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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세계의 젊은 작가들, 평창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 국제인문포럼에서는 세계 문학의 미래를 맡게 될 젊은 유망 작가들을 초청하여 우정과 연대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외 참여 작가들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삶의 전 방면에 걸친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분쟁, 그로 인한 고통을 문학을 매개로 조망한 후 이러한 시대에서 ‘평화’의 가치를 논합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문학'에 대한 신철규 작가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2017년 11월 16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거치된 세월호 앞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이 해양수산부의 수색 종료 방침을 수용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7년 11월 16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거치된 세월호 앞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이 해양수산부의 수색 종료 방침을 수용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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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은 배가 침몰하고 정부의 안이한 사고 처리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진실을 무마하기 위해 저질러진 권위주의적 억압의 극단적 행태들과 자본주의적 시스템 전반에 대한 반성들이 함께 잇따랐기 때문이다. 비상사태에 가까운 우리 사회의 위기와 그것의 전면적인 노출에 따른 불안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잔존하고 있다.

이 사태는 우리의 생존이 '경계 위에서의 삶(sur-vie)'(자크 데리다)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유령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 사건 및 희생자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분리될 수 없었으며 희생자들을 자신의 일부처럼 동일화하면서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들을 상징적으로 내면화해서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의 비현실성은 우리의 실감(實感)을 넘어선 것이었다. 지난 정권은 '순수한 애도'라는 말로 애도를 차단함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우울증과 무기력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시를 통한 '악'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은 아마도 지배 질서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아내거나 희망적인 전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가 직접적인 언술이 되는 순간 휘발되거나 '강요된 화해'에 떨어질 가능성 또한 커진다. 스피박의 말처럼, 급진적인 비판은 동화를 통해 타자를 전유할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는 이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질서가 어떻게 인간을 비참한 바닥에 쓰러트리게 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시가 직접적으로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더라도, '수용소가 되어버린 천국은 과연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세계는 언제부터, 그리고 무엇 때문에 피의 정원이 되었는가?' '테러리스트가 믿는 신과 피해자들이 믿는 신은 과연 동일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세계의 더 크고 낮은 슬픔에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슬픔이란 무엇인가? 또는 왜 우리는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슬픔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지속적인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적으로 외부에서 습격해 들어오는 슬픔이다. 지속적인 슬픔은 우리가 유한한 몸과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한계 조건에 의해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감정 상태라면, 순간적인 슬픔은 우리가 그러한 한계 조건을 잊고 지내다가 그것을 새롭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슬픔을 언제 느끼는가? 자신의 모든 애정을 쏟아 부은 상대방에게서 모진 말을 들었을 때, 혹은 반대로 우리가 그런 모진 말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믿었던 타인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이 세계의 벽과 마주했을 때 등등 우리는 나와 세계의 어긋남에 직면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이 슬픔은 주로 내가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는 막막한 무력감을 동반하는데 그것은 주체의 왜소화와 세계의 거대화로 인한 격차를 더욱 실감하면서 우리는 슬픔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그러한 슬픔에 빠져 또는 잠겨 있을 때 우리를 더욱 가라앉게 하는 것은 그 슬픔을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나'와 '세계'의 불일치 때문에 느끼는 소외감과 고립감에 의해 내면으로 더욱 깊이 침잠하고 타인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한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슬픔을 느끼는 상태는 슬퍼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슬픔을 표출하지 못할 때인지도 모른다.

슬픔은 위험하고 독성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나 살아가야 할 이유를 희미하게 하며,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불연속과 불균형을 초래한다. 하지만 슬픔은 병적인 현상이 아니기에 그것을 치료하거나 고칠 수는 없다. 대개 슬픔의 상황은 어떤 현실적인 불가능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친족이나 가까웠던 타인의 죽음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슬픔을 특권화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내 슬픔을 알아?'라든지 '너는 나만큼 슬프지 않아!'라는 식의 특권화는 어떤 대화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타인의 정서, 그중에서도 특히 근원적인 고통, 상실과 관련된 '슬픔'에 대해서는 그 깊이나 정도를 우리는 어떻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자신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진정성을 은연중에 의심하거나 폄하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오히려 공감과 이해에 도달하여 공적 지평의 확대를 꾀하려는 진정성을 훼손하는 데 기여한다. '가위로 자르듯이' 그렇게 쉽게 진정성과 비진정성을 재단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얼마나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가.

우리가 고통의 편에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고통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밀쳐낸 적은 없었던가. 우리의 고통으로 인해 오히려 타인을 배제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고통의 나눔은 자기를 더 큰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만큼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을 상처주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시인은 슬픔에 빠져 있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이 작동하는 방식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미지로 눈앞에 현시하여 '제대로' 슬퍼하는 존재이다.

지난 십년간의 포스트파시즘적 체제에서 '고통의 무감각' 때문에 괴로워했다. 사회는 끊임없이 불안을 조장하면서 시민과 약자들의 호소에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행복에 대한 전망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거대한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 같은 환상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완벽한 불확실성과 우연성에 좌우되는 것이다.

앞날은 칠흑같이 불투명하고, 죽고 사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힘―개인적 분노까지 포함해서―에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인간을 더 이상 사고하고 감각하는 생명체가 아니게 만들어버린다. 말 그대로 '발가벗겨진' 상태로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동물로 타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호도하는 위선적인 인간들에게 우리에게는 여전히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무관심과 무차별(차이없음)은 영어나 불어에서 하나의 단어로 표기된다. indifference. 관심을 두지 않으면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차이는 단순히 이 사물과 저 사물의 외관이나 내용적인 면에서의 다른 점을 짚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치의 경중을 따짐에서 비롯된다. 중심과 주변, 위와 아래, 선과 후 등에 대한 질서를 매기지 않으면 우리는 사물을 인지할 수 없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에게 흑과 백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두 가지 모두 회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물도 회색으로 통일될 수는 없다. 이 세계에 대한 '관심 없음'을 '차이 없음'으로 처분해버림으로써 자기의 양심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양심을 뜻하는 영어인 conscience는 '같이, 함께(con)'와 '알다, 보다(scientia)'가 합쳐진 말이다.

자기의 특수한 시선이 보편적 기준과 얼마나 다른지 그른지, 시대의 상황에서 자신의 소신이 그릇된 것인지 옳은 것인지, 자신의 판단이 공동체를 위하는 것인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독단적인 양비론에 빠진다면 그것이 바로 양심(함께 봄)을 저버리는 것이다. 내가 몰랐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며, 공감의 폭을 확장하지 않는 순간 인간은 몰락하게 될 것이다.

[작가 소개]
1980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신철규 시인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2011년 시 '유빙'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가 있다.


태그:#세계작가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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