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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오전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 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무대행사가 끝난 직후 퍼레이드가 진행 되고 있다.
 7월 15일 오전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 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무대행사가 끝난 직후 퍼레이드가 진행 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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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성소수자가 세상을 바꾼다. 행동하는 성소수자와 함께 세상을 바꿉시다."

올해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던 7월 15일 시청, 축제로 달아오른 열기와 폭우 때문에 습한 공기 속에서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준비한 멘트를 마쳤다. 많은 것이 처음이었던 2017년이었다.

나는 올해 퀴어 버스를 타고 대구퀴어문화축제에 참석했다. 서울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열린 퀴어퍼레이드 참가는 처음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축제 내내 지칠줄 모르고 춤을 추었고, 여기에 놀란 활동가의 제안을 받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선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의 행진 트럭에 올랐다.

처음 트럭에 올랐을 때는 그 높이 놀라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지만 보드카 두 잔의 힘을 빌어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아마 올해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이 모든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상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퀴어한 아홉수를 보냈다. 나와 친한 한 성소수자 친구는 이런 감상을 남겼다.

"신촌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던 시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꼬꼬마 퀴어가 트럭 위에서 끼를 뿜어내는 게이로 성장하다니 너무 감동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이하 행성인)는 올해 20주년을 맞았고 이를 기념해 회원들이 행성인을 소개하고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바람과 각오를 다지는 릴레이 영상 프로젝트, '행성인의 얼굴들'을 진행했다. 많은 회원과 활동가들이 이 작업에 함께 했고 나에게도 참여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물론 흔쾌히 하겠노라 수락했지만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중적으로 공개될 영상 속에서 나를 '성소수자'라고 소개해야 했다. 물론 그 영상의 파급력이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커밍아웃을 아직 하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보게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그 시기 나는 누군가 내가 동성애자임을 안다고 해도 딱히 두려울게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그걸 내 입으로 공개적으로 말하는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한 30초 정도 고민했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하자. 까짓거 이번 기회에 모두에게 알려보는 거야.'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의 20주년 사업으로 진행된 '행성인의 얼굴들' 프로젝트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의 20주년 사업으로 진행된 '행성인의 얼굴들' 프로젝트
ⓒ 페이스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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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도 없던 커밍아웃에 나선 사연

그리고 그것이 내가 예정에도 없던 커밍아웃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마치 '너는 검은 머리가 어울린다'는 엄마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수십년간 염색을 하지 않다가 어느날 홀린듯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때처럼, 그렇게 나는 공개적으로 내가 동성애자임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뭔가 큰 결단의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을 떠난 후 나는 단체를 중심으로 인간 관계를 형성했다. 그곳의 친구들은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관련된 활동을 하거나 본인이 성소수자인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게이인 나의 존재가 그 속에서 이상할게 아무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별다른 커밍아웃 없이도 나는 성소수자로서 잘 살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환경에 그런 사람들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먹고 살아야 했고, 그래서 회사에 가야했고 그 곳에는 직장 동료들이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나를 처음 만나기에 당연히 내가 게이임을 모르는 사람과도 섞일 때도 있었다. 가장 답답할 때는 내가 성소수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동시에 만날 때였다. 내 성적 지향이 큰 비밀도 아니지만 굳이 말하기는 어색했다.(이건 부담스럽기 보다는 익숙하지 않아서다. 자연스럽게 내가 성소수자임을 드러낼 수 있는 말하기 방식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누가 '입이 트이는 커밍아웃' 같은 책을 써줬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연애나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는 이상하게 경직되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 서둘러 화제를 전환하는 상황이 반복되어 왔다. 그런 배려가 싫은 건 아니지만 미덥지 못한 느낌이 든 것은 사실이다.

7월 15일 오전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 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무대행사가 끝난 직후 퍼레이드가 진행 되고 있다.
 7월 15일 오전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 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무대행사가 끝난 직후 퍼레이드가 진행 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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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어겼던 글쓰기의 원칙

그리고 아쉬운 점 한가지 더. 나는 오랜 시간 여성주의와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관련된 글을 써왔다. 아무래도 내가 동성애자로 살고 경험한 일도 많다보니 글에는 나의 이야기가 자주 담기곤 했다. 하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어놓는 내내 나는 한번도 그것이 나의 경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보통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먼저 상대방에게 내가 성소수자임을 알리고 말을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익숙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글에서는 불가능했다. 언제 어디서 내 글을 읽을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독자들을 일일이 쫓아가 '있잖아 나는 게이인데'라고는 말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순서가 아니라는 알 수 없는 불편함 속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대신 존재하지도 않는 무수한 성소수자 친구들을 만들어 그들의 사연이라고 소개했다.

처음 몇 번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전에 그런 글을 안 써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때로는 가면극처럼 그 일을 즐기기도 했다. '사실은 이거 내 이야긴데 모르지?'라고 생각하며 무해한 장난을 치는 말괄량이처럼 웃기도 했다. 그러다 하루는 친구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가 많은 사교적인 이성애자라고 오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랬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니라 나쁘지 않은 일에 불과했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인 셈이었다.

나는 글쓰기가 중요한 삶의 이유라고 할 정도로 그 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왔다. 가장 성실하고 그리고 정직하게 글쓰는 일에 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든 나는 내가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부분에 있어서는 손쉽게 그 원칙을 기각해온 셈이었다.(물론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처럼 우회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이건 철저히 개인적인 원칙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커밍아웃 이후, 나는 나의 노트북을 이렇게 꾸몄다
 커밍아웃 이후, 나는 나의 노트북을 이렇게 꾸몄다
ⓒ 신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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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걸 끝낼 때가 되었다고 느꼈던 순간

 "이 모든걸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저는 '이것은 나의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하며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찍은 '행성인의 얼굴들'이 업로드 되던 날, 나는 그 영상을 공유하며 SNS를  통해 커밍아웃 메시지를 전달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야 할때 했던 미덥지 않았던 침묵을, 성소수자인 나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것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위장을, 그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공간에서 동성애자로서 우뚝 서보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벽장은 생각보다 넓고 안온했고 그 안에서의 삶이 전혀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너머의 세상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떨지 궁금했다.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부딪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쓴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입니다'라고.

사실 여기까지 읽으면 커밍아웃 이후 내 삶에 대전환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이제 공개적으로 내가 성소수자임을 전제하는 글을 쓰고, 한국여성민우회의 성소수자 소모임 일이삼반이 개최한 커밍아웃 파티에서 발언도 하고, 노트북에 'GAY'라고 적힌 대문짝만한 스티커를 붙인 채 카페에서 원고 작업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상 영역에서 나의 성적 지향이 중요한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성소수자에게는 커피 값을 덜 받는 카페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나의 커밍아웃 선언을 읽지 않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연애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색하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호기로운 커밍아웃 이후에도 그럴 때에 조용히 뒤로 빠져 와인만 홀짝인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깨닫게 된 것은 커밍아웃은 시작이지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발판을 밟았을 뿐 아직 무대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커밍아웃은 다른 이들을 향한 선언임과 동시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다. 나는 세상에 내가 동성애자임을 알렸고 그러니 더 이상 숨지 않겠다는 약속 말이다. 2017년, 긴 시간을 거쳐 나는 드디어 그 서약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2018년에는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는 삶을 살고 싶다.


태그:#커밍아웃, #성소수자, #인권, #퀴어,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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