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은 성소수자들이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도 올림픽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아시아 최초로 열렸다.

’2018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은 성소수자들이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도 올림픽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아시아 최초로 열렸다. ⓒ 유성호


"마음껏 즐기십시오. 이곳은 여러분의 집입니다(This is your house)."

크리스 오버홀트 캐나다 올림픽 위원회 사무총장의 환영사에 자리에 모인 20~30여 명의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성을 쏟아냈다. 이내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와 와인을 간단한 주전부리와 함께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붉은색 단풍잎으로 치장된 공간이었다. 위에는 따뜻한 색으로 빛나는 전구들이 있고, 아래에는 스탠딩 테이블과 바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느 '힙'한 동네 술집의 정경 같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무지개색 배지나 머리핀 같은 액세서리를 달고 있었다.

한국 성소수자 인권에서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될 현장. 지난 12일 오후 7시, 강원도 강릉 시내 캐나다 올림픽 하우스에서 '2018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 오프닝 리셉션이 열렸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도 올림픽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2010년 밴쿠버올림픽 때부터 시작된 '프라이드 하우스' 운동. 그 운동의 파도가 태평양을 건너 이곳 2018 평창동계올림픽까지 다다랐다. 무려 '아시아 최초'다.

올림픽 위에 무지개를 드리우다

 12일 오후 강릉 시내 캐나다 올림픽 하우스에서 ’2018 프라이드하우스 평창’ 오프닝 리셉션이 열렸다.

12일 오후 강릉 시내 캐나다 올림픽 하우스에서 ’2018 프라이드하우스 평창’ 오프닝 리셉션이 열렸다. ⓒ 유성호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 올림픽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으로 이번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미국의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선수인 애덤 리펀 그리고 프리스타일 스키 종목에 나서는 거스 켄워시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커밍아웃'한 게이다.

"…인종, 피부색, 성별, 성적지향, 언어, 종교, 정치 등의 견해 차이, 국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등의 지위를 이유로 차별이 없어야 한다."
- 올림픽 헌장 원칙 6조(Fundamental Principles of Olympism 6) 중에서

올림픽 헌장은 이 축제에서 아무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운동 안에서의 차별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랫동안 여성은 응원단이거나, 수상자에게 꽃과 메달을 전달하는 정도의 역할에 그쳤다. 여성이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성별에 따라 출전할 수 있는 종목이 다르다. '1등 신문'을 자처하는 한 일간지는 캐나다 여성 아이스하키팀 선수들의 사진에 성차별적인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트랜스젠더 선수들이 스포츠 경기 참가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수술을 올림픽 참가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은 공정한 경쟁의 원칙을 지키는 데 불필요할 뿐 아니라 관련 법률 제정 추세나 인권 개념과도 맞지 않는다."
-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가이드라인

'트랜스젠더' 선수들을 위한 국제올림픽위원회의 가이드라인은 이처럼 '성별'에 의한 차별을 지양하기 위한 일환이다. 트랜스젠더의 경우,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로부터 최소 2년 동안 호르몬 관리를 받은 선수만 출전 가능했으나 이제는 수술을 받지 않은 선수도 출전이 허용된다. 이처럼 성별이나 성적지향으로 인해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올림픽의 정신은 이번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도 이어진다.

"올림픽 참여기관은 올림픽 헌장에 따라, 인종, 종교, 정치, 성별 등을 이유로 국가나 사람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허용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올림픽 대회운영 전 과정에서 장애인, 여성, 노인, 이주외국인, 성소수자 등 소수자의 참여기회를 확대해야 하며, 참여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의 차별과 불이익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윤리헌장 4조 1항 '차별 금지 및 다양성 존중'

하지만 선언과 실천은 다르다. '프라이드 하우스'는 올림픽 무대에서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억압받지 않도록,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운동(Exercise) 안의 운동(Movement)이다.

붉은 단풍잎, 무지개와 손잡다... 한국은?

 12일 오후 강릉 시내 캐나다 올림픽 하우스에서 ’2018 프라이드하우스 평창’ 오프닝 리셉션이 열렸다.

?'프라이드 하우스'는 올림픽 무대에서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억압받지 않도록,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운동(Exercise) 안의 운동(Movement)이다. ⓒ 유성호


 '프라이드 하우스'는 올림픽 무대에서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억압받지 않도록,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운동(Exercise) 안의 운동(Movement)이다.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윤리헌장 4조 1항에 '올림픽 대회운영 전 과정에서 장애인, 여성, 노인, 이주외국인, 성소수자 등 소수자의 참여기회를 확대해야 하며, 참여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의 차별과 불이익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 유성호


2010년 밴쿠버 이후 프라이드 하우스 운동은 뚜벅뚜벅 여기까지 걸어왔다. 러시아에서 '반동성애법'이 통과하면서 2014 소치동계올림픽 때 위기를 겪기는 했지만, 외곽에서 유의미한 활동을 해나가며 명맥을 이었다. '2018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은 프라이드 하우스 인터내셔널의 조력으로 캐나다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돕고,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주도해 열리게 됐다. 오프닝 리셉션이 캐나다 하우스에서 열릴 수 있던 것도 캐나다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도움 덕분이었다.

리셉션 참가자 중 한 명인 크레이그 바틀렛씨는 이태원에서 '열린문 공동체 교회'를 운영하는 캐나다 출신 목회자다. 성소수자 사회에서 유명 인사인 그는 "캐나다인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다"라면서 프라이드 하우스가 캐나다 올림픽 하우스에서 열린 데 대해 매우 뿌듯해했다. 목사인 그는 '반동성애' 기치를 내건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움직임에 관해서 "매우 슬프다(very sad)"고 평했다.

"우리 교회에서만 2명의 성소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보수 기독교계)이 그런 말을 할수록 성소수자들은 상당한 억압과 공포를 느낀다. 교회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영적인 삶(Spritual Live)을 사는 게 가능하다. 교회는 모두에게 열려있다. 주님께서는 모두를 받아주신다."  

국가기관이 직접 나서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캐나다에 비하면 우리가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예컨대 지난 2017년, 여성·성소수자 인권단체인 퀴어여성네트워크는 '제1회 퀴어여성생활 체육대회'를 개최할 계획이었으나, 동대문구시설관리공단이 동대문구체육관 사용 허가를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무산됐다. 사용료까지 모두 지불한 상황이었지만,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였다(공식적인 사유는 '천장 누수 수리'였다). 양은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 역시 한국과 캐나다의 온도차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커밍아웃한 게이이자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신필규씨는 이번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을 함께 준비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동대문구(시설관리공단)에서 퀴어 여성들의 체육대회를 일방적으로 취소한 적도 있지 않나. 매일 수영을 다니는데, 나도 수영장에서 출입금지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면서 "그렇기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스포츠에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의미있는 활동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오프닝 리셉션을 연 것만으로도 뿌듯하다"라고 덧붙였다.

특히나 이번 평창올림픽은 성소수자가 탄압 받았던 소치올림픽 이후의 첫 동계올림픽이며 성소수자가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다 출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아시아 지역 최초로 열리는 프라이드 하우스라는 점까지 겹치면서 그 역할과 책임이 커졌다. 때문에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는 지난 2년 동안 최선을 다해 이번 프라이드 하우스를 준비했다.

이날 프라이드 하우스 인터내셔널의 이사인 케프 세넷씨는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이 무사히 열리게 되어서 무척 기쁘고,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세상은 더 좋아지고(get better) 있고,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세대 간 격차(generation gap)도 줄어들고 있다"라면서 "프라이드 하우스가 한국을 (성소수자에게)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평창에서 프라이드 하우스를 준비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한국의 스포츠 분야는 '성(Sexuality)'에 대해서, 심지어 성희롱(Sexual Harassment) 이슈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주요 목표는 '가시성(Visibilty)'을 만드는 것이다. 스포츠에서 많은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을 준비한 윤다림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국제연대팀장은 오프닝 리셉션을 여는 축하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마이뉴스>는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이 한창 준비 중이었던 지난 1월 31일, 서울 망원동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사무실에서 그를 한 차례 만난 바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성소수자 선수와 관객을 위한 공간인 '프라이드하우스'가 만들어진다. '프라이드하우스'를 준비하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국제연대팀장 '캔디'가 홍보물을 들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성소수자 선수와 관객을 위한 공간인 '프라이드하우스'가 만들어진다. '프라이드하우스'를 준비하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국제연대팀장 '캔디'가 홍보물을 들고 있다. ⓒ 권우성


"한국이 맡고 있는 국제적인 위치와 책임이 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국민 개개인에게도 그렇고, 소위 말하는 '국격', '국가 이미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휴전결의안이 유엔총회서 채택(2017년 11월 13일 통과)이 되는 과정이 성 소수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올림픽 헌장 6조를 지킨다'라는 문구를 넣는 걸 가지고 러시아와 이집트가 반대 로비를 했고, 찬성을 위해 로비한 다른 나라들도 있었다. 물밑작업이 치열했다. 이 초안의 결의문은 우리 정부가 썼고, 그 결의문에 결국 모두가 결의를 한 거였다. 그러니 그게 잘 지켜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스포츠는 성소수자에게 폐쇄적이다. 하지만 스포츠에 참여하는 사람들 혹은 관찰하는 사람들 중 어딘가에 분명히 성소수자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성 소수자가 있든 없든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사람들이 '평등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모두를 위한 평등'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게 있다. 인권과 평등이라고 하는 건, 인간이라고 하면 누구나 대해져야 하는 어떤 위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공감대를 넓히려고 한다.

우리가 이 올림픽에 저항할 수 있는 건, 올림픽에 자정의 목소리를 내고 요구하는 것이다. 다양한 올림픽 참가자들 중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아무도 탄압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라이드 하우스는 성소수자를 가시화하고, 환영하고, 그 안에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걸 이야기하는 운동이다. 환대하는 운동, 환대를 통한 저항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성소수자 선수와 관객을 위한 공간인 '프라이드하우스'가 만들어진다. 사진은 무지개 색깔로 만들어진 성화배찌.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성소수자 선수와 관객을 위한 공간인 '프라이드하우스'가 만들어진다. 사진은 무지개 색깔로 만들어진 성화배지. ⓒ 권우성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은 지난 6일, 스포츠 보도용 성소수자 미디어 가이드 라인을 발표했고 9일에는 평창과 강릉 등 올림픽 경기장 주변에 성소수자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게시했다. 시민들의 반응도 호의적이고, 응원을 보내는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오는 17일 브런치 뷰잉 파티, 24일에는 레인보우 플래시 몹을 기획 중이며, 모니터링 사업도 폐막 때까지 꾸준히 할 예정이다. 차별적인 언론 보도 제보도 받고 있고, 아카이빙 작업도 할 계획이다.

오프닝 리셉션이 한창인 그 때, TV 화면에서는 캐나다 피겨스케이팅 팀이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었다. 이 팀의 선수 중 한 명인 에릭 레드포드는 피겨 팀 이벤트 페어 프리에서 1위를 달성한 실력 있는 선수이다. 동시에 지난 소치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이후 커밍아웃한 게이이며, 게이 선수 중에서 최초로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이기도 하다.

그렇다. 성소수자는 우리 곁에 어디에나 있다.


프라이드하우스 평창동계올림픽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퀴어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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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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