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대한민국 선수단 결단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격려사를 하고 있다.

2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대한민국 선수단 결단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격려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지난 16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진행된 이낙연 국무총리의 신년 기자간담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문제는 당시 화제였다.

하지만 최근 언론 등이 진행한 관련 여론조사에 따르면, 단일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더 높았다. 불타오르는 부정적 여론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기름을 끼얹었다. 이 총리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여자 아이스하키는 메달권에 있는 팀도 아니고 우리 팀은 세계랭킹 22위, 북한은 25위"라는 말에 이어 "우리 팀은 올림픽에서 한두 번이라도 이기는 것을 당면 목표로 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이 발언 하나로 이낙연 총리의 스포츠에 관한 인식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해당 발언만 고려해보면 그가 스포츠 문외한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참가 자체로 무한한 영광을 느끼는 올림픽 무대에 참여하는 선수단을 두고 '메달권'을 들먹인 것이다.

논란이 계속되자 이낙연 총리는 수습에 나섰다. 이 총리는 지난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정부업무보고 자리에서 "제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점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낙연 총리는 "여자 아이스하키팀에 기량 좋은 북한 선수 몇 사람을 추가해서라도 올림픽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 선수들 사이에서 생기고 있다는 얘기를 정부 안에서 들었다. 저의 발언으로 상처받은 분들에게 사과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총리는 문제 발생 후 비교적 빠르게 해명을 했지만 달아오른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북한의 전력이 한국보다 떨어지는 사실을 국민들이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총리의 발언은 구차한 변명'이라는 지적도 많다. 단일팀이 구성된 이상, 한국 선수들 중 일부는 충분한 출전 기회를 보장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사실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모든 분야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이 총리가 스포츠에 대해 무지해도 크게 상관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의 탈을 썼을 뿐 이면을 보면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문제는 개인의 가치와 국가의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이낙연 총리가 국무총리로서 국가의 이익에 손을 들어줄 입장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 발언으로 인해 개인의 가치와 스포츠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특히 기성세대보다 개인의 가치를 높게 책정하는 20·30대들이 이 총리의 발언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급속도로 여론이 악화됐지만 정부는 남북 단일팀 추진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남측 선수 23명에 북측 선수 12명, 총 35명의 최종 단일팀 엔트리가 확정됐다.

'언더독'의 반란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신임 감독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정식 감독계약 체결식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 감독은 이날 회견에서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동남아시아 정상, 아시아 정상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신임 감독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정식 감독계약 체결식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쯤에서 이낙연 총리가 봤으면 하는 두 장면이 있다. 먼저 최근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항서 전(前) 창원시청 감독이다. 박항서 감독은 현재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총 책임을 맡고 있다. 베트남 성인 대표팀 뿐만 아니라 그 아래 단계인 U-23 대표팀도 그의 지휘 아래에 있다.

지난 10월 베트남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박항서 감독은 단 3개월 만에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다. 역사의 시작은 지난 11일부터 시작됐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U-23 베트남 축구 대표팀은 AFC U-23 챔피언십 대회에 나섰다. 아시아 축구에서 최약소국 중 하나로 뽑히는 베트남의 선전을 기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첫 경기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김봉길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에게 선제 득점을 넣었다. 비록 1대2로 역전패를 허용했지만 경기력은 호평을 받았다. 이번 대회의 또 다른 강호 호주와 가진 2차전에서 베트남은 1대0 승리를 거두며 이변을 일으켰다. 호주와 경기에서 승점 3점을 확보한 박항서호는 3차전 시리아와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4점으로 조 2위로 8강행 티켓을 따냈다.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었다.

베트남의 질주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8강에서 베트남은 이라크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3대3 혈전을 벌인 끝에 승부차기에서 5-3으로 이라크를 누르고 준결승에 도달했다. 베트남 축구 역사를 넘어 동남아 축구 역사상 첫 4강이었다. 준결승은 더 극적이었다. 카타르를 상대로 선제 실점을 내줬지만 동점골을 뽑아냈고, 후반 41분에 추가골을 허용하며 패색이 짙었지만 다시 한 번 동점골을 신고하며 2대2로 경기를 연장전까지 끌고갔다. 연장전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양 팀은 승부차기에 돌입했고, 8강전에 이어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은 베트남의 손을 들어줬다.

 정현이 지난 18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른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2회전에서 공을 받아치고 있다.

정현이 지난 18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른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2회전에서 공을 받아치고 있다. ⓒ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이 아시아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사이 테니스계에도 한국인 바람이 불었다. 2018 호주 오픈 테니스 대회에 참가한 정현(22, 한국체대, 삼성증권 후원, 세계 랭킹 58위)이 연일 승전보를 보냈다. 남자 단식 3회전에서 세계 랭킹 4위 알렉산더 즈베레프(21, 독일)를 상대로 세트 스코어가 1-2까지 밀리며 고전했지만, 남은 세트를 모조리 잡아내면서 역전승을 거뒀다. 이변이 적은 스포츠인 테니스에서 랭킹 58위의 선수가 4위 선수를 꺾는 것은 크나큰 사건이었다.

즈베레프를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한 정현은 16강전에서 한 때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군림했던 노박 조코비치(31, 세르비아, 세계 랭킹 14위)를 세트 스코어 3-0으로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조코비치가 온전한 컨디션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를 상대로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승리를 한 사실은 놀라웠다.

한국인 최초로 테니스 메이저 대회에서 8강까지 진출한 정현의 역사는 계속됐다. 8강에서는 자신보다 하위 랭커인 테니스 샌드그렌(27, 미국, 세계 랭킹 97위)을 비교적 가볍게 격파하면서 준결승까지 도달했다. 다음 상대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다. 어려운 승부가 예상되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아시아인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이 가시권 안으로 들어온다.

'언더독(Underdog)'들의 대반란이다. 베트남 뿐만 아니라 동남아 축구는 아시아 축구계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다. 축구 열기는 유럽 못지 않지만 실력은 아시아 무대에서도 명함을 내밀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우승은 커녕 조별리그 통과가 동남아시아 팀의 지상목표다. 한국 테니스계도 마찬가지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영향력이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철저한 테니스 약소국이다. 축구는 인기 종목이지만 테니스는 비인기 종목이란 서러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박항서 감독과 정현은 이 난관을 뚫어냈다. 정확한 문제 판단과 강렬한 동기부여로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세계 최고를 목표로 셀 수 없는 땀방울을 흘린 정현은 그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대회 시작 전에는 '메달권'으로 분류되지 못했던 이들의 기막힌 반전이다.

스포츠의 진정한 매력

대중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스포츠를 접하는 개인과 스포츠의 특성마다 그 이유는 판이하다. 그럼에도 스포츠를 관통하는 공통의 매력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역시 '반전'이다.

그렇다. 스포츠의 진정한 매력은 '반전'이란 요소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이유는 결과와 그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을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에게 '완벽함'이란 없다.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끼리 대결하는 스포츠는 수많은 변수들로 가득하다.

결과를 뻔히 아는 스포츠 경기는 재미가 없다. 항상 이기는 사람 혹은 팀만이 존재한다면 그 종목은 존재 자체를 크게 위협받을 것이다. 브라질이 매번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로저 페더라가 모든 테니스 대회 타이틀을 싹쓸이 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궁금증과 기대감을 가지고 경기를 지켜본다.

박항서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 코치를 맡으며 주목받기는 했지만 감독으로서는 관심을 크게 받지 못했다. K리그에서 경남FC와 전남 드래곤즈, 상주 상무 감독을 역임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비인기 구단 감독으로서의 상대적 한계를 경험했다. 지난해까지 감독으로 있었던 창원시청은 심지어 내셔널리그 팀이었다. 박항서는 단 한 번도 이슈의 중심에 서지 못했었다.

그의 불완전한 경력에 베트남 축구도 우려를 드러냈다. 국내 팬들의 기억에서는 점차 잊혀지고 새롭게 부임한 팀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순간 박항서는 자신의 지도력을 유감없이 펼치며 베트남 축구의 영웅이 됐다. 축구를 넘어 베트남 전체가 박항서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고 있을 정도다. 마침 같은 대회에 참가한 한국이 준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에게 1대4로 대패하면서 그의 반전 스토리는 더욱 빛나고 있다.

시력 교정을 위해 테니스 라켓을 잡은 정현도 비주류였다. 테니스 바닥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유망주로 기대를 받았지만 테니스 불모지 한국에서 정현의 존재감은 미비했다. 최근 가파른 성장세는 테니스에 관심있는 소수에게만 전해졌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호주 오픈이 시작하기 전에는 비인기 종목을 대표하는 선수 정도에 불과했던 정현이었다. 그런 평가는 이제 끝났다. 조코비치와 경기 승리 이후 호주 오픈 주최 측의 평가처럼 정현은 '명동을 자유롭게 거닐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박항서 감독과 정현의 선전을 예상하는 이가 많았다면 현재 대중들이 그들에게 느끼는 감동의 정도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환갑을 바라보는 축구 감독과 이제 약관의 나이를 갓 넘어선 테니스 선수는 모든 예측을 뒤엎고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메달권'에 있지 않던 두 한국인이 '메달권'에 있던 이들을 뛰어넘는 재미와 환희를 조국에 있는 국민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여자 아이스하키도 그럴 가능성과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면 그 가치가 훼손될 수도 있다. 이낙연 총리에게 묻고 싶다. 지난 일주일 간 축구와 테니스 경기를 봤는지, 봤다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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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박항서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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