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 영화에 삽입된 뉴욕 매거진 커버 이미지 일부. 빌 코스비의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의 모습이다. 영화 장면을 캡처했다.

▲ 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 영화에 삽입된 뉴욕 매거진 커버 이미지 일부. 빌 코스비의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의 모습이다. 영화 장면을 캡처했다. ⓒ KATAHDIN PRODUCTIONS


최근 각계에서 '미투 운동'(#MeToo)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유명 여성 배우들이 이 이슈를 주도하면서 불길을 지키고 있고, 한국사회에서는 주로 문단을 중심으로 관련 뉴스들이 형성되고 있다. 이처럼 지금 미투 운동의 활황은 상당 부분 거기 참가하고 있는 유명 인사들의 지명도와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 그리고 이런 흐름을 적극 활용하여 뉴스를 만들고 공급하는 언론 매체들의 경쟁 등에 빚지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Seeing Allred, 로버타 그로스먼과 소피 사테인 공동 연출)는, 미투 운동의 마중물이 된 '빌 코스비 성폭행 사건' 피해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데 일조한 여성 인권 변호사 글로리아 올레드의 삶과 성취를 조명한 영화다. 또한 미투 운동이 있기까지 약 50여 년 동안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고발해 온 수많은 미국 여성들의 행적을 돌아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올레드가 "나도 당했다"는 피해 여성들의 연쇄 고발을 통해 빌 코스비(미국 유명 코미디언, 성폭행 혐의가 폭로된 바 있다) 사건을 이슈화하고, 성폭력 사건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을 캘리포니아 주에 도입하고, 마침내 코스비를 법정에 세우게 된 일련의 과정을 큰 줄거리로 삼는다.

여기에 올레드의 개인사, 1970년대 중반부터 그가 여성 인권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최초의 변호사로 등장하기까지 과정, 이후 양육비를 제때 주지 않는 아버지들을 상대로 한 소송들과 다수의 성폭력 소송 건 등을 진행하며 '악명'을 떨친 그의 언론플레이 등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를 통해 그의 삶과 활동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지금 미투 운동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올레드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며 자신이 당한 일을 온 세상에 밝힌 피해 여성들은 하나같이 홀가분한 표정이 된다.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통해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두고 불운이나 자책으로 돌렸던 과거 체험에서 벗어났고 여기서 비롯된 나쁜 감정들을 비로소 몰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고발은 이런 자기 치유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고 자기도 같은 경험을 했다는 이들의 고백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일로만 치부했던 일이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인식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피해자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활동가로 거듭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미투 운동의 진짜 원동력이다.

물론 이런 '폭로' 방식을 두고 비판적인 시각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는 '올레드가 성희롱 소송만으로 2억5천만 달러를 벌었다'거나 '대중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한다'면서 그의 진짜 의도를 깎아내리는 시각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성폭력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입씨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영화

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 포스터 이미지

▲ 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 포스터 이미지 ⓒ 넷플릭스


이에 대한 영화의 입장은 분명해 보인다. 개별적인 사건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보다는 지금까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보여주면서 이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는 것이 현재 상황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기본적으로 이런 시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이런 움직임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열린 자세를 견지해야 하고, 운동 내부의 옥석을 가릴 필요도 있다고 믿는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올레드가 여성 인권을 신장하는 일에만 매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가 1980년대 후반부터 동성결혼 합법화와 동성커플의 입양 허용 등을 주장하면서 펼쳐 온 일련의 활동을 소개한다. 또 그가 게이 프라이드 행진에 참여해서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는 모습도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미국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렸을 때, 이전까지 어떤 공식 석상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던 그 '철녀'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포착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결국 올레드가 여성 인권 운동을 하면서 소수자 인권 전반으로 관심사를 넓히게 됐고 그에 걸맞은 실천을 끝없이 도모해왔다는 증거다. 또한 그를 향한 부정적인 평가 대부분이 얼마나 부당하고 공정하지 않은 것인지를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라는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이 'Seeing Allred'라는 영어 제목보다 본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적확하게 표현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미투 운동이 다른 분야 소수자 운동까지 포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부당하고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그룹 중 일부가 스스로 남성 폭력의 피해자를 자처하면서 게이나 트랜스젠더 등 다른 소수자들에 대해 몰지각한 언행을 퍼부으며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자정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소수자 운동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결국 같은 방향을 보게 되는 운동이다.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소수자 운동은 어느 순간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곧 강한 역풍을 의미한다. 이 영화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가 필자에게 남긴 가장 강력한 교훈이다.

그런 점에서 미투 운동과 소수자 운동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영화 말미에 올레드가 남긴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미투 운동의 확산을 바라보며 "마침내 미국 사회가 이 문제에 관한 한 '변곡점'에 도달했다고 봐도 좋으냐"는 방송 진행자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그야말로 지난 50여 년 동안 여성운동이라는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워 온 '백전노장'다운 일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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