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서울 SK와 원주 DB의 경기. 승리가 결정되자 DB 버튼과 두경민 등이 환호하고 있다.

12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서울 SK와 원주 DB의 경기. 승리가 결정되자 DB 버튼과 두경민 등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프로농구 원주 DB 프로미는 올시즌 화제의 중심에 있는 팀이다. 시즌 개막전까지만 해도 하위권이 예상되는 전력으로 평가 받았지만, 14일 현재 15승 6패로 당당히 2위까지 오르며 서울 SK, 전주 KCC 등 강력한 우승 후보들과 선두권 경쟁을 펼치고 있다.

올시즌 원주의 돌풍은 이상범 신임감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상범 감독은 2011년 안양 KGC 인삼공사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고, 선수 시절부터 코치-감독에 이르기까지 KGC(전신 SBS-KT&G 포함)에서만 활약한 대표적인 안양맨이다. 공교롭게도 KGC의 첫 우승 당시 챔프전 상대가 바로 지금의 원주 DB였다. 어찌 보면 악연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주목 받지 못했던 이상범 신임 감독

이상범 감독은 2014년 안양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국가대표팀 코치와 일본 아마농구 인스트럭터 시절을 거쳐 한동안 야인으로 머물렀다. 2017년 원주의 지휘봉을 잡으며 3년 만에 프로농구 현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상범 감독을 주목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당시 원주 DB는 김주성·윤호영의 노쇠화, 허웅의 군입대로 인해 사실상 리빌딩 시기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상범 감독에 대한 기대치도 그리 높지 않은 분위기였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스타 플레이어 출신인 현주엽 감독이 창원 LG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화제를 끌었고 이상범 감독은 다소 묻히는 모양새였다.

뚜껑을 열자 결과는 달랐다. 원주는 개막부터 5연승을 질주하는 등 기대 이상의 선전을 보이며 올시즌 프로농구 태풍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2연패만 단 한 번 기록했을 뿐, 시즌 중반에 접어든 지금까지 꾸준한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 실질적으로 디온테 버튼 정도를 제외하면 핵심 전력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을 감안할 때 더욱 놀라운 반등이다. 심지어 이상범 감독 본인도 이렇게 빨리 좋은 성적을 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원주의 선전은 경이로웠다.

이상범 감독은 유독 리빌딩과 인연이 깊다. 처음 감독 데뷔했던 안양 KGC 시절, 팀은 주축 선수들의 이적과 군입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리빌딩에 돌입하던 시점이었다. 이상범 감독은 약 2년 가까이 하위권을 전전하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고 당시 "웃옷에 항상 사표를 가지고 출근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안양은 인고의 시간을 거쳐 2011-2012 시즌 오세근, 이정현, 박찬희, 김태술, 양희종으로 이어지는 국가대표급 라인업을 완성해 우승을 차지했다.

사실 리빌딩 당시에도 이상범 감독의 능력에 주목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년간 성적을 포기하고 '탱킹'(신인 드래프트에서 높은 지명권을 차지하기 위해 성적을 낮추는 것. 주로 리빌딩하는 팀의 전략-편집자 주)을 한 덕에 좋은 신인들을 긁어 모아 우승했다는 냉랭한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시선을 바꾼 것이 원주와의 챔피언 결정전이었다. 이상범 감독은 당시 정규 시즌 최다승을 기록한 원주에 비해 전력상 열세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챔프전에서는 예상을 뛰어넘는 전면 강압 수비와 체력전으로 원주의 트리플 타워를 흔들어놓으며 4승 2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상범 감독의 진가가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다.

동기 부여와 선수 관리가 빛을 발했다

또한 이상범 감독의 숨겨진 장점은 선수들에 대한 동기부여와 관리 능력이다. 이 감독은 안양 시절부터 형님 리더십으로 선수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고 주전이 아닌 식스맨들까지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과를 중시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막상 KBL 감독 중 흔치 않은 중요한 덕목이다.

원주는 주전 의존도가 높기로 악명 높은 팀이었다. 전창진, 강동희, 이충희, 김영만에 이르기까지 설사 나름 성적을 올렸다는 감독들도 '혹사' 논란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범 감독은 같은 선수 구성이라도 활용 방식을 전혀 다르게 가져갔다.

여전히 능력 있지만 체력적 문제가 있는 노장 김주성을 후반 '조커' 역할에 집중시켰고, 뛰어난 득점력에 비하여 잔실수와 기복이 많은 두경민을 에이스로 각성시켰다. 사실상 시즌 농사의 절반 이상을 좌우한다는 외국인 선수 구성에서는 단신이지만 이타적이고  다재다능한 테크니션인 디온테 버튼을 중심으로 내세우며 더 이상 '외국인 몰빵 농구'가 아닌 국내 선수들과의 유기적인 조화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로테이션의 활용도가 다채로워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무명에 가깝던 서민수와 김태홍이 주전급으로 올라섰고, 맹상훈-김영훈-최성모-이지운-유성호 등 백업 선수들도 출전할 때마다 단순히 휴식시간을 책임지는 정도를 넘어 확실한 역할을 부여 받아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나씩만 떼어놓고 보면 별것 아닌 결정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대 동부 감독들이 가지고 있던 팀 컬러의 고정관념을 벗어난, 큰 변화였다. DB는 이제 더 이상 골밑 중심의 보수적이고 정적인 '아재농구'의 팀이 아니라 한결 젊고 역동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젊은 팀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감독 한 명의 중요성이 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 장면이기도 하다.

물론 시즌은 길고 장기레이스에서는 아직 많은 변수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상범 감독이 올시즌 노쇠해가던 원주를 재건하며 자신의 지도자 커리어에 가장 의미있는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부임 당시 보여줬던 리빌딩의 초심과 방향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이상범 감독과 원주의 상승세는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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