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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오랫동안 사셨던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더불어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문익환 목사는 공동번역 성서? 프로젝트에 구약 번역 책임자로 8년간 재직했다.
▲ 번역작업 문익환 목사는 공동번역 성서? 프로젝트에 구약 번역 책임자로 8년간 재직했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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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학의 거장

<문익환 평전>을 취재할 때 내게 "문익환을 민주화운동에 빼앗긴 것이 너무 아깝다"고 말했던 분이 있었다.

그는 한국의 재야운동사에서 칭송되는 문익환의 크기는 한국 종교사에서 차지하는 문익환의 실체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라는 말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였다. 문익환은 본디 히브리어에 능통한 구약학 학자였고, 1970년대 한국 개신교와 한국 가톨릭의 성서학자들이 내세운 우리말 성서 공동번역위원장으로서 8년 넘게 공헌했다. 특히 그의 예언자적 사상은 북간도의 체험적 깨달음이 성서와 만나 민족·민중사의 열정으로 승화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느낌이다.

문익환 목사의 조선신학교 졸업증명서.
▲ 졸업증명서 문익환 목사의 조선신학교 졸업증명서.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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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라난 북간도 지방은 본래 고구려, 발해 등 한민족의 강인한 개척자 정신이 맥으로 흘러가던 곳이요, 민족의 자주독립, 교육과 신앙의 중심지였다. 명동촌의 어른들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서구의 교육과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곳에서 독립운동과 신앙생활을 하나로 실천하는 명동 마을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중학교를 마치고 조양천 소학교에서 선생을 하던 문익환은 어느 날 아버지에게 목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아버지가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바라셔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해 오셨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스스로 결정 내리기를 말없이 기다리신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20년 동안 아버지의 기도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는 그날부터 서둘러 유학 떠날 준비를 도와주셨다. 문 목사는 이후 일본신학교,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고, 1955년 귀국하여 한신대와 연세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빛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문익환 목사가 담임했던 한빛교회의 예배 모습.
▲ 문익환의 예배인도 문익환 목사가 담임했던 한빛교회의 예배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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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번역

1968년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인 성서 번역을 시작한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성서 번역을 꿈꿨다.

그는 우리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시인을 꿈꾸었으며, 구약성서를 전공한 학자로서 성서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성서는 영어 성서나 중국어 성서를 오래전에 번역해 "가라사대"와 같은 고어체와 생경한 한문 투의 문장으로 가득했다. 1960년대까지 사용하던 성서는 신약 1906년, 구약은 1911년에 번역한 것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성서가 신앙으로뿐 아니라 문학으로도 읽히기를 꿈꿨다. 영국이나 독일에서는 아름답게 번역된 성서가 하나의 문학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성서가 쉽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해왔다.

공동성서 번역하는 문익환 목사와 선종완 신부, 곽노순 목사.
▲ 공동번역 성서 공동성서 번역하는 문익환 목사와 선종완 신부, 곽노순 목사.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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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문의 해독에서 벗어나고 일본식 문장을 털어버리고 서양의 까다로운 논리에서 풀려난, 순하디순한 우리말을 키워 나가는 일은 아무래도 성서가 할 일인 것 같다."

"한국 교회의 그 반문학적인 기풍을 씻어 버리면서 국어 정화와 국문학의 심화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자리로 성서를 끌어 올리도록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는 더 나아가 예배의 모범, 찬송가 가사, 심지어는 설교까지 문학의 한 장르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대한성서공회의 신·구교 성서 공동번역 프로젝트 구약 번역 책임자로 위촉된 것이었다. 그는 가톨릭의 선종완 신부와 함께 번역에 부름 받은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이요, 즐거움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번번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첫째, 신교와 구교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경험, 둘째, 신학적 편견이 걷히는 경험, 셋째, 히브리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말의 담을 허무는 경험을 했다."

해방 후 활동하던 복음동지회 시절 신약 성서를 번역했던 자료(왼쪽 위, 아래)와 공동번역 집필 당시 썼던 성서 번역본(오른쪽).
▲ 성서번역 해방 후 활동하던 복음동지회 시절 신약 성서를 번역했던 자료(왼쪽 위, 아래)와 공동번역 집필 당시 썼던 성서 번역본(오른쪽).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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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는 1968년에 시작하여 1976년에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되기까지 8년을 성서 번역 일에 신들린 사람처럼 몰두했다. 문익환 목사가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는 한글 성서 중에서 가장 현대 말에 가깝고 이해하기 쉽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러나 개신교 일부 교단은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에 반발해 사용하지 않고 있다. 천주교와 대한성공회, 한국정교회에서도 오랫동안<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이 1983년 4월<공동번역 성서>를 일부 교정해<신구약전서>를 펴냈다는 점이다.

생명사상으로서의 기독교 정신

문익환은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1976년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거기서 처음으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니 호흡으로 하느님을 숨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 그것도 민중의 역사 속에, 민중의 숨결 속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저도 숨 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한국의 민중뿐 아니라 민중의 역사 속에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났다. 그가 만난 민중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은 이후 그의 역작 "히브리 민중사"로 완성됐다. 감옥을 통해 문익환은 종교의 벽, 학문의 벽, 지식인의 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감옥 속 민중과의 만남은 문익환의 민중신학을 일구는 거름이 됐다. 머리맡의 물그릇이 얼어 터지는 감옥에서 '꿈을 비는 마음'을 노래한 시인 문익환은 민중의 예언자로 태어났다.

석방 직후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문익환 목사의 모습.
▲ 석방 후 설교 석방 직후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문익환 목사의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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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민중신학, 통일신학, 평화신학, 화해의 신학, 생명 사랑이라고 한다

문익환은 형제를 원수로 만들어 버리고,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지엽적인지 가리지 못하게 하는 흑백 논리를 깨트려야 화해의 신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문익환 목사의 통일신학은 갈라져 있는 민족이 화해를 이루는 것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와 남을 구분하려는 이원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문익환의 이러한 통일운동은 실로 평화운동이고 생명 사랑 운동이다. 문익환의 생명 사랑은 무엇보다 연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나타난다. 그 연민은 생명에 대한 애끊는 마음, 애타는 마음, 뜨거운 마음, 긍휼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다. 문익환은 이 땅의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다감하지만,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과 구조, 제도에 끝없이 맞서 싸웠다.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시가 그대로 그의 삶이고, 사상이고, 신앙이라고 한다. 그는 말과 신앙 그리고 삶이 하나인 사람이었다.

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개똥 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나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놓고
진주 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 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다라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철들고 셈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 있어야죠-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 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 햇살을 타고 날아오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 바다로 서해 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면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태그:#문익환, #목사, #공동번역, #구약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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