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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아시안게임을 왜 반대하는가

민청련 7차 총회가 끝난 뒤 1986년 9∼10월의 가장 큰 이슈는 아시안게임 반대운동이었다. 아시안게임은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됐다. 민청련의 입장은 아시안 게임 저지투쟁이 아니라 반대투쟁이었다. 경기 진행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안 게임이 수반하는 부정적 본질을 폭로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1986년 9월 2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아시안게임개최 결사반대 교내 시위를 하고 있다. 아래는 민청련에서 제작한 아시안게임 반대를 담은 여러 가지 전단지와 신문들
 1986년 9월 2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아시안게임개최 결사반대 교내 시위를 하고 있다. 아래는 민청련에서 제작한 아시안게임 반대를 담은 여러 가지 전단지와 신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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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에서 발간한 전단지에는 아시안게임이 군사독재정권의 장기집권 획책에 이용되고 있는 점, 국민의 세금 부담을 가중시키는 빚더미 행사라는 점, 기생관광을 조장하는 부도덕한 성격을 갖는다는 점 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반대운동은 폭넓게 전개되지 못했다. 정부의 떠들썩한 선전이 국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86은 디딤돌, 88은 도약대"라는 표어에서도 보듯이 한국경제와 국위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으로 인해 선양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또 야당 세력이 반대운동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아시안게임 기간 중에는 정쟁을 멈추자"고 제안했고,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고문은 아시안게임 반대투쟁이 옳지 않다고 까지 발언했다.

민청련은 나중에 아시안게임 반대투쟁에 대해 반성했다. 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2주일 뒤에 발표된 창립 3주년 기념대회 결의문에서 "의미 있는 공동투쟁을 성사시키는데 실패했고, 그나마 각 개별 운동체들의 대응도 대체로 소극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와 대중 앞에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잔치가 끝난 뒤 탈을 벗은 전두환 정권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폭압적 본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탄압의 광풍이 불었다. 10월 10일, 서울대 대자보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 인문대 담벽에 북한의 [민주조선] 기사 내용을 옮긴 대자보가 부착되자, 치안본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다.

10월 10일 서울대 인문관 담벽에 붙은 [민주조선] 대자보
 10월 10일 서울대 인문관 담벽에 붙은 [민주조선]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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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에는 유성환의원 사건을 일으켰다. 신민당 국회의원 유성환이 회기 중에 "우리나라 국시는 반공이 아닌 통일이어야 한다."고 한 발언을 문제 삼아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그는 결국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0월 말에는 건국대 사건이 터졌다. 10월 28일부터 4일간 전국 26개 대학생 2천여 명이 건국대학교에서 농성을 벌이다 1289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 도중에 경찰이 대거 교내에 진입하자 건물 안으로 밀려간 학생들이 예상에 없던 농성에 들어갔던 것이다. 농성 4일째 되던 10월 31일에 2대의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펼쳐졌다.

1.10월 28일 약칭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석한 학생들. 어깨동무를 한 채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에서 비폭력 평화시위였음을 알 수 있다. 2.10월 31일 작전명 '황소30'으로 경찰이 교내로 진입하고 있다 3.토끼몰이식으로 학교 안으로 쫓겨 들어간 학생들이 흩어져 5개 건물에 나뉘어 농성하고 있다 4.헬기와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차례차례 학생들을 진압하고 있는 경찰 5.연행된 학생 1,520여 명 중 1,288명을 구속했다. 이는 역사상 최대 구속자 숫자다. 6.경향신문에 실린 당시 상황도. 이는 정권에서 미리 짜놓은 좌경 척결 시나리오대로 연출된 사건이었다
 1.10월 28일 약칭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석한 학생들. 어깨동무를 한 채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에서 비폭력 평화시위였음을 알 수 있다. 2.10월 31일 작전명 '황소30'으로 경찰이 교내로 진입하고 있다 3.토끼몰이식으로 학교 안으로 쫓겨 들어간 학생들이 흩어져 5개 건물에 나뉘어 농성하고 있다 4.헬기와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차례차례 학생들을 진압하고 있는 경찰 5.연행된 학생 1,520여 명 중 1,288명을 구속했다. 이는 역사상 최대 구속자 숫자다. 6.경향신문에 실린 당시 상황도. 이는 정권에서 미리 짜놓은 좌경 척결 시나리오대로 연출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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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10월 30일에는 금강산댐 사건을 일으켰다. 건설부 장관이 성명서를 내, 북한이 착공한 금강산댐은 군사전략적 저의에서 건설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방부 장관은 "상류로부터 떠밀려올 200억 톤에 달하는 물이 초당 230여 만 톤의 엄청난 폭류로 돌변해 핵무기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한강 유역을 휩쓸"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강산댐에서 내려온 물이 12시간 만에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를 빌미로 삼아 11월 한 달 동안 전국에서 금강산댐 건설에 반대하는 규탄대회가 열렸다. 정권은 방어용 댐으로서 이른바 '평화의 댐' 건설을 표방했고, 대대적인 모금 캠페인을 전개했다. 뒷날 이 캠페인은 거짓말에 기반한 부도덕한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났다. 1993년 감사원은 이 문제를 감사한 결과 북한의 수공 위협은 거짓이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11월 11일에는 민통련 해산 명령을 내렸고, 그를 집행하기 위해서 경찰이 사무실에 난입했다. 민청련 회원들은 민통련 사무실 강제 폐쇄 조치를 예상했었다. 그래서 장충동 분도회관 4층에 있는 사무실 사수를 위한 철야 농성에 합류했다. 하지만 쇠망치와 산소용접기를 앞세워 사무실에 난입하는 경찰 폭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11월 12일 새벽 5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이나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하던 20여명의 민통련과 민청련 회원들은 역부족을 느껴야 했다.

한편으로 비밀결사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그해 10월 17일부터 이듬해 2월 24일까지 구국학련 사건,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 사건, 엠엘당 결성 기도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제헌의회 그룹 사건,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등을 적발했다는 경찰의 수사결과가 신문 지면을 꺼멓게 물들였다.

민청련은 군사독재의 격렬한 탄압 공세에 결연하게 맞섰다. 민통련 해산명령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민통련 해산 명령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른바 '해산명령'이란 것은 당시의 악법들에서조차 그 근거가 없었다. 경찰이 들먹이는 '경찰관 직무집행법'에는 사회단체 해산에 관한 규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폭로했다.

민청련은 각오를 굳건히 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우리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임을 다짐했다. "우리는 때릴수록 강해지는 강철이 될 것이다"고 되뇌었다.

5.3인천사태를 계기로 삼아 시작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민통련 폐쇄를 정점으로 극에 달했다
 5.3인천사태를 계기로 삼아 시작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민통련 폐쇄를 정점으로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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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되는 민주화운동

하지만 거센 탄압은 운동을 위축시켰다. 탄압이 점점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민주화운동의 활력은 점차 낮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선전력과 대중 동원력이 미약했는데, 강화되는 탄압은 그를 더욱 약화시켰다.

민청련만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 전체가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를테면 1987년 1월 [민중신문]을 만들던 민청련 선전국은 고민에 싸였다. 통상 1면에는 각종 투쟁이나 집회 기사를 배치했었다. 그런데 집회든 시위든 간에 1백 명만 모여도 1면에 실어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다. 그만큼 민주화운동 진영은 위축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는 터에 악재가 겹쳤다. 11월 1일 수배 중이던 윤여연 전 사무국장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은신 거주지이던 방배동에서 체포돼 남영동 치안본부로 이송됐다. 부인 최경자와 민청련 가족들은 윤여연 구속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면회 요구투쟁에 나섰다. 작년에 김근태 의장에게 저질렀던 고문수사를 또다시 되풀이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아! 박종철

힘들었던 86년이 가고 새해가 밝았다. 정권의 강경한 탄압 드라이브는 변함이 없었고,  결국 파탄을 불렀다. 폭압으로 일관하던 철권통치가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던 것이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받던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이 고문수사 끝에 사망했다. 독재정권은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32시간이나 숨기고 있던 치안본부는 16일에서야 뒤늦게 "심문 도중에 일어난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했다. 수사관의 큰 소리 몇 마디에 놀라 쇼크사 했다는 주장이었다.

사람들은 그 억울한 죽음에 연민을 느꼈다. 또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권의 거짓말과 파렴치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하여 2월 7일에 개최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추도회가 열릴 예정인 명동성당과 그 일대 시가지는 전투경찰과 사복형사들이 촘촘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리본을 단 추모 군중이 모여들었다. "종철아 잘 가거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 없데이", "종철이를 살려내라", "고문살인 자행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라는 슬로건이 길거리에 나붙었다. 그날 오후 내내 명동, 종로, 을지로, 광교, 남대문 일대에서 시위대와 전투경찰대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오후 2시에 명동성당에서 21번 추모 타종을 울리자, 시내 곳곳에서 자동차들이 추도 경적을 울렸다. 무차별 최루탄 난사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시위대에게 밀리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종로3가에서는 시위대에게 파출소가 점거당하고, 무전기를 피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세운상가 근처에서는 전경이 시위대에 포위되기도 했다.

서울만이 아니었다. 광주에서는 1만여 명의 군중이 추도회 저지 규탄대회를 열었고, 부산에서는 5천여 명의 군중이 남포동과 광복동 등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대중시위운동은 3월 3일에도 다시 재연됐다. 박종철군 49재를 맞이하여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 대행진」이 개최됐다. 2.7투쟁보다는 못하지만 삼엄한 경찰병력의 그물을 뚫고 시위대열이 형성되었다. 종로 3가와 4가의 길거리, 세운상가 근처, 국도극장 앞 길거리 등지에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접전이 벌어졌다.

1.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린 명동성당 모습. 경찰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2.고 박종철군 49재인 3월 3일 조계종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이 경찰에 의해 봉쇄가 되었으나 청계천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모여 스크럼을 짜고 ‘정권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하고 있다. 3.2월 7일 추도회 전단지 4.3월 3일 49재 전단지 5.3.3 국민평화대행진 전단지
 1.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린 명동성당 모습. 경찰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2.고 박종철군 49재인 3월 3일 조계종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이 경찰에 의해 봉쇄가 되었으나 청계천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모여 스크럼을 짜고 ‘정권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하고 있다. 3.2월 7일 추도회 전단지 4.3월 3일 49재 전단지 5.3.3 국민평화대행진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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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두 차례 대중시위운동이 "민통련, 가톨릭, 개신교, 노동자, 청년, 학생, 기타 지방의 운동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신민당, 민추협까지 포함시킨 광범위한 공동투쟁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았다. 이 기조는 1년 전, 5.3인천시위 때와는 다른 것이었다.

5.3인천시위 때에는 대중이 폭발적인 민주화 열망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 세력이 그것을 수용하는 데에 실패했었다. 선도투쟁 일변도의 좌편향적 노선 탓이었다. 또 분파의 난립도 원인이었다.

그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청련의 입장이었다. 2.7추도회와 3.3대행진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투쟁한다는 대중투쟁의 원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민청련은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태그:#민청련, #박종철, #민통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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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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