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분석하는 지표 중 '벡델 테스트'라는 게 있다.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서 그 영화에 여성 캐릭터가 얼마나, 또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알아보는 지표다. 이걸 한국 예능프로그램에 적용해본다면 어떨까. 1. '예능프로그램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등장'하고 2. '이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하고' 3. '이야기의 주제가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의 경우'가 해당할 것이다.

장담컨대 지금까지의 예능프로그램 중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예능 프로그램에 여성 출연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예능 속 여성들은 주로 남성들끼리 벌이는 게임이나 대화의 대상이 되거나, 그들을 빛내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이 한 명씩 등장해 '게임 트로피'가 되었던 <마스터키>나 남성 진행자들 네 명 사이에서 유라가 '귀여운 막내' 역할을 수행하는 <인생술집>을 보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구현하는 여성 캐릭터의 성격이 얼마나 평면적인지 알 수 있다.

2017년 눈에 띄는 변화는 예능 프로그램 속 여성'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나름 자신의 캐릭터 성격을 갖추고, '러브라인'이나 '스캔들' 이외 내용에 대해 말하고 부딪치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심지어는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 간의 '케미'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들도 있었다. 2017년, 함께 있어 빛났던 '예능프로 속 여성 콤비 베스트 3'을 정리했다.

'효리유' -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맨얼굴

 많은 여성들이 "나도 이효리 같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많은 여성들이 "나도 이효리 같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 JTBC


이효리는 언제나 멋졌다. 과거 <한끼줍쇼>에 나와서는 동네 꼬마에게 꼭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으니 '그냥 아무나 돼라'라고 말해주고,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해피투게더>에 나와서는 '왜 전학 왔냐'는 질문에 '담배 피우다가 잘렸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런 말들은 성공한 인물로서 타인에게 충고하려고 들지 않고,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탈피한 발언으로 알려졌다. 특히 제주 소길댁으로서 오랜 휴식 기간을 끝내고 방송에 복귀한 올해는 가히 이효리의 해였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효리네 민박>은 늘 쿨하게 '사이다' 발언을 던지는 이효리의 모습과 그 너머에 있는 솔직함과 따뜻함을 함께 조명한다.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알바생으로 등장한 아이유였다. 과거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미지로 '국민 여동생'의 역할을 맡았던 아이유는 '사실은 다음이 잘 안 될까 봐 항상 무섭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이효리는 그런 아이유를 바라보며 조언 대신 그저 본인의 이야기를 한다. 뮤직비디오 찍는 게 힘들다는 아이유에게는 '제주도에서 혼자 옷 입고 화장하며 뮤직비디오를 찍었더니 재밌었다'고 말하고, 어린 나이에 데뷔해 빨리 밥을 먹는 게 습관이 된 아이유를 보면서는 "나도 그랬는데 나는 말하고 싶어서 밥을 빨리 먹었다"며 웃는다. 밝게 빛나면서도 외로운 정상의 자리를 경험해 본 이가 할 수 있는 따뜻하고 은유적인 조언인 셈이다.

'효리유'(효리+아이유)의 관계가 특히 좋았던 건, 여느 선후배의 관계가 그런 것처럼 한 쪽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효리는 아이유를 보며 멋지게 나이 드는 법을 배운다. 이효리보다는 아이유 세대에 가까운 이들이 아이유에게 온 관심을 쏟는 걸 보며, 한 세대가 지나간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신이 너를 보내줬나"라며, 그 의연한 감정에 대한 감사를 상대방인 아이유에게 돌린다. 세대를 넘어 솔직하게 서로를 마주한 여성들의 연대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송은이와 김숙' - 같이 잘되는 법을 아는 사람들

 송은이와 김숙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쫄깃한 호흡을 형성한다.

송은이와 김숙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쫄깃한 호흡을 형성한다. ⓒ KBS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친구들과 나누는 '아무말대잔치'를 보는 것 같다. 실없는 이야기를 해도 웃기고,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척척 맞는다. 이들의 '아무말대잔치'는 긴 시간 맞춰온 호흡에서 나온다. 개그우먼 선후배로 만나 오랜 시간 친분을 쌓아온 이들은 2015년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이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이후 인기를 얻어 SBS에 '송은이 김숙의 언니네 라디오'라는 프로그램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송은이와 김숙은 '같이 잘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팟캐스트 '비밀보장'에 '경제자문위원'이라는 이름으로 김생민에게 '짠돌이' 캐릭터를 부여했고, 덕분에 김생민은 '그뤠잇'과 '스튜핏' 등의 유행어가 대박 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KBS에 정규 편성된 프로그램 제목은 '김생민의 영수증'이지만, 여기서 이 여성 콤비의 역할은 만만치 않다.

송은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선비' 같은 김생민에게 '브라질리언 왁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김숙은 무조건 '스튜핏'을 외치는 김생민에게 탄산수를 권해 "근데 맛있긴 하다"며 멋쩍게 '스튜핏' 스티커를 떼어내는 상황을 연출한다. 시종일관 영수증 채점만 한다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김생민의 캐릭터에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송은이와 김숙은 시청자들에게 '밀고 당기는 재미'를 선사한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김숙의 캐릭터와, 쩔쩔매며 상황을 설명하는 송은이의 캐릭터는 서로 상대방의 역할이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은 서로를 빛내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빛나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올 한해 TV와 라디오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했다.

'윤여정과 정유미' - 40년 뛰어넘는 선후배의 '케미'

 '윤여정유미'는 37년이라는 세대 차를 뛰어넘는 호흡을 보여줬다.

'윤여정유미'는 37년이라는 세대 차를 뛰어넘는 호흡을 보여줬다. ⓒ tvN


올해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하면 <윤식당>을 빼놓을 수 없다. 발리에서 조그만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콘셉트의 <윤식당>은 평화로운 휴양지의 풍경과 소소한 재미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여기서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윤여정과 정유미의 '안 어울리는 듯한 데도 어울리는' 조합이다.

윤여정은 1947년생, 정유미는 1984년생이다. 둘의 나이 차이는 37살, 웬만한 모녀보다도 더 차이가 크다. 윤여정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정유미와 이서진은 물론 '호호 할아버지'인 신구마저 휘어잡는다.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된 신구에게 "구경만 하시면 'Fired'(해고)된다"라고 엄포를 놓는 윤여정은 다소 까칠해 보이기까지 하다. 혼자서 모든 걸 잘 해낼 것 같던 윤여정은 처음 해보는 주방 일에 다소 허둥지둥한 모습을 보이는데, 아침 일찍 나와 재료를 정리해놓은 정유미 덕분에 안심하고는 "네 덕에 나도 안정을 찾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윤여정이 따뜻하고 인자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할 말을 다 하고 멋진 70대 여성으로서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다만, 연기 대선배인 윤여정이 '마음의 빗장'을 풀고 까마득한 후배 정유미에게 살포시 기대는 장면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완벽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허당'인 윤여정과, 덤벙댈 것 같지만 꼼꼼한 정유미는 서로를 보완하며 주방장과 보조의 역할을 해나간다. 처음에는 안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던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주방에서 손발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흐뭇함을 선사했다. 특히나 이렇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성들의 조합을 보기 드물다는 점에서, 이들의 선후배 '케미'(조화나 호흡을 뜻함)는 독특하면서 또한 소중할 수밖에 없다.

올 한해는 이처럼 특별한 여성 콤비들의 등장이 돋보이는 해였다. 그동안 남성 중심적인 형식으로 제작된 예능프로그램에 지루하고 불편했다면, 여성들이 활약한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것을 권한다. 이어 2018년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브라운관에 등장해서 더 이상 여성 콤비의 존재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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