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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김치 아까워서 어떻게 하지? 김치 좀 가지고 갈까?"

베트남 달랏에서 두 달 동안 살아보자며 기세 좋게 외쳤지만 막상 떠날 날이 다가오자 나는 온갖 게 다 걱정이었다. 닭 모이는 어떡하며 개는 누구네 집에 맡길지 등,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을 붙잡는 것은 김장 김치였다. 뭐 하려고 김장을 그렇게 많이 했나 하고 때늦은 후회도 했다.

베트남 온 지 보름, 여전히 김치가 그립다

우리는 지금 베트남의 달랏에 와 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보름이 다 돼간다. 김장 김치가 못내 아쉬워서 발길을 떼지 못했는데, 여전히 김치 생각만 하면 아쉽기만 하다. 낯선 나라의 음식도 곧잘 먹는 식성 좋은 우리 부부이건만 김치만은 끝내 놓을 수가 없다.

사돈댁과 손 아래 동서네까지 함께 했던 즐거운 김장잔치. 110포기나 했으니 손도 참 컸다.
 사돈댁과 손 아래 동서네까지 함께 했던 즐거운 김장잔치. 110포기나 했으니 손도 참 컸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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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장을 자그마치 110포기나 했다. 한 포기당 4쪽씩 쪽을 냈으니 장장 440쪽이나 된다. 하루에 한쪽씩 먹어도 일 년을 먹고도 남을 양이다. 물론 우리 부부 둘만을 위해서 한 김장은 아니었다. 손 아래 동서네와 사돈댁도 오시라고 해서 김장을 같이했다. 봄에 결혼한 딸과 사위도 와서 일손을 도왔으니 우리 집의 김장은 축제였고 잔치였다. 여럿이 함께하고 나누는 그 재미에 김장을 그렇게 많이 한 것이다.

사돈과 동서는 많이 가져가도 어디 둘 데도 없다면서 조금만 챙겨갔다. 먹고 모자라면 그때 와서 또 가져가겠다며 김치통으로 네다섯 통씩만 가져갔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림에 서툰 딸과 사위도 김치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김장김치가 근 80포기나 남아 있는 셈이다.

겨울 동안 따뜻한 나라에서 살기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고 김치를 차곡차곡 채웠다. 김치냉장고가 아무리 좋다 한들 천연의 김장독을 당할 수가 있으랴. 시큼하게 익어가는 김장 김치를 꺼낼 때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했다. 그런 김치를 두고 떠나야 하다니, 그야말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지내는 분 중에 겨울만 되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났다가 봄이 되면 돌아오는 부부가 있다. 벌써 십 년도 더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으니 남들보다 한창 앞서나갔던 부부인 셈이다.

자녀들도 다 키웠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는 분이니 여행을 할 수 있었겠지만 여유가 된다고 또 다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발목을 붙잡는 게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그래도 눈 딱 감고 장기여행을 하고 있으니 참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의 달랏은 열대지방인데도 고원지대에 있어 선선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가을날씨 같아 지내기에 아주 좋다.
 베트남의 달랏은 열대지방인데도 고원지대에 있어 선선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가을날씨 같아 지내기에 아주 좋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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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말을 들었을 당시 나는 애들 공부를 신경 써야 할 나이였다. 한참 공부하는 자녀가 둘이나 있으니 어디를 나간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추운 겨울 동안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지내기'는 너무나도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농담인 양 따뜻한 남쪽 나라 타령을 하고는 했다. 퇴직을 하면 꼭 그렇게 하자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그냥 하는 말이었지 실제로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꿈을 현실에서 이루었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훌훌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명예로운 은퇴, 새로운 출발

지난 8월 말에 남편은 33년간 몸담았던 교직에서 은퇴했다. 아직 몇 년 더 일할 수 있었지만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고 원 없이 사랑을 주고받았으니 미련은 없다고 했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진짜 용기라고 하는데, 남편은 지혜롭게 그때를 알아 실천했다.

이제 우리 발목을 잡는 것은 별로 없다.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이 있지만 이미 성인이니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할 수 있다. 퇴직도 했으니 시간도 많다. 그래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김장까지 다 하고 나서 우리는 떠났다.

커피나무 꽃에 벌이 날아들었다.
 커피나무 꽃에 벌이 날아들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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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베트남을 선택했을까. 살기에 좋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 태국의 치앙마이나 인도네시아의 우붓 같은 곳도 있는데 우리는 왜 베트남으로 온 것일까. 그것은 '벌' 때문이었다. 베트남의 꿀벌과 꿀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베트남을 택한 것이다.

남편은 어디를 다치거나 삐어도 약을 바르거나 병원에 가지 않고 스스로 치료를 하고는 했다. 벌침과 약쑥 훈증이 남편이 즐겨 사용하는 치료법이었다. 물론 작은 상처일 때의 처치법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상처는 충분히 치료됐다. 벌써 오래전부터 본인에게 하고 있는 치료법이다.

벌을 찾아 떠난 여행

전에는 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학교 화단이나 우리 집 마당에는 벌들이 날아와서 꽃에 앉아 꿀을 취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벌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자연환경의 변화와 살충제 등으로 인해 벌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작년 봄부터 벌을 키우고 있다. 한 통으로 시작했으나 남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벌통은 늘어났고, 지금은 근 스무 통 가까이 있다. 벌통 하나에 수만 마리의 벌이 산다는데, 그렇다면 우리 집에는 수십만 대군이 살고 있는 셈이다. 남편은 어느새 봉군(蜂軍) 수십만 명을 거느린 대장군이 됐다.

약으로도 쓸 수 있는 벌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약으로도 쓸 수 있는 벌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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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을 키우다 보니 벌을 연구하게 됐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더니 남편과 나는 벌을 사랑하게 됐다. 전에는 꿀을 사서 먹어도 돈을 주고 사는 상품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벌들의 노고에 미안해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꿀을 먹는다.

그렇다 보니 자연 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추운 겨울에는 벌들도 활동하지 않지만 열대지방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내내 꿀을 딸 수 있는 나라에 가서 벌을 키우는 법을 살펴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의 첫 장기여행지는 베트남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베트남의 달랏에 온 지 약 보름째, 마침내 벌들을 만났다. 벌을 키우는 집을 방문해서 벌통도 들여다보고 여왕벌도 알현했다. 가까이 다가가도 벌들이 공격하지 않았다. 꽃이 풍부한 곳이라서 벌들이 독하지 않은 걸까. 경제 규모가 우리나라보다 작은 베트남이지만 벌들은 우리나라 벌보다 순했다. 꿀 역시 달콤했다.


태그:#베트남, #달랏, #한 달 살기, #벌꿀, #양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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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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