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염력>의 한 장면.

영화 <염력>의 포스터. ⓒ NEW


<부산행> 흥행 직후 만들어진 한 자리에서 연상호 감독은 "초능력이 생긴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몇몇 기자들에게 털어 놨다. 가제라는 걸 강조하며 '염력'이라는 제목도 말했다. 약 2년이 흘렀다. 가제는 그대로 영화의 제목이 됐고, 평범한 한 남자의 정체는 '아빠'였다. 

지난 23일 언론에 선 공개된 <염력>은 연상호 감독의 전작 몇 편과 정서적으로 맞닿아 있다. 가장 최근작 <부산행>은 좀비 출현이라는 상상력에 국가적 위기를 덧댄 이야기로 '재난블록버스터'라고 소개되곤 했다. 또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는 일종의 스릴러로 각각 과거에 겪은 폭력에 대한 잔혹한 각성과 종교적 광신 등을 그리고 있다.

정반대의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강한 주제의식과 사실적 묘사로 성인 애니메이션의 대표주자로 잘 알려져 있다. 마치 무표정하고 멍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엔 이글이글 타오르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듯, 그의 작품들은 그런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관객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곤 했다.

집안 문제로 딸과 아내를 두고 떠난 남자. 그리고 부지불식 간 초능력을 얻어 다시 딸에게 돌아간다는 설정의 <염력>은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분위기가 정반대다. 은행 경비원인 석헌(류승룡)과 홀로 치킨 가게를 운영하던 딸 루미(심은경) 사이의 화해와 정을 강조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전반적으로 소소한 감동과 웃음, 그리고 가족주의가 깔려있다.

물론 상업성을 노린 메이저 투자배급사와의 기획영화라서 그럴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만큼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 정서가 필요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염력>이 마냥 따뜻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재개발 광풍에 내쫓기는 루미를 비롯한 여러 자영업자를 그려서일까.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영화 <염력>의 한 장면. ⓒ NEW


언론 공개 직후 <염력>이 지난 2009년 발생한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이 많다. 영세 자영업자들을 내모는 용역 업체와 건설회사, 그리고 그들에게 협조하며 무리하게 공권력을 남용하는 경찰의 모습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건물에서 발생한 불길을 피해 옥상으로 피신한 세입자들을 상대로 컨테이너 박스를 올려 경찰들에게 진압하게끔 하는 장면에선 영락없다. 

"용산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초인적인 이야기를 다룰 때는 한국의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다룰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생각하며 도시 개발을 떠올렸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계속 존재해왔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시스템 문제와 인간적인 히어로와의 대결을 그리고 싶었다." (연상호)

톤과 매너의 문제지 사실 <염력>은 연상호 감독이 꾸준히 그리고자 했던 현실, 그것도 대한민국과 그 구성원들의 민낯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실사 영화 두 편을 하니 뭔가 변했다는 의심은 잠시 접어둬도 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용산참사를 소재로 소모시킨 게 아니라 SF 적 상상력에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나름 진정성 있게 녹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땅에 발붙인 인물들

그 증거가 <염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주인공 석헌은 불가사의 한 능력을 얻긴 하지만 마냥 정의롭진 않다. 상가 사람들과 힘을 합쳐 저항하려는 딸을 윽박지르며 우리만 잘 먹고 살자고 가르쳐 들기도 하고, 동시에 상가 사람들의 노력 없음을 질타하는 꼰대기도 하다. 먹고 사는 문제에 목숨을 걸었던 베이비 붐 세대, 즉 기성세대들에게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석헌이 용역과 맞서고 사람들을 구하는 행동은 사실상 딸에 대한 아빠로서의 미안함,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은 가장의 소박한 욕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늘을 날고, 각종 사물을 마음대로 이동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석헌이지만 그게 전혀 경이로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보통사람, 아니 오히려 보통사람 이하의 이기심을 가진 석헌을 통해 <염력>은 싸구려 신파가 아닌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감정의 울림을 담보한다. 이 세상 모든 부족한 이들의 각성은 그 자체로 감동이니 말이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영화 <염력>의 한 장면. ⓒ NEW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영화 <염력>의 한 장면. ⓒ NEW


재개발 사업에 저항하는 상가 사람들도 매순간 정의롭진 않다. 함께 힘을 모아 바리케이드를 만들다가도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선 각자 도망가려 하거나 다친 사람을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염력>은 주요 등장인물보다 마치 풍경처럼 스치는 주변 인물에 더 눈길이 간다. 특히 영화 초반 석헌의 직장 동료인 청소부 정씨(예수정)를 보자. 커피 한 잔에 입맛을 다시다가 어설프게 은행 믹스 커피를 다발로 훔치다가 직원에게 걸려 수모를 당한다. 단 수십 초에 지나지 않는 이런 장면이 <염력>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분명 <염력>은 모양새 좋고 세련된 작품은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도 단순하고 단편적이라 연상호 감독의 전작에서 일부 보인 입체감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인물 묘사와 정서  면에선 충분히 공감 가능하니, 주저 말고 관람해볼 것을 권한다.

한 줄 평 : 현실적인 이 초능력자의 어깨를 충분히 안아주고 싶다
평점 : ★★★(3/5)

영화 <염력> 관련 정보

연출 및 각본 : 연상호
출연 : 류승룡, 심은경, 박정민, 김민재, 정유미
제공 및 배급 : NEW
제작 : 영화사 레드피터
크랭크인 : 2017년 4월 17일
크랭크업 : 2018년 1월 31일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 101분
개봉 : 2018년 1월 31일


염력 류승룡 심은경 박정민 정유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