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방송 파업을 위해 KBS 새노조가 다시 깃발을 들었습니다. "RESET KBS!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가겠습니다!" KBS 구성원들은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고대영 사장 퇴진과 무소불위의 KBS 이사회를 향한 싸움. 이번에는 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KBS 구성원들이 직접 시청자 여러분에게 전하는 글을 <오마이뉴스>에서 연속으로 싣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들의 꾸준한 싸움을 지켜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 글은 2016년 입사한 이이백 시사교양 PD의 글입니다.

시청자이자 피디 지망생이던 시절 비판을 가장해 쉽게 KBS를 욕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유족들이 KBS본관 앞에 찾아 갔을 때, 언론사로서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하고도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걸까 싶었다. 청년 실업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 왜 공영방송이라는 곳에서는 이 문제를 더 다루지 않는 걸까하는 생각도 했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KBS는 방송인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시청자에게도 더이상 1순위가 아니다. 꽤 오랫동안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공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소문과 내 추측으로 만들어진 KBS는 무력하고 무능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공영방송사에 입사하고 싶었다. KBS는 모든 시민의 참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신료로 운영되고, 이는 KBS가 지향하는 가치를 무엇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권력이 아닌 공적 영역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곧 KBS의 책무이다.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때는 있을 수 있어도, KBS가 실현해야 할 공적인 가치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KBS새노조 조합원들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비리이사 해임 촉구 조합원 결의대회’를 열고 ‘이인호 이사장 등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2017.12.05

KBS새노조 조합원들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비리이사 해임 촉구 조합원 결의대회’를 열고 ‘이인호 이사장 등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2017.12.05 ⓒ 최윤석


나도 KBS를 욕했던 사람이었다

입사하고 가장 먼저 마주했던 건 많은 선배들의 비관과 자조였다. 'KBS 망했어, 여긴 안 돼.' 내가 어떻게 준비해서 들어왔는데 저런 말을 가벼운 농담처럼 던지는 걸까. 처음에는 자신들이 수년간 받은 상처를 면죄부 삼아 갓 입사한 우리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섭게도 나 역시 2년이라는 시간동안 무겁고 짙게 그 비관에 젖어들었다.

직접적으로 부당한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입사 전 소문과 추측으로 만들어낸 KBS의 모습,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아예 다루려고도 하지 않고 특정 출연자들은 섭외도 불가능한 조직이라는 걸 조금씩 실감했기 때문이다. 한 피디 동기는 선배와 함께 정치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편성이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밀리고 밀려 시의성이 다 떨어진 시점에야 방송됐다. 동기 기자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을 때 TF팀에 속해 취재를 나갔는데 현장에 갈 때마다 들었던 얘기가 "왜 한 달이나 지나서 오세요?"였다고 했다.

어떤 조직이든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있다. 언론사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결정을 조직의 대다수가 반발할 때이다. KBS가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도 누릴 수도 없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단 몇 명이 결정과 평가를 독점한다는 건 크나큰 비극이다. KBS가 무능하고 무력해 보이는 이유는 책임 없이 결정하는 사람만 있었기 때문이다. 명령은 있지만 사후 책임은 없는 검열 속에서 언론인이라는 존재가치는 점점 희미해진다.

한 기자 동기는 데스크의 부당한 지시가 100이면 싸워서 거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70, 50으로 줄일까를 고민하게 된다고 한다. 아마도 KBS의 많은 사람들이 그 50으로 지난 9년을 보내 왔던 게 아닐까. 2년차인 우리조차 정해진 답을 숙제하듯 풀어내야 하는 일을 반복하며, '자율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깎아내 스스로에게 다시 이해시키는 과정을 함께 반복한다.

공영방송사에 수신료를 내고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더 큰 배신감을 안겨주는 변명일 수 있지만, 그렇게 언론인이라는 말에 부끄러움이 묻어날 정도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배신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파업은 중요하다. 마비되어가는 우리 스스로에게 언론인이라는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리이사 해임 촉구' KBS새노조 24시간 릴레이발언 총파업 93일째인 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조합원들이 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앞에서 KBS 비리이사 해임을 촉구하는 24시간 릴레이발언을 시작했다. 성재호 위원장이 릴레이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 '비리이사 해임 촉구' KBS새노조 24시간 릴레이발언 총파업 93일째인 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조합원들이 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앞에서 KBS 비리이사 해임을 촉구하는 24시간 릴레이발언을 시작했다. 성재호 위원장이 릴레이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 권우성


9년간 망가진 KBS... 잘 몰랐던 내부의 저항

생의 첫 파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과 '파업가'를 소리내어 불렀다. 며칠 동안은 음을 정확히 몰라 가사를 보며 입만 뻥긋거리는 내 모습에 내가 괜히 민망하게 느껴져 핸드폰 플레이리스트에 '임을 위한 행진곡'과 '파업가'를 넣어 놓고 익혔다. 그런 내가 얼떨결에 집회를 진행하는 팀에 속해 집회 때마다 꽤나 앞에 서게 됐다. 매일 나와서 뭔가를 만들고 준비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힘든 일이긴 하지만 매일이 생방송 같은 방송국 사람들의 파업은 또 어쩔 수 없이 재밌기도 하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방송을 제작할 때만큼 혹은 방송제작 할 때보다 더 많은 걸 하고 배우고 있는 것 같다. 집회에서 카메라 2대(혹은 1대)를 놓고 '생방송'처럼 커팅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보니 (발)연기를 하기도 하고 평소 제작할 때보다 더 많은 카메라를 써가며 연출을 해보기도 했다. 아이러니 하지만 방송국이 파업을 했는데 또 하나의 작은 방송국이 생긴 느낌이랄까? 집회 시작 직전까지 영상 편집을 하는 선배들을 보면 파업이라는 결연한 단어 앞에서 '방송쟁이들의 어쩔 수 없음'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초반까지도 '파업을 하면 크게 달라질까'라는 의문을 품은 채 막내라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갖고 이 파업 대열에 끼어 있었다. 부당한 일을 당해 본 적 없고 그렇다고 전설로만 알고 있는 좋은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2년차에게 당연한 일이지만 선배들의 분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함께 싸우고 있지만 나는 주변인인 것 같다는 생각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뭔가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KBS 파업

KBS 파업 ⓒ 이이백


공영방송 KBS를 되찾고자 합니다

지난 9년간 회사 게시판 글들을 하나하나 캡처해 가며 저항의 기록을 모은 선배, 입사 3년차에 혼자 피켓을 들었던 선배, 인사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싸움에 나섰던 선배들. 아마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해온 사람들의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며 그랬던 것 같고, 또 나라면 하지 않았을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보며 그랬던 것도 같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멈칫한다. 밖에선 혹은 내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을 소소한 싸움들. 어쩌면 모두가 살짝 고개 돌리고 지나쳤을 수 있지만 매번 누군가는 그러지 않았다는 걸 사진으로 영상으로 볼 때마다 지난 9년이라는 시간이 그저 흐르는 대로 흐르지 만은 않았다는 걸 짐작해본다. 그리고 경험하지 못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그저 어쩌다 끼어 있는 게 아니라 의심할 여지 없이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었다.

90여 일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같이 광장에 모여 우리는 공영방송이라는 가치를 위해 함께 싸우고 있다. 그리고 '함께 싸울 수 있다'는 느낌을 공유한다. 한 선배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 또 함께 '저항의 근육'을 키우고 있다. 파업이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대다수는 서로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파업이라는 시공간의 덩어리 속에서 함께 했다는 느낌을 안고 돌아 갔을때 우리는 예전과 다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를 가장 날카로운 방식으로 체득하고 있다. 파업이 끝나도 이번 '파업의 기억'은 서로를 더 깊이 찌르고 옭아매야 할 것이다.

초반에 위원장이 집회에서 말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우리는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솔직히 싸움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대오를 지키기 위해 던지는 말쯤으로 읽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위원장이 "우리는 더 단단해 지고 있습니다"라고 했을땐, 상대에게 위협을 주고, 우리를 위안하기 위한 말로 읽혔다. 90일을 넘긴 지금은 '우리가 단단해 진다는 것'이 다른 말로 대치할 수 없다는 걸 느낀다.

 이이백 KBS 시사교양 PD

이이백 KBS 시사교양 PD ⓒ 이이백


* 이이백 PD는 2016년 입사해 현재 새노조 파업 기획단에 속해 있습니다. 파업 전에는 KBS 2TV에서 < TV 유치원>을 연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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