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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이따금 들르는 돼지국밥집이 있다. 지역별로 국밥의 특색이 조금씩 다른데, 그 집 국밥은 고춧가루를 살짝 뿌린 부추를 팔팔 끓는 국밥에 넣어 익혀 먹는 것이 특색이다. 거기에 들깻가루, 마늘, 후추 등을 자기 식성대로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다. 종지에 한입 크기 정도의 국수사리 하나가 담겨 나오고, 김치와 깍두기 등의 밑반찬은 먹을 만큼 덜어서 먹으면 된다.

뜨끈한 돼지국밥에 막걸리 한잔 곁들이면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든다. 저녁 식사 때는 늘 손님이 북적거려서 혼자 갈 때는 붐비는 시간을 피해야 한다. 손님이 많을 때 혼자 4인 식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업소에 폐를 끼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음식점에 손님이 많이 찾는다는 것은 다 까닭이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맛이 있어야 한다.

국밥집 주인 할머니는 항상 위생모를 쓰고 있어서 인상이 깔끔하다. 미소 띤 얼굴과 살가운 목소리로 '어서 오시라'며 반긴다. 그런데 다른 손님에게는 국수사리를 한 개 주는데, 나에게는 두 개를 준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지만, 그런 것에서 인간적인 온기를 느끼게 된다.

'간장 두 종지'와 게이트키핑

중국음식점의 간장 종지(자료사진)
 중국음식점의 간장 종지(자료사진)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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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정을 느끼고, 더욱 사소한 것에서 마음을 상할 때가 있다. 특히 먹는 것과 관련된 일에서는 소소한 부분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언젠가 '간장 두 종지'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무슨 내용인가 하고 찾아 읽어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촌극이었다.

어느 메이저 신문사의 부장이 동료 3명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회사 근처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을 시켰는데, 간장 종지가 1인당 1개가 아니라 2인당 1개라는 이유로 뿔이 단단히 난 것이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말투나 태도가 불손했을 수도 있다. 일상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찮은 호박 나물에 속이 상하는 존재가 인간인지라 간장이 아니라 맹물 한 잔에도 분통을 터트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일기장에나 쓸 내용을 신문 지면에 싣겠다는 마음을 낼 정도로 분기탱천한 모양이었다. 기자 자신도 그런 내용을 쓴다는 것이 켕겼던지 '옹졸한 이유'라고 적었지만, 옹졸함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다분히 악의적인 글이 분명했다. 홧김에 그만 특정 식당을 타깃으로 삼아 노승발검(怒蠅拔劍)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리를 보고 칼을 빼 든 격인데, 총칼보다도 무섭다는 펜을 사적인 일로 휘두른 그 심사가 무섭고 표독스럽게만 느껴졌었다.

한때 나는 이름도 미미한 어느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 월간 잡지사의 데스크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문이고 잡지였겠지만, 그 내부의 구성원들은 무척이나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최대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아무리 작은 언론·잡지사에서도 '게이트키핑'을 거치게 된다. 게이트 키퍼(gate keeper)는 우리말로 '문지기, 수위'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문지기처럼 단단히 지키고 서서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데, 언론에서는 뉴스 결정자가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과정이 '게이트키핑'이다. 최종 결정자는 기사가 언론윤리강령에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즉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꼼꼼히 살핀 후 지면에 싣고 말고를 결정한다.

그런데 굴지의 언론사에서 '간장 두 종지'와 같은 의도가 불순한 칼럼이 걸러지지 않고 지면에 떡하니 실렸다는 것이 의아했었다. 걸러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한 것일까? 전자라면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후자라면 막강한 언론 권력의 오만방자함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언론은 힘이 세고 그 힘은 무섭다. 어떤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거나 매장하기도 한다. 잘못된 언론 기사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본 기업은 많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언론은 정책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치면서도 정작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언론의 힘은 변덕스럽고 위험하다"라고 진단했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언론이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균형감각을 상실할 때 심각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김수영의 '분노'가 그리운 이유

사람은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부부도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종교가 다르고 신념이 다르고 생사관이 다르다. 세상은 다양한 개성들이 모여 이루어진 모자이크 작품에 비유할 수 있다.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세상을 온통 장미꽃으로만 채웠다고 상상해 보라. 참으로 멋이 없고 그 획일성에 금방 질릴 것이다. 다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소수 의견도 사람마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장점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다양한 문제에 개인마다 시각차를 보인다. 관점의 차이다. 내가 오른편에 치우쳐 서 있으면 좌가 많이 보일 것이고, 왼편에 치우쳐 서 있으면 우가 많이 보일 것이다. 어떤 시각에서 대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신문도 보수와 진보 신문이 있고, 중도를 표방하는 신문도 있다. 나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한다고 일컫는 두 신문을 보고 있다. 두 신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뭇 다르다. 집회 사진을 싣더라도 보수 신문은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하고, 진보 신문은 공권력의 과잉 대응 사진을 싣는다. 극과 극의 배치이다. 똑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두 신문의 골수 독자들이 서로 만나 대화를 한다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므로 물과 기름처럼 둥둥 떠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언론이 서성거린다. 1988년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그해 김수환 추기경은 송년 인터뷰에서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면 국민은 빛 속에서 살 것이고, 언론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면 국민은 어둠 속에서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땅에는 권력의 '애완견'이 되기를 자처하는 언론이 적지 않다.

나는 우리 사회 병폐의 정점에 언론이 도사리고 있고, 정치에 앞서 언론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편파, 왜곡 보도를 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결정적 허물은 못 본 척 눈을 감는다. 비리투성이의 힘센 기업이나 사람은 건들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만만한 쪽을 건들면서 법과 정의를 운운한다. 사실대로 쓰면 재미가 없어서 그런지 부풀리고 꾸며내기도 잘한다. 연예인의 스캔들 같은 사건은 대서특필하면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의 공정성 결여는 사회적 담론을 편향적으로 몰고 가게 된다. 그런 것이 가능하기에 정치 권력이 탐욕스럽게 농간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짧은 칼럼 한 편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글의 힘이면서 메이저 신문의 힘이다. 만약 다른 신문에 그런 칼럼이 실렸다면, 아마도 그렇게까지 인구에 회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장 두 종지'를 읽은 후 씁쓸해진 생각 속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시 한 편이 있었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였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X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

정말로 분노해야 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데, 왜 우리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것일까?
 정말로 분노해야 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데, 왜 우리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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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당시 원고료 몇 푼으로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가난한 김수영 시인은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다. 설렁탕집 주인에게 욕을 해대는, 약자에게만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신도 싫어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하고 자신을 먼저 성찰했다. 참된 용기는 그런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그토록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낸 사람은 드물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 있게 현실 문제를 시로 써서 비판했다. 시인 특유의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왕궁의 음탕'에 힘껏 저항했었다.

시인을 분개하게 만든 설렁탕집 갈비의 기름 덩어리와 기자를 분개하게 만든 중국집의 간장 한 종지, 묘하게도 분위기가 많이 겹치면서도 다르다. 시인과 기자, 두 사람 모두 원고를 써서 삶을 지탱하는 사람이다. 50년 전의 시인은 가난하고 힘이 없어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밖에 낼 수 없는 개인이었고, 작금의 기자는 힘 있는 언론사의 완장을 찬 덕에 '천둥소리'라도 낼 수 있는 위치이다. '왕궁의 음탕'에 분개하고 호통을 쳐야 할 사람이 약하디약한 식당 주인에게 대단한 '갑질'을 하고서도 일말의 성찰이 없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김수영 시인도 개탄했듯이 우리는 작은 일에만 주로 분개한다. 시대는 변했다지만 권력자들의 방자함과 몰염치는 갈수록 도를 더하고, 사회 모순과 부조리는 기승을 부린다. 정말로 분노해야 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데, 왜 우리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것일까?

'막장 손님과 일하지 마라' 미국 CEO의 충고

몇 해 전 TV에서 '한국인의 화'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방송 내용이 생각난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을 실생활 속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대부분 사람이 화나게 만든 대상에 대해 화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양상을 보여줬다. 화를 돋우는 대상이 자신보다 지위, 계급, 서열 등에서 위에 있으므로 화낼 수 없을 때는 화풀이 대상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뺨을 때린 이가 권력일 경우 거기에 정면대응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더 약한 곳으로 가서 분통을 터뜨렸다. 갑에게 뺨을 맞은 을은 병에게 가서 화풀이하고, 병은 정에게, 그렇게 약한 곳을 찾아 내려가다 화풀이 대상을 찾지 못하는 누군가는 애꿎은 강아지에게 발길질한다. 자기보다 약자를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참 지질한 짓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돈 좀 있다고 사람을 함부로 얕보는 츱츱한 인간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인성이 나빠 인간적인 배려가 전혀 없는 자들이 서민들의 분노를 유발하고, 그렇지 않아도 힘든 마음에 상처를 준다.

언젠가 EBS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 '그 사람의 품격'을 인상 깊게 봤다. 미국 방위산업체 CEO 빌 스완슨이 정리한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비즈니스 규칙 33가지' 중에 '웨이터의 법칙'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사람을 만나러 간 식당에서 웨이터가 실수로 그만 그 사람의 하얀 와이셔츠에 와인을 쏟았다. 그때 당신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에게 어떤 자세를 보이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 내면의 모습, 즉 품격이라는 것이다.

실수한 웨이터에게 험하고 거칠게 대하는 사람은 절대로 비즈니스 파트너로 고르지 말라고 충고한다. 웨이터로 대변되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 험하게 하는 사람은 부하직원들도 험하게 다루어 인재들이 떠나게 만들고, 동업자도 수가 틀리면 언제라도 뒤통수를 칠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당신에게는 친절하지만 웨이터에게 무례한 사람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데,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다.

愼思篤行 接人春風 신중히 생각하고 충실히 행동하라.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라.
염두에 두고 자꾸 되뇌이는 말인데, 잊지 않으려고 거실 벽에 붙여 놓았다.
▲ 愼思篤行 接人春風 愼思篤行 接人春風 신중히 생각하고 충실히 행동하라.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라. 염두에 두고 자꾸 되뇌이는 말인데, 잊지 않으려고 거실 벽에 붙여 놓았다.
ⓒ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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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감정노동자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마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듯이 막말을 퍼붓는다. 하찮고 작은 일에 거칠게 으르릉거리는 사람을 보면,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알게 된다. 바닷물이 짠지 알기 위해 전부 마셔볼 수는 없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그 사람의 전 인격이 나타나기도 한다. 옛말에 '언덕은 내려다보더라도 사람은 내려다보지 말라'고 했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될 때가 있는 법이다.

인터넷은 정말 재밌고도 무섭다. SNS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제는 힘이 약한 개인도 목소리를 내는 시대로 진입했다. 날마다 무수한 정보가 넘쳐난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묻어두고 지나쳤을 수도 있는 약자의 억울함과 설움이 SNS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거기에 대중이 공분하여 목소리를 보태기 시작하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관포지교'로 유명한 관중은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면 남들에게 욕을 먹지 않고,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들에게 욕을 먹는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칭찬을 받지는 못할망정 만인에게 욕을 먹고 손가락질받는 개망신은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회 변혁은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먼저 나부터 실천하는 것이 옳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좋은 표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씩 훈훈해진다. 그리하여 시나브로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태그:#인문학적 붓장난, #간장 두 종지,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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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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