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쇼맨>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 <위대한 쇼맨>은 가진 것 없던 비천한 백인 남자 '바넘'이 흑인,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를 모아 공연을 시작하고 쇼 비즈니스 산업으로 크게 성공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영화입니다. 저는 날카로운 비평가도 아니고 영화를 뜯어보는 걸 즐기는 편도 아닙니다. 영화는 영화로서 존재할 때 가장 의미 있고 즐겁게 볼 수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쇼맨>은 아름다운 음악과 환상적인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바넘이 벌인 공연은 인종차별과 인권유린, 프릭 쇼(기형쇼, 남과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이나 동물을 흥미 위주로 전시하는 공연)일 뿐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박애' '사랑' '성장'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로 치장시켜 놓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P. T. 바넘에 대해 찾아보니 여성, 장애인, 동물 학대를 저지른 비윤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마지막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위대한 쇼맨>은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을 화려한 뮤지컬과 아름다운 스토리로 미화시킵니다. 미화의 과정에선 개연성마저 떨어집니다. 영화 내용을 하나씩 보겠습니다.

단원들을 모으는 과정, 그는 정말 '평등가' 인가?

 위대한쇼맨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바넘은 외모, 성별, 모습에 구애받지 않고 단원들을 모집합니다. 이들은 바넘에게 "우릴 무대에 세우면 다들 싫어할 걸요"라고 우려합니다. 여기에 바넘은 "그게 포인트야"라고 답하며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게 해주겠다 말합니다. 모습에 상관없이 무대에 세워주겠다는 바넘의 모습은 언뜻 보면 모든 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박애' 정신과 닮아 보입니다. 하지만 바넘이 이들을 찾게 된 과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넘이 이들을 모으기 시작한 건 "아빠의 박물관에는 죽은 것들만 있어요. 살아있는 게 필요해요"라며 '인어공주' '유니콘' 등이 무대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어린 딸의 조언을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바넘은 딸들의 말을 바탕으로 신기하면서도 '살아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외모, 성별, 모습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들의 우려에도 "그게 포인트야"라고 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장애와 피부색이 바넘에게는 관객을 끌어오는 요소이니까요. 영화 내내 그를 박애주의자처럼 표현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평론가 '제임스 고든 베넷'과 공연 반대자

영화 속에서 그나마 바넘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면 바로 평론가 '제임스 고든 베넷'과 공연 반대자들입니다. 평론가 베넷은 영화 내내 바넘의 공연을 비판하는 글을 씁니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포인트는 '인권'이 아닌 '사기'입니다. 바넘이 사기로 관객들을 속인다는 것이지요. 시위자들이 비난하는 것도 '괴물들을 무대에서 내리라'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인권감수성이 지금과는 달라 윤리적인 비판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허구가 많은 영화입니다. 어느 정도 각색은 괜찮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에게 아픔과 괴로움을 줬던 '프릭 쇼'를 주제로 한 영화라면, 최소한 영화 어딘가에서는 인권에 관한 경각심을 이야기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니 린드'의 등장과 단원들의 외침, 전개의 엉성함

 영화 위대한 쇼맨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제니 린드는 바넘에게 부 외에 명예 또한 가져다주는 인물입니다. 바넘을 사기꾼이라 비난하던 이들은 제니 린드를 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줄곧 바넘을 괴롭히던 베넷마저 호평합니다. 이를 통해 바넘은 그토록 원하던 사교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스레 단원들은 뒷전이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가장 뒤쪽에 자리를 주고 연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단원들을 수단으로 대하는 바넘의 모습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에 맞서 단원들은 자신들은 당당하며 구경거리가 아님을 노래합니다. 고조 되어온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으로, 극중 가장 멋진 퍼포먼스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서커스 장 안에서의 외침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이 감정의 폭발이 향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넘에게 향한 것도, 세상의 시선에 향한 것도 아닙니다. 단원들의 각성을 보여주는 노래가 끝난 직후 자신들을 수단으로 대하는 바넘의 공연 쇼에서, 자신들을 신기한 듯 구경하는 사람들 앞에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섭니다. 바로 직전에 감정의 폭발이 있었던 이들 맞나 의심될 정도입니다.

이 부분의 개연성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억압받고 차별받아온 이들이 처음으로 감정의 폭발을 보여주는 장면은 단순히 관객들을 위한 눈요깃거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마지막, 바넘을 위해 존재한 인물들

 영화<위대한 쇼맨>의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줄곧 바넘을 비판하며 모질게 굴던 베넷은 "당신은 최소한 인종의 색으로 구분하지 않고 즐거움을 주었다, 다른 평론가였다면 당신보고 평등한 인류애를 실현했다고 말했을 것이다"라고 극찬(?)합니다. 개연성도 어색하지만 어이없는 대사입니다. 개인 이익을 목적으로 남과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흥미 위주의 볼거리로 만든 것이 인류애의 실현인가요? 볼거리로써 실현되는 인류애라면 없는 편이 낫겠습니다. 영화 내 다소 객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평론가의 말보다 바넘을 더욱 '박애주의자'로 만들기 쉬운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공연장이 불에 타 실의에 빠져있는 바넘에게 단원들은 "당신은 우리에게 진정한 가족을 만들어 줬다"며 위로하고 감사를 표합니다. 이들의 아름다운 성장과 우정을 보여주는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그건 정말 그들의 생각인가요, 아니면 바넘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미화의 과정인가요? 중간중간 바넘이 단원들을 무시하고 소홀히 대하는 모습들이 가감 없이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무리로 이들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그려내려면 그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단원들은 고마워합니다. 덕분에 우리가 세상으로 나왔다고. 이 고마움이 정말 그들의 생각일까요?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은 P.T. 바넘이 그의 단원들을 학대하고 인권적으로 유린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련의 과정을 보며, 저는 이 영화가 진취적인 남성의 성장 이야기인가 잠시 고민했습니다. 이 모든 인물들은 영화의 주인공 바넘을 위해서, 그리고 이 영화의 주제인 '인간애'를 위해서 끊임없이 소모됩니다. 자신의 열등감과 욕망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내내 상처 주지만 천사 같은 아내와 동료들은 별말 없이 그를 돕고 위로하고 보듬어 줍니다. 바넘이 그만큼 이들에게 신뢰를 쌓았나 돌이켜 보면 글쎄요, 이 영화만 봐서는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행복을 연출해 덮어놓으려 했지만 프릭 쇼는 계속됩니다. 사자가 불꽃을 뛰어넘고, 우리와 다르게 생긴 저들은 엔딩 무대에서 계속 전시되고 있습니다. 바넘은 정말 차별받던 이들을 무대로 이끌어준 평등가 일까요? 현실은 뮤지컬이 아닙니다. 영화의 포장을 뜯어내면 남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전시하고 즐겼던 어두운 역사뿐입니다.

엉성한 전개와 함께 '인간애', '박애'로 그려낸 이런 기괴한 쇼에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 인간 상품화가 만연합니다. 이들을 무대에 세워 누구나 평등하게 공연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바로 이 영화가 한 가장 나쁜 미화입니다. 이를 단순히 가난한 남자의 위대한 성공 스토리로 그려내도 되는 걸까요? 아픈 실화를 바탕으로 만드는 영화는 언제나 엄중해야 합니다.

실존 인물 P.T 바넘

 영화 위대한 쇼맨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실제 주인공인 P.T. 바넘은 미국의 엔터테이너, 쇼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현지에서는 <위대한 쇼맨>이 그의 악행을 미화하여 반영했다는 점 때문에 언론과 비평가들에게 많은 혹평을 받았습니다.

<더 가디언>은 "휴 잭맨의 새 영화는 P.T 바넘을 기념하지만, 역사를 착색(왜곡)하지는 말자"는 제목의 기사에서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흑인을 열등하다고 주장했고, 노예였던 흑인이자 시각장애인 여성 '조이스 헤스'(Joice Heth)가 죽은 뒤에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의 사체를 해부하는 전시를 벌였다"고 바넘을 비판했습니다.

< NBC NEWS >는 기사 "휴 잭맨이 연기한 P.T 바넘은 '쇼맨'의 폭력적인 인종차별주의를 지워버린다"에서 "80세의 '조이스 헤스'를 조지 워싱턴의 유모였던 160세 여성으로 홍보하고, 더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기 위해 술에 약한 그를 억지로 취하게 만든 뒤 모든 이를 뽑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바넘에 대한 평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떠한 인물이라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때문에 공과 과를 모두 가진 인물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쇼맨>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군무와 노래가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혹은 그들의 아픔을 덮은 채 그냥 지나쳐버리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위대한쇼맨 THEGREATESTSHOWMAN 위대한쇼맨리뷰
댓글1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