쁨'을 주제로 한 2탄은 여성성을 이해받지 못 했던 남동생 창호(이자 혜정/하리수 분)가 그리워했던 가족에게 등장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창완은 오랜만에 만난 남동생(남자면서 여자처럼 꾸미고 나온) 창호에게 "너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라고 첫 마디를 던진다. 어렵게 입을 뗀 혜정은 오빠에게 말한다.

"나, 수술했어..."
"근데도 집에도 연락을 안 해? 어디가 아팠는데."
"... 성전환 수술... 나, 이제 여자야."

혜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창완은 분노하고, 창완과 혜정의 대화를 목격한 종옥은 창완이 바람피고 있다고 오해한다. 이 와중에 후배 남수(신성우 분)는 혜정에게 반해 창완에게 소개시켜달라고 졸라대니 미칠 노릇!

종옥의 이야기를 들은 두나가 형부와 바람피는 여자와 담판을 짓겠다며 혜정에게 전화를 걸고, 그리하여 종옥과 두나는 혜정이 예전의 창호, 즉 시동생임을 알게 된다. 혜정은 두나의 헬스장에 트레이너로 취직하며 행복한 매일을 보내지만, 성전환 사실을 알게 된 관장이 혜정을 내쫓으면서 이야기는 반전을 겪는다.

이 에피소드의 대본은 주로 사극(<다모>, <주몽>, <야차>, <계백>, <징비록>)을 다뤄왔던 정형수 작가가 집필했는데, 기존 색깔과는 다르면서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성이 극을 살린다. 창완이 외도하는 것으로 오해한 종옥의 독백과, 혜정으로 나타난 창호 때문에 괴로운 창완의 독백이 거실에서 어우러지는 장면은, 각자 다른 원인이지만 독백들이 맞아 들어가면서 웃픈 감정을 동시에 안겨준다.

종옥은 남편의 외도로 오해했지만 나중에 시동생인 창호(혜정)임을 알게 된다.
 종옥은 남편의 외도로 오해했지만 나중에 시동생인 창호(혜정)임을 알게 된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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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를 최근에 다시 보면서 주목했던 부분은 성소수자들이 흔히 겪는 고민과 힘든 경험들을 섬세하면서도 은유적으로 잘 그렸다는 점이다. '내가 그때 너를 때려서라도 다 잡았으면, 너 이렇게 되진 않았어'라는 창완의 독백(이 대사는 후에 친구를 때린 보미에게 '여자답게 살아라'며 창완이 회초리질을 할 때 혜정이 막아나서는 장면에서 반복된다)이나, 가족에게 이끌려 신경정신과를 찾아가고,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는 장면들은 예전보다 성소수자의 삶을 알게 된 후인 지금, 훨씬 먹먹하게 다가왔다.

요즘은 덜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상 매체(드라마/영화/CF)에서의 성소수자는 희화화 되기 마련이었다. 배우 홍석천도 그런 역할만 많이 들어와서 작품을 쉽게 택할 수 없다는 점을 인터뷰에서 토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그려냈으며,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잘 담아냈다.

방송가에서는 연이은 트랜스젠더와 동성애 캐릭터의 드라마 등장에 대해 그만큼 우리사회가 다양성을 소화할 수 있는 성숙도를 갖춰나가고 있다고 평가하며 앞으로 트랜스젠더, 동성연애자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소외계층이 드라마에 등장해 자연스럽게 편견과 오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순기능을 기대하고 있다. -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드라마에 본격 등장>(2005.3.29/마이데일리) 기사 중에서.


이 드라마는 에피소드의 이름인 '기쁨'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사실 그 시절(?)만 해도 성소수자가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로 다뤄지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들었는데, 심지어 성소수자 당사자가 출연한 센세이션한 작품이기도 했다.

주연으로서 하리수의 연기는 조금 어색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출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난다! 마치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애덤 리바인의 어색한 연기를 보다가 <Lost Stars> 부르는 부분에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듯이 말이다.

지난 17일, 전주에서 열렸던 한 토크쇼에 취재차 다녀왔다.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전주퀴어문화축제>의 사전행사로 열렸던 이 행사는 '성소수자 부모모임' 활동가들과의 이야기 시간이었다.

부모님들은 커밍아웃한 자녀들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성소수자 관련 책들에서 큰 도움을 얻었으며, 앞으로도 좀 더 많은 책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씀해주셨다. 나 역시도 성소수자의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우연히 읽었던 책 덕분이었기 때문에 동감하는 바다.

사랑의 조건을 묻다
 사랑의 조건을 묻다
ⓒ 숨쉬는책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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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에 대해 이제 알아가기 시작하는 분이라면, 숨쉬는 책공장에서 2015년에 펴낸 책 <사랑의 조건을 묻다>를 추천하고 싶다. 한국 게이 인권단체 '친구사이' 활동가인 터울이 썼다. 퀴어퍼레이드, 서울시청에서의 무지개 농성 등 퀴어 진영에서의 역사를 비롯하여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자신, 성소수자로서 그동안 경험한 삶에서의 단상 등을 다양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정은 칼과 같아서, 상대가 먼저 성큼 자신을 털어놓을 땐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남의 비밀을 들었다면 나의 비밀도 토해 내는 것이 상도지요. 그런 교호가 없이는 관계가 더는 진전되지 않는 때가 옵니다. 그럴 땐 내가 즐기고 위장해 온 가면과 실제 나의 모습 사이의 낙차만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게 되지요. 성정체성을 실토하는 순간, 그 이전의 과거에 했던 내 언행이 그에게 어떻게 번역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게이여서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기 위해 내가 벌려왔던 위장을 거짓이라 받아들여 나를 불신할 수도 있겠지요. - 책 본문 중에서 발췌


우리가 소위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은, 알아갈수록 생각보다 다른 것이 없다. 그저 차별의 벽이 그들을 '일반인'과 다른 이들로 구분했을 뿐, 그들은 각자 소중한 하나의 개인임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지는 게 없다.

한 마디로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삐뚤다'라는 게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글쓴이가 게이라고 해서 여러분이 동감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없다. 나는 마치 그가 내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배종옥, 김창완, 배두나 등 연기자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작가나 연출가가 발견한 모습일 수도 있지만, 바로 당신 자신의 단면일 수도 있다' - 드라마 <떨리는 가슴> 기획의도 중에서

보통 투쟁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많았으나 이 책처럼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담은 책은 많지 않았다. 일단 당사자들이 이야기를 꺼낼 루트가 적었던 것도 있겠고, 점점 열악해지는 출판 시장에서 이런 책을 구입할 사람이 적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소개된 두 작품 간에는 10년의 간극이 있다. 지난 시간 동안 분명히 변화는 있었다. 한국만 해도 올해 '전국퀴어문화축제연대'가 구성되었고 7개의 지역에서 축제가 진행될 예정이다.

EBS <까칠남녀>를 비롯하여,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방송도 방영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공간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떨리는 가슴>과 책 <사랑의 조건을 묻다>는 참 용기를 낸, 고마운 마중물이기도 하다.

"다시 내 모습을 찾은 것 뿐이야"(드라마 속 혜정의 대사)라고 그들이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공간은 당사자들이 아닌,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만들어가는 게 참 쉽지 않다. 무지개가 펼쳐지는 봄이 왔다. 하지만 그들을 막아서는 차별과 증오의 무리들도 다가올 것이다. 십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제작하고 친구출판사 '도서출판 한티재'에서 펴내는 책 <커밍아웃 스토리> 스토리펀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133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루카는 사회학 공부를 준비하다가 책 《다르게 사는 사람들(윤수종 지음, 이학사 펴냄, 2002)》에 있던 한 트랜스젠더의 자기 고백을 읽은 후부터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항상 성소수자 곁에 있겠다는 ‘Ally(앨라이)’로 오늘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을 말하려 노력하고 있다.



태그:#사랑의조건을묻다, #떨리는가슴, #성소수자부모모임, #성소수자, #커밍아웃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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