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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동구 미대동 마을의 바로 오른쪽에 붙어 있는 야산이다. 미대동의 청년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에 올라 두 차례 만세운동을 벌였다. 미대동 청년들의 이 만세운동은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만세운동이었다.
▲ 여봉산 대구시 동구 미대동 마을의 바로 오른쪽에 붙어 있는 야산이다. 미대동의 청년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에 올라 두 차례 만세운동을 벌였다. 미대동 청년들의 이 만세운동은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만세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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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26일 밤 10시 팔공산 아래 동구 미대동의 청년들은 마을 바로 동쪽 옆 여봉산에 올랐다. 이틀 뒤인 28일 밤 10시에도 같은 봉우리에 올랐다. 26일에는 채갑원, 채봉식, 채학기, 채희각이 올랐고, 28일에는 네 사람 외에 채경식, 채명식, 채송대, 권재갑 등 많은 마을사람들도 함께 올랐다.

이들은 모두 '치안 방해죄'로 구속되었는데, 26일과 28일에 걸쳐 이틀 연속 산에 오른 주동자 4명은 징역 8월, 28일만 참가한 2차 주동자 4명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마을 옆산에 오른 것이 어째서 치안을 방해한 범죄인가? 당시는 일제 강점기로서,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거하여 통치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 미대동의 여덟 청년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식민지의 청년들이 독립을 부르짖는 단체 행동을 했으니 일제로서는 치안 유지에 방해가 되는 위험한 범죄였던 것이다.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 목단봉 기슭에 세워져 있는 '기미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의 모습. 경상북도 도내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는 뜻이다.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 목단봉 기슭에 세워져 있는 '기미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의 모습. 경상북도 도내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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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방해죄'로 감옥에 들어간 청년들

미대동 청년들은 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나 시장에서 궐기하지 않고 산에 올랐을까? 이에 대해서는 경상북도 최초의 독립만세운동 발원지인 의성군 비안면의 사례를 돌이켜 볼만하다.

비안면의 동부동과 서부동은 1919년 3·1운동 당시 경북 전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펼친 지역이다. 이 마을 뒷산 목단봉에는 '기미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始發地) 기념탑'이 굳건히 세워져 있다. 또 '3·1 독립 운동 기념탑', '순의사 두곡 박공 유허비', '순국지사 현호 박석홍 기념비', '3·1 독립투사 기념비', '임란 의병장 백계 김희공 충의비' 등도 건립되어 있다.

현지 안내판은 '기미 3·1독립만세 비안 운동사'라는 제목 아래에 '1895년 8월 20일 황후(皇后) 시해(弑害) / 1896년 1월 1일 단발령(斷髮令) / 1905년 11월 을사늑약(勒約) /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로 전락'으로 '2천만 민중의 통분과 격노로 항일 투쟁에 봉기 항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우리 고장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수많은 학생들과 주민들이 앞장서 일어나게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비안 쌍계교회 조사 김원휘, 3·1만세운동을 독려

3월 3일 비안 쌍계교회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역할을 하던 조사 김원휘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러 가는 길에 서울에서 3·1독립 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다. 김원휘는 3월 7일 쌍계리의 박영화, 박영달, 박영신, 배중엽, 배달근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감격스러운 소식을 전하면서 의거를 일으킬 것을 권유한다.

3월 12일 비안 공립보통학교 전교생 150여 명은 등교하자 마자 마을 뒤 목단봉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정오에는 교회 신도들과 학생, 주민 등 2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마을을 누비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다시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다.

비안 사람들도 마을 뒷산 목단봉에서 만세운동 궐기

학생 시위의 주동자 우희원, 박기근, 정인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징역 8월∼6월의 실형을 언도받아 투옥된다. 박만녕은 탈출했다가 뒤에 검거되어 3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일반 주민들도 박영화 징역 2년, 김원휘 징역 1년 6월, 박영신, 배중엽, 박영달, 배달근 각 징역 1년, 이일만, 김명출, 배도근, 박인욱, 박세길, 배용석, 배용도 각 징역 6월, 서금이, 박충식, 최점문, 배용운 각 태형 90대 등 모두 18명이 처벌을 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기사 "책보 들고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 부르자" 참조)

경상북도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이다. 이곳에서 경북 도내 최초의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는 귀향하여 고향사람들에게 3.1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권유한 김원휘 쌍계교회 권사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 일로 1년 6개월의 감옥 생활을 한 김원휘 지사는 뒷날 목사가 되었고,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유공자 공원묘지인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사진은 그의 묘소로, 신암선열공원 단충각(사당) 바로 뒤편 제3 묘역에 있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이다. 이곳에서 경북 도내 최초의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는 귀향하여 고향사람들에게 3.1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권유한 김원휘 쌍계교회 권사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 일로 1년 6개월의 감옥 생활을 한 김원휘 지사는 뒷날 목사가 되었고,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유공자 공원묘지인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사진은 그의 묘소로, 신암선열공원 단충각(사당) 바로 뒤편 제3 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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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비안 동부동 동민과 학생들의 목단봉 항일 만세운동을 소개한 것은 대구 동구 미대동 청년 유림들의 여봉산 시위와 견주어 볼만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두 곳 모두 마을 인근 산봉우리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마을 바로 인근의 산 정상에서인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가까운 산봉우리에 올라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두르면 동네사람들의 눈에 바로 띄고, 소리가 들린다. 이웃사람들에게 신속히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고, 또 동참을 권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바로 마을 바로 옆 혹은 뒤의 얕은 산봉우리인 것이다.

의성 목단봉과 대구 여봉산의 차이

그런데 두 곳을 견줘보면 차이도 발견된다. 비안 목단봉은 독립운동 유적지로 깔끔하게 다듬어져 기념탑은 물론 여러 지사를 기리는 빗돌들도 건립되어 있다. 찾아오는 답사자를 위해 접근하는 길이 정비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길 양옆으로 태극기가 나부껴 멀리서도 그곳이 현창 시설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가늠할 수 있다.

눈이 내린 날의 여봉산
 눈이 내린 날의 여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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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견줘 미대동 여봉산은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도 없다. 아무런 안내 표식도 없다. 기념탑이나 비석은 물론 없다. 미대동 여봉산 궐기는 대구 지역 유일의 마을 단위 독립만세운동이었지만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기록에도 묻혀 있다.

기억하는 사람 거의 없는 여봉산 독립운동

미대동에는 여봉산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덟 분에 대한 기념물도 없지만 이 마을 출신 채충식(蔡忠植, 1892~1980) 독립지사를 기리는 현충시설도 없다. 1892년 음력 11월 15일 이곳 미대동에서 태어난 채충식은 1930년 3월 대구청년동맹 위원장 박명줄(朴明茁) 등과 함께 일제의 조선 지배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면서 민족 운동 동참을 호소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고, 1944년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 결사 조선건국동맹의 경상북도 조직을 결성하던 중 검거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한 독립운동가이다.

의성 비안 목단봉에는 있지만 대구 동화사 심검당, 미대동, 여봉산에는 독립운동을 기리는 정신적 상징물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인천 채씨 집성촌인 동구 미대동의 미대길 120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 9호인 성재(盛才)서당이 있다. 인조 때 선비 채명보(1574∼1644)가 은퇴 후 성재정을 지어 강학 장소로 활용하였는데, 후손들이 다시 크게 지어 성재서당이라 불렀다. 미대동의 청년 유림들은 독립만세운동을 하기 이전에도 이 서당을 많이 활용했을 것이고, 만세운동 기획 당시에도 이곳에서 논의를 하였을 것이다.
▲ 성재서당 인천 채씨 집성촌인 동구 미대동의 미대길 120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 9호인 성재(盛才)서당이 있다. 인조 때 선비 채명보(1574∼1644)가 은퇴 후 성재정을 지어 강학 장소로 활용하였는데, 후손들이 다시 크게 지어 성재서당이라 불렀다. 미대동의 청년 유림들은 독립만세운동을 하기 이전에도 이 서당을 많이 활용했을 것이고, 만세운동 기획 당시에도 이곳에서 논의를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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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미대동, #채충식, #여봉산, #김원휘, #채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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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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