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19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최종 38라운드 전북 현대와 수원 삼성의 경기모습. 전북 이동국이 2대1로 앞서가는 골을 넣고서 세리머니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79년 4월생 라이언 킹 이동국의 시계는 정말로 거꾸로 흐른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 오는 6월 러시아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있는 한국 축구대표팀의 간판 골잡이 김신욱이 최고의 골 감각을 자랑하고 있기에 스타팅 멤버는 당연히 김신욱이었다. 이동국은 벤치에서 이 경기를 시작했지만 후반전에 들어와서 0-2 점수판을 3-2로 뒤집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발리 슛 장인 말고도 그에게 또 하나의 별명을 붙여줘야 할 듯하다. 찰나의 순간에 방향을 바꾸는 부드러운 자세는 물론 오른발 감아차기 마무리 순간은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최강희 감독이 이끌고 있는 전북 현대(한국)가 13일 오후 7시 30분 전주성에서 벌어진 2018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E조 가시와 레이솔(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후반전 교체 선수 이동국의 2득점 맹활약에 힘입어 3-2 펠레 스코어 대역전승을 이루며 새 시즌을 시작했다.
GK 홍정남의 판단 실수, 아찔했던 전반전2017년 K리그 클래식 챔피언이자 2016년 이 대회 챔피언으로서 세 번째 우승 트로피를 노리고 있는 전북 현대는 성남 FC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바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 티아고와 FC 서울에서 많은 골을 터뜨린 아드리아노, 포항 스틸러스의 다재다능한 미드필더 손준호를 데려와 그 목표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첫 발걸음을 내딛는 바로 이 경기 시작은 나빴다. 어이없는 실수로 전반전에만 2골을 내주며 질질 끌려간 것이다. 경기 시작 후 10분만에 골키퍼 홍정남이 무리하게 페널티 지역 밖에까지 달려나와 공도 처리하지 못하고 라몬 로페즈에게 왼발 선취골을 내주고 말았다.
가시와 레이솔 미드필더 오타니의 역습 전진 패스를 따라 센터백 김민재가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골키퍼 홍정남이 골문까지 비우며 모험을 걸어야 할 필요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친동생 센터백 홍정호와 나란히 뛰면서 든든한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형이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전북은 시종일관 특유의 닥공을 시도했지만 마음처럼 골이 터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27분에 한방을 더 얻어맞고 모두가 허망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선취골 주인공 라몬 로페즈의 공간 침투와 날카로운 터닝 슛이 또 한 번 홍정남 골키퍼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왼쪽으로 몸 날려 가까스로 그 슛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바로 앞에 흘린 공을 에사카 아타루가 손쉽게 밀어넣었다.
0-2 점수판은 야심차게 출발한 전북 현대의 새 시즌 첫 경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봉동이장 최강희 감독은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동점골과 역전 결승골 주인공, 역시 '이동국'오른쪽 풀백 최철순 대신 이용을 들여보낸 것은 특별한 조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 신형민을 빼고 골잡이 이동국을 들여보낸 것은 정말로 놀라운 주문이었다. 손준호가 신형민 역할을 맡아서 뒤로 한 발 물러나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센터백 바로 앞에서 새 멤버가 과연 중심을 잘 잡아줄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최강희 감독의 조치는 과감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말처럼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딱 10분만에 만회골을 터뜨리며 가시와 레이솔을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재성이 오른쪽 구석에서 올린 코너킥을 이동국이 솟구치며 이마로 돌려넣었다. 이동국 주변에 가시와 레이솔 수비수들이 여럿 있었지만 라이언 킹의 점프 타이밍과 위치 선정은 가장 탁월했다.
전주성이 다시 뜨거워졌다. 하지만 골키퍼 홍정남은 전반전 실수에 이어 또 하나 큰 실수를 저질렀다. 65분에 던지기로 빌드 업을 시작하는 순간 어이없이 상대에게 공을 곧바로 빼앗긴 것이었다. 결국 이 실수는 가시와 레이솔 미드필더 김보경의 왼발 찍어차기까지 이어졌는데 빈 골문을 동생 홍정호가 지키며 이마로 걷어내야 할 정도로 아찔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형이 저지른 실수를 동생이 커버하는 진풍경이 나온 것이다.
이 고비를 넘은 전북은 더 바짝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섬세하게 가다듬어 나갔다. 75분 프리킥 세트 피스 기회에서 김신욱의 발리 슛이 상대 골키퍼 손에 맞고 떠오르자 공격에 가담했던 왼쪽 풀백 김진수가 몸을 날리는 멋진 발리 슛으로 2-2 동점을 만들었다.
어렵게 점수판 균형을 이룬 뒤 9분만에 그림같은 대역전 결승골이 터져나왔다. 말 그대로 이 경기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센터백 홍정호가 뒤에서 길게 차 넘긴 공을 향해 가시와 레이솔 수비수들이 밀고 올라왔다. 오프 사이드 함정이었다. 하지만 이 함정을 반대쪽에서 꿰뚫어보고 있던 인물이 따로 있었다. 바로 이동국이었다.
그의 눈은 정말로 라이언 킹처럼 날카롭게 상대 수비수들의 의도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국은 놀라운 안목뿐 아니라 기막힌 다음 동작으로 팬들에게 멋진 역전승 선물을 완성시켰다. 부드러우면서도 재빠르게 방향을 바꾼 다음 오른발 감아차기를 과감하게 날린 것이다. 각도가 예사롭지 않은 지점이었지만 이동국의 오른발 감각은 더도 덜도 말고 딱 골이었다.
가시와 레이솔 골키퍼 나카무라 고스케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곳으로 날아들어가 오른쪽 톱 코너 크로스바 하단을 살짝 스치며 그물을 출렁이게 만들었다. 강약 조절의 섬세함은 골잡이 이동국의 경지가 어디까지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이동국의 완벽함 덕분에 대역전극을 이룬 전북 현대는 오는 20일(화) 오후 9시 홍콩 스타디움으로 들어가 키치 SC(홍콩)와 두 번째 경기 일정으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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