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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미지는 시끄럽고 혼란한 세상을 화살처럼 뚫고 들어와 우리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박힌다." (더글라스 브링클리, 美 라이스대학 역사학과 교수)

때로는 열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이미지가 더 강렬한 이야기를 건넬 때가 있다.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을 받은 아이들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베트남전의 참혹함을 알리며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우주에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환경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도시의 곳곳에 거대한 흑백사진을 설치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진작가 JR의 프로젝트들 역시, 난민, 여성, 이주민, 빈민가와 같은 사회 문제에 이미지로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참고 링크).

올 봄,  동료 활동가들과 낙태죄를 공부(?)하던 도중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있었던 '형법 제269조 낙태죄'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른바 낙태죄 '찬반' 논쟁) 내용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최근의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찬성('태아의 생명권') vs. 반대(여성의 자기결정권)'라는 잘못 세팅된 논쟁 구도도 그렇고, 그 구도 안에서 평행선만을 달리는 논리도 그랬다.

'낙태죄 폐지의 필요성'에 대해서 소모적인 언쟁이나 논쟁이 아닌, 더욱 견고하고 예리한 논리로의 무장도 아닌, '다른 방식의 말하기'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열 마디 말 보다 강렬한 한 장의 이미지, 사진이었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혜영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ground 269

"같이 (임신중절 경험을) 얘기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음... 왜, 같은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고향으로 돌아온 전사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우리 그 전쟁에서 그랬지' 하는. 그게 그 전장에, 똑같은 자리에 똑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공감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 같은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병사들의 이야기... 아, 그건 위안이 될 수 있구나." (2017 민우회 '임신중절을 경험한 여성들의 작은 이야기모임' 참여자 소감 中)

임신의 지속(출산)도 중단(중절)도, 누군가의 신념 위에서 일어나는 추상적인 일이 아니라, 여성의 몸과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여성의 몸에 직접 담은' 사진 269장을 모으기로 했다. 낙태권 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미국, 페미니스트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가 남긴 'Your body is a battleground(너의 몸은 전쟁터다)'라는 작품을 떠올리며 프로젝트 이름을 정했다.

먼저 100장의 사진을 5차례에 걸쳐 사진작가 혜영(blog.naver.com/bbalganchoi)과 함께 촬영했다. 이틀 만에 수십 명의 참여 신청이 이어졌고, 여름 동안 뜨겁고 유쾌한 촬영이 시작되었다. 참여자들은 대기실에 모여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순서가 되면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에서는 다소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만난 지 10분 만에 배를 까고(?)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가며 조심조심 형법 269조 전문이 새겨진 스티커 타투를 붙여주는가 하면, 그 상태로 다음 촬영 참여자가 도착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옆 사람의 배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스티커 타투 글자를 걱정하는 사람은 등을 까고(?) 립스틱으로 '낙태죄를 폐지하라'를 적는 그런 진풍경.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혜영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혜영
동시에 이번 촬영 프로젝트는 예기치 못한(?) 몸 해방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촬영이라고 하니 왠지 제모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대로 왔어요. 겨드랑이 털까지 보이게 촬영하고 싶어요."
"전 팔을 찍기로 했는데, 갑자기 제 팔뚝이 너무 연약해보여요. 힘 있는 모습을 남기고 싶은데 여성운동에 방해될까봐 다른 부위를 찍어야겠어요."
"여기에 오래된 상처가 있어요. 어느 부위를 찍고 싶냐 물으니 이상하게 상처 부위가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뚱뚱하게 살만 쪘다고 식구들한테는 핍박만 받던 배였는데, 여기 와서 제 배가 모델이 되니까 희열이 느껴지네요."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혜영
"하느님, 저는 낙태했고 후회하지 않아요" "괜찮아, 수고했어"

참여자들에게 직접 받았던 촬영 문구 중에도 인상적인 사연이 많았다. 최근 중절수술을 받고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촬영에 참여했다는 한 참여자 분은 등에 친구에게 보내는 연대와 위로의 메시지를 적고 싶다고 하셨다.

오랜 고민 끝에 "괜찮아, 네 몸이야. 수고했어"라는 문구를 쓰기로 정한 그녀는 카메라가 돌아가자, 조용히 친구의 어깨를 토닥여주듯, 등을 쓸어내리듯 자기 등을 안아주었고, 우리는 그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았다.

사진을 공개하면서, 그 분의 사진을 중절수술 경험을 사진으로 남겨주셨던 분들의 사진 아래 나란히 붙였다. 그녀가 남겨주고 간 촬영 소감처럼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혜영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혜영
연대의 증거, 용기의 증언

형법 제269조 낙태죄의 폐지를 위해 269장의 사진을 모으는 프로젝트. 100장의 사진 촬영이 끝난 후, 나머지 169장의 사진은 온라인 해시태그 액션(#낙태죄를폐지하라, #Battleground269)을 통해 모았고, 400장이 넘는 사진이 모였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해시태그 액션에 4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해주셨다. ⓒ ⓒ한국여성민우회
사진은 흘러가는 시간을 정지시키고 순간의 장면을 증거로 만든다. 여기, 50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한 시간과 사진이 있다. 이 사진들이 형법 제269조의 폐지의 그 날을 위한 연대의 증거, 용기의 증언이 될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반드시 임신중단권을 쟁취할 것이다."

"사진을 촬영하며 늘 임신을 걱정하게 되는 제가 떠오르며 화가 났습니다. 왜 저는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건가요. 아직도 국가에 의해 여성들의 삶이 볼모로 잡혀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화가 납니다. 여성들이, 우리들의 당연한 권리를 얻을 때까지 저는 함께 싸울 것입니다." (참여자 소감 中)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혜영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사진 더 보기]

1편 : 아랫배에 새긴 형법 269조 "내 삶은 범죄가 아니다"
2편 : "우리는 반드시 임신중단권을 쟁취할 것이다"
3편 : "당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나의 삶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원고는 한국여성민우회 소식지 '함께 가는 여성' 2017년 하반기 호에 중복게재 되었습니다.

태그:#낙태죄, #임신중절, #BATTLEGROUND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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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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