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재개봉 포스터

<원더풀 라이프> 재개봉 포스터 ⓒ (주)안다미로


몇 년 전 지인과 '죽음의 순간'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나와 동갑인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했다. 차 밖으로 튕겨져 나와 맨땅에 누워 있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내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죽을 때 자기 삶이 필름처럼 펼쳐진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거 정말 맞는 말이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행복했던 기억도, 후회스러운 기억도 그 짧은 순간에 생생히 몰려온다."

지난 4일 국내 개봉한 지 16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바로 이런 죽음의 순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영화로 확장시킨 작품인 것 같다. 사람이 죽으면 오게 된다는  중간세계 '림보'.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단 한가지 고를 수 있다. 기억을 선택하면 림보의 천사들이 그 순간을 필름으로 만들어준다. 망자는 스크린 위에 재생된 행복했던 기억을 보면서 그 기억만을 갖고 천국으로 옮겨간다.

삶의 보상으로 '이런 내세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 영화

'림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타인의 결정을 기다리는 불확실한 상태', '지옥의 변방', '망각의 구렁', '중간 상태' 등 다양한 뜻이 나온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천국과 지상의 중간 상태에서 모든 기억을 망각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만 영화에선 어떤 이들이 림보에 오는지에 대해 특별히 설명하지 않는다.

악인과 그들이 내세에 가게 될 지옥 같은 것에 대한 묘사나 성찰은 없다. 어쨌건 림보로 오는 이들은 상담을 통해 행복했던 추억을 선택하고, 일주일간 림보에서 머무르다가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원더풀 라이프>를 보는 이라면 누구나 정직하게 산 인생에 대한 보상으로 정말로 그런 내세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러한 설정만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영화 팬의 마음을 끌어당겨왔다.

한데, 망자의 행복했던 추억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일련의 작업은 실제의 '영화 작업'과 닮아 있다. 림보를 지키며 망자의 말을 친절히 들어주고, 그들이 적절한 추억을 선택하도록 곁에서 도우며, 필름으로 재구성하는 일을 하는 이들 역시 한때 인간이었다(이들이 왜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림보에서 머물며 이런 까다로운 일들을 묵묵히 수행하는지는 영화 말미에 드러난다). 이들이 일종의 영화 연출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이자, 스태프인 셈이다.

 <원더풀 라이프> 스틸 컷.

<원더풀 라이프> 스틸 컷. ⓒ (주)안다미로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스틸 컷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스틸 컷 ⓒ (주)안다미로


이들은 메가폰을 들고 모니터를 보고, 카메라 앞에 앉아 렌즈를 들여다보고, 영화녹음용 마이크를 들고, 세트를 설치하고 적절한 소품으로 장식한다. 마치 영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다.
 
영화예술을 이제 막 시작한 야심찬 젊은이가 영화에 걸었을 법한 기대와 비전, 설렘, 뚜렷한 자의식이 이러한 전개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이제는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이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젊은 시절 열정적이고 재능 넘치는 초심자였던 때,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애정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어 즐겁다. <원더풀 라이프>는 이 미래의 영화 거장의 불과 두 번째 작품으로, 삶과 인간에 대한 뛰어난 관찰자로서의 재능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사소한 추억,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소환되는 인물들

이렇게 여러 사람의 공동작업으로 탄생한 망자의 행복한 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실은 아니다. 망자의 오래된 불완전한 기억에 의지해 선택되고 재구성된 주관적인 세계다. 그래서 영화 속엔 종종 촬영을 통해 완성된 필름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추억으로 재구성된 화면은 필름이지만, 실제 사건은 베타 비디오 테이프라는 점도 재밌다. 망자의 추억을 객관적 사실 혹은 진실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진실을 선택하고 편집하면서 기억하고 싶은 방식대로 기억하곤 한다.

또 한 가지. 이 영화는 사후세계를 다루지만, 몽환적이거나 판타지에 기댄 장면은 하나도 없다. 낡은 폐교 같은 허름하고 오래된 건물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대화를 주고 받고, 영화로 재연을 하고 결과물을 상영하는 모습 등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프레임 안에 잡히는 낡고 평범한 오브제들이 사후세계 혹은 천국의 입구라는 영화 속 장소에 설득력을 해치는 것이 흠이다. 그 자체로 영화가 가진 개성과 매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부족한 예산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애초에 저예산 독립영화로 제작됐으나 영화의 높은 완성도 덕분에 와이드 릴리즈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매끈한 화면을 연출하는 데 신경쓸 만한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요즘 같은 개념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탄탄함과 집중력이 이러한 아쉬움을 모두 상쇄시킨다. 등장인물들은 자기 생의 가장 빛나는 한 순간으로 소환된다. 그런데 그런 순간을 찾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이것저것 떠올려 보지만 신통치 않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 찾은 추억은 생각보다 소소하고 평범하다. 인간의 삶은 대부분 불행으로 채워져 있고 어쩌다 행복이 반짝이는 찰나의 순간이 드물게 찾아올 뿐이다. 그런 행복의 기억은 살아가고 견디는 힘이 되곤 한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스틸 컷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스틸 컷 ⓒ (주)안다미로


앞서 이 영화가 모든 고통을 잊고 행복했던 기억만을 갖고 천국으로 가는 내세를 희망하고 바라게 만든다고 썼다. 그것에 더해 내 인생의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일까, 나는 그것만 갖고 영원으로 갈 수 있을까, 나는 사랑하는 이의 추억 속에 머물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같은 질문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영화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해결을 해줄 수는 없다. 다만 보여주고 함께 고민하고 작은 가치를 발견하게 해준다. 그렇게 영화는 결론을 내주고 해결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을 돕는다. 그것이 영화에 자기의 온 미래와 재능을 걸었던 젊은 영화인이 관객에게 보여준 작은 세계의 가치와 가능성이 아닌가 한다. 4일 개봉. 전체관람가.

사후세계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재개봉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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