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답하기 정말 막연한 질문이다. 내가 망설이면 다시 질문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요?", "동성결혼 법제화요?", "성소수자 해방이요?",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상을 만드는 것이요?"

아마 내가 동성애자이고 페미니즘 운동에 몸을 담고 있으며 활동가이기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들이 죽기 전에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인 것과 별개로 '인생의 목표'였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나는 그런 반응이 돌아올 때면 너털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하곤 했다.

"글쎄요, 일단은 살아 남아야죠."

사람들이 말한 목표가 절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성소수자를 향한 배제와 혐오를 공기처럼 느끼며 이것들은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생활의 전반을 잠식하는 주요한 문제가 그것만은 아니다. 솔직히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10년 후에 내가 집도 절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는 건 아닐지다.

갑자기 큰 병이라도 나서 큰 돈을 써야하면 어쩌지. 나는 아직도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사회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른다. 언젠가 누구도 나를 찾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 때가 올까 두렵다. 하지만 이런 걱정에 뚜렷한 원인도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백기를 드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데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그래서 그냥 산다.

사람들은 일탈적이지 않은 괴로움을 시시하게 여긴다

황정은 소설집 <아무도 아닌>
 황정은 소설집 <아무도 아닌>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내가 느끼는 이 항구적인 두려움은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풍족하거나 해탈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저 걱정을 안 하는 사람이 없다. 진부하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는 건 버거운 일이다. 고통은 필연이다. 문제는 이걸 거의 모두가 겪다보니 이런 괴로움에 특별한 개성을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냥 그게 사는 거라고 말한다. 혹은 위악과 위선이 첨가된다. 이야기를 실제보다 험악하게 만들거나 혹은 이런 삶이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들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빈곤하지만 정감있는 가족에 대한 묘사를 떠올려 보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불안과 아픔을 다룬 글들은 무수하지만 그럼에도 쉬이 공감할 것을 찾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래서다. 이해는 한다. 사람들은 일탈적이지 않은 괴로움은 시시하게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은 내게 특별한 작품이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뚜렷한 사건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록된 대부분의 소설들은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인생에 그다지 큰 풍파 없이 살아온 내 기준으로 봐도 한번쯤은 듣거나 봤을 법한 일들이 작품들 속에 등장한다.

갑자기 가족 중 누군가 위독한 병을 앓거나 혹은 알고보니 내가 일하는 곳 근처에서 범죄가 일어났거나 뚜렷한 답도 없는 인생을 살면서 막연한 허무함을 느끼는 일들. 그런데도 <아무도 아닌>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는 인물들에게 하지 않았던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바짝 들여다 보고 관찰하기. 그들의 속을 엑스레이 필름처럼 투명하게 비추기.

신이 없는, 인간이 귀하지 않은 세상

보는 시야가 달라지기에 익숙한 사람들과 사건들은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온다. 나는 책을 읽고 이런 메모를 남겼다. '작가가 이 세계는 최소한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왜 최소한일까. 뚜렷한 비극이나 일탈을 겪지 않고 적당히 기댈 구석과 사람들도 있는 이들이 겪는 일을, 말하자면 사회의 평균이라 할 사람들이 마주하는 사건을 다루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상류엔 맹금류'에서 아버지의 폐암 소식을 알게 된 재희네 가족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주인공은 그것이 일방적인 위탁이 아니라 격려와 다짐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복경'의 화자는 인간이 존귀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똥을 싸는데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병원비와 생활비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여기 저기나 있는 존재이고 귀하지 않다.

말하자면 황정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괴로운 것은 그 세계에 특별한 악마가 있거나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 먹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 곳에 신이 없고 인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인상적이게도 <아무도 아닌>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작품들 속에는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밥을 먹는 것은 생을 연장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행위다. 뭔가 거창하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이 아니다.

'상류엔 맹금류'의 인물들은 문자 그대로 똥물 옆에서 밥을 먹는다. '양의 미래'의 주인공은 습기 찬 지하에서 어두컴컴하고 끝도 없는 터널이 있을지 모를 막힌 벽을 보며 밥을 먹는다. 나를 죽일 만큼 혹독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안하고 끔찍하기 그지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이런 것일까.

<아무도 아닌>이 보여준 글쓴이의 윤리

글을 배우면서 이런저런 교훈을 얻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고 원칙으로 삼는 명제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이다. 왜곡하지 말 것, 부풀리지 말 것, 내가 듣고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명백하게 쓸 것.

이것은 트라우마의 치료 과정과도 유사하다. 대부분의 심리적 외상은 언어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다. 내가 겪은 끔찍한 일들을 직면하고 풀어낼 말이 없다. 그래서 그 경험은 증상으로 개인에게 돌아온다. 사람들이 흔히 글쓰기를 '힐링(치유)'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회복의 첫 단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사건이 있었고 그것의 의미가 명백하게 무엇인지 파악했을 때 그 다음으로도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글쓴이에게 정직함은 미덕이 아니라 지켜야 할 윤리다.

<아무도 아닌>에서 나를 강렬하게 휘어잡았던 문장은 책의 첫 시작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이다. 황정은은 말한다.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고. 이 책은 너무도 흔하기에 '아무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그들을 그렇게 여긴다.

작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황정은은 가감 없이, 위선도 위악도 없이 정확하게 이들이 사는 삶의 풍경을 글로 옮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이 소설집은 잘 쓴 작품이기도 하지만 글쓴이로서 보여야 할 윤리를 제대로 보여준 책이기도 하다.

<아무도 아닌>은 온통 스산한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그 이면에서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인물에 접근하는 태도 때문이 아닐까.


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문학동네(2016)


태그:#아무도 아닌, #황정은, #글쓰기, #윤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