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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은 졸업식 시즌이다. 학사모를 던지는 학생들을 여러 학교들이 모인 신촌 골목마다 찾아볼 수 있다. 저마다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손을 잡고, 신촌거리를 떠나고 있다. 하지만 10분 정도 연세대학교 앞에서 걷게 되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신촌을 지키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최근 화제작이었던 영화 <1987>에서 배우 강동원씨가 열연한 실제 인물 바로 고 이한열 열사이다.

신촌역에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이한열 박물관의 모습이다.
▲ 이한열 박물관 신촌역에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이한열 박물관의 모습이다.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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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짜리 단독건물은 1층은 사무실로, 2층은 군 인권센터, 3층은 이한열 열사의 기념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어린 아이부터, 당시 함께 활동한 동료들, 전직 대통령, 현직 국회의원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그를 기억하는 메시지가 빼곡히 적혀있다.

우리 국민은 그대를, 이나라 민주화를 가져온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전직 대통령의 문구 우리 국민은 그대를, 이나라 민주화를 가져온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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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입구에서 아들을 향한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애끓는 그리움은 박물관을 방문하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먼저 아들의 투쟁을 장하다고 칭찬하시는 모친의 성정이 열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과한 것이 아니다.

장하지만, 여전히 그리운, 잊을 수 없는 이한열 나의 아들
▲ 이한열 박물관의 열사 어머니의 문구 장하지만, 여전히 그리운, 잊을 수 없는 이한열 나의 아들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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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20평 남짓한 공간으로 이뤄져서 영화 <1987> 이후 더욱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 당시 박물관을 찾은 오아무개(32. 서울거주)씨도 얼마 전 영화 <1987>을 보고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6월 혁명에 대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바가 있어서 찾아오게 되었어요. 정말 위대한 열사구나. 이정도로만 생각했었죠. 그런데 보니깐 어리더라구요. 대학생이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아주 평범했던 제 주변에 있을 수 있는 동생 같았어요. 그래서 찾아왔어요.

누군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라지는 거니깐, 희미해진 그에 대한 기억을 지나간 역사 속에서 살려내는 것은 <1987> 영화이기도 하고, 그걸 보고 방문하는 많은 사람이겠죠. 저 역시도 그렇구요."

미안함, 그리움, 고마움 감정들의 교차
▲ 이한열 박물관에 남겨진 시민들의 목소리 미안함, 그리움, 고마움 감정들의 교차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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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벽을 가득 메운 포스트잇에는 그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무얼 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르는 내가 너무 부끄럽다."
"당신이 있었기에 내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유난히 눈에 띄는 포스트잇도 있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최루탄이 터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처럼 싸우겠습니다." 

그가 불러낸 것은 1987년 있었던 4.3호헌 철폐에 대한 감사함 뿐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불의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이들에 대한 강력한 격려도 되는 것이다.

그도 고민많은 한 청년이었다. 그의 메모 속에 수 많은 성찰들이 담겨 있다.
▲ 이한열 열사의 메모 그도 고민많은 한 청년이었다. 그의 메모 속에 수 많은 성찰들이 담겨 있다.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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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하고 싶은 일들보다 우선시 되었던 민주주의, 그 숭고한 가치
▲ 이한열 강의시간표 많은 하고 싶은 일들보다 우선시 되었던 민주주의, 그 숭고한 가치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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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몇몇의 유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낡은 그의 메모장에는 '인간이기에 약한 군중심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의 좌표와 함께, 자기 성찰적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내일의 당연함을 믿었던 그의 2학기 수강계획표는 여전히 실행되지 못한 채 이곳에 놓여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간 박물관 윗층에는 영화 속에서 배우 강동원이 입고 있었던 이한열 열사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의 진본도 남아 있었다. 운동화는 한 짝만 남은 채 말이다.

1987년 6월 투쟁당시 입었던 옷가지와 신발
▲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유품 1987년 6월 투쟁당시 입었던 옷가지와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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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87년의 숨겨진 주역들의 이야기도 함께 있다. 명동성당 앞에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먼저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준 종교인들, 80년대 국가안전기획부의 엄혹한 언론 검열에도 불구하고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을 담은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보도한 중앙일보의 이창선 기자의 이야기는 6월의 촛불을 일으켰다. 

정태원 기자의 사진과, 이창성 중앙일보 기자의 합작품이었던 기사
▲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국민들에게 알렸던 신문 정태원 기자의 사진과, 이창성 중앙일보 기자의 합작품이었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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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불러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되었던 그들을 우리가 이름 불러줌으로서 기억해내야 합니다.
▲ 명동성당 앞의 87년 6월 그들을 불러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되었던 그들을 우리가 이름 불러줌으로서 기억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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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관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박물관을 방문한 한 지긋한 신사분은 자주 이 곳을 찾는다고 했다.

"저랑 동갑이었어요. 동문은 아니지만, 당시 함께 깃발을 휘날리던 그때를 잊지 못해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아저씨가 되었고, 그는 여전히 20대 청춘으로 이곳에 남아있네요. 시간은 흐르지만, 그가 그리울 때, 또 젊은 날에 나의 열정이 식으려고 할 때 이곳에 자주 오고 있어요. 그게 제가 시간에 기대어 흘러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 같아서요."

쓰러져가는 그를 안고, 그는 울부짖었다.
▲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안고 있는 이종창씨 쓰러져가는 그를 안고, 그는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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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뭐가 바뀌어요?' '모르지, 그런데 안 그럴 수가 없어. 마음이 아파서.'  (영화 <1987> 중에서)

이한열 열사는 영화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간 다른 동료들을 위해 앞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뜨거운 청년이었다. 그리고, 87년 6월 9일 그는 앞으로 평생이고, 그를 그리워할 많은 이들을 남겨둔 채, 민주주의의 거름이 되어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다시금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찾는 이들이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우리 옆에 20살 청년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 돌아올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그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어떤가.

공간은 비록 협소하지만 더 많은 포스트잇으로 그를 다시 살려내자. "한열이를 살려내라."
현재 이제 그를 다시 살려내는 것은 87년의 경찰이 아니라,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우리이다.

그의 또렷한 눈동자는 우리의 기억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이한열 열사 그의 또렷한 눈동자는 우리의 기억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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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한열 열사 박물관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노고산동 신촌로12나길 26



태그:#이한열 박물관, #영화 1987, #이한열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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